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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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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

대지<1>

내가 처음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간 것은 여섯 살 때 여름 해남 가는 밤배였다. 사리 때였는데 캄캄한 밤바다에 온통 가득가득 차 이리저리 뒹굴며 춤추며 요사스런 재롱을 떨며 난리법석을 치는 붉고 푸른 도깨비들이 참 장관이었다.

도깨비란 게 본디 그렇지만 그리 온 바다와 하늘에서 북새를 놓는데도 섬뜩하거나 무섭질 않고 신기하고 재미난 것이 오히려 친근감까지 들었던 것 같다. 그놈의 초란이 방정탓일 게다.

그 무렵 있었던 작은 숙부의 유명한 도깨비 사건이 생각난다. 밤늦게 마슬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숙부가 문간에서 도깨비와 마주쳤다. 씨름을 하자고 덤빈 모양인데 하여튼 밤새도록 문간에서 엎치락뒤치락, 퍼어런 신새벽에야 마침내 붙잡긴 붙잡았던가 보다. 온통 흙투성이 뻘투성이가 된 숙부가 어칠비칠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대로 나 뒹굴며
“도깨비, 도깨비, 나 잡았다. 쩌그 쩌그 문깐에!”
하고 그만 잠에 곯아 떨어져 버렸는데 식구들이 모두 나가보니 측간 뒷벽에 세워둔 똥뭍은 몽땅빗자루가 문설주에 새끼줄로 꽁꽁 묶여 있더라는 거다.

저녁 나절에야 부스스 깨어 일어난 숙부의 쑥대머리형용을 보고 곰보할매,
“도깨비가 니 잡었다. 도깨비가 니를 잡았어”
헌데 가만히 보니 턱이며 뺨이며 귓바퀴며 온 얼굴에 시뻘건 이빨자국, 웬 거냐니까 왈
“도깨비가 비겁하게 막 이빨로 물어 뜯더랑게”
허허, 도깨비가 이빨도 있나?
그래. 도깨비는 그런 놈이다.

하늘엔 구름송이가 타고 있었고 흰 마당에 뜨거운 햇빛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마당에 멍멍히 서 있었다. 해남군 산이면 솔숲 언덕 밑 신작로 가 큰이모할머니네 여름 한낮. 1946년 여섯 살 때. 토담 위로 큰 캡이 하나 불쑥 나타났다. 큰외삼촌, 목포에서 온 것이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큰외삼촌은 큰 트렁크를 들고 있었고 여름인데도 큰 탱크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루에서 어머니와 외삼촌이 함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웬 낯선 흰 옷 입은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빽빽한 시누대 숲을 빠져나간다. 어느 초가가 나선다. 그 집 마당을 또 지나간다. 마당에서 배가 뽈록한 벌거숭이 아이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흰 무궁화가 만발해 있다. 무지개 서듯 뜨거운 햇빛. 눈부신 붉은 황토와 짙은 초록의 대지. 아저씨는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벌죽벌죽 웃고 있었고 나는 내내 취한 듯 비틀거렸다.

속창까지 넋까지 햇빛이 꿰뚫는 듯, 허나 그리 뜨거우면서도 한편 서늘한 느낌이었으니 이상하다. 나는 왜 혼자 떨어졌고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모른다. 단지 하나 외로웠다는 것. 외로움 속에 깊이 새겨진 그날 그 불타는 듯 찬란한 해남 여름 대지의 영상이 마치 미친 태양 숭배자처럼 그후 줄곧 나를 여름 대지에 대한 거의 병적일 정도의 짙은 사랑으로 이끌었던 것.

배, 바다의 배.
이 세상에 배처럼 신기한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배를 무척 좋아해서 배 그림도 수 없이 많이 그렸다. 물 위에 떠가는 배도 좋지만 뭍에 얹혀 몸체를 다 드러낸 배가 이상하게 좋았고 철갑의 기선도 멋있지만 돛달린 곡선이 훨씬 더 멋있었다. 무엇 때문에 배를 그리도 좋아했을까? 그것도 뭍에 얹혀 움직이지 못하는 배를.

내가 두 번째로 해남에 간 것은 1948년 여름방학. 여덟 살 때다. 북술이 이모할머니를 따라 할머니의 외손녀인 나보다 세 살 손아래 청자와 함께 아침배를 탔다. 시아 바다는 마침 조금 때여서 뱃길 좌우에 시커먼 뻘둔덕이 연이어 드러나 있었는데 그 위에 여기저기 아! 배가, 배들이 그 신비한 몸체를 밝은 햇빛 아래 다 드러낸 채 덩실하게 얹혀들 있었다. 그때의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우울한 성채? 잠자는 전설의 거인을 바로 곁에서 본 느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이었다.

하여간 너무 옹골져서 행여 잊을세라 깊이깊이 눈 속에 새겨두려고 두눈을 크게 부릅떠 보고 보고 또 보고.

내 오랜 버릇 가운데 하나. 우연히 부딪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나 울적하지만 의미심장한 사물을 눈 속에 깊이 새겨두었다가 외롭고 고달픈 땐 마치 뜨내기가 몸 속 깊이 감추어둔 고향길 노잣돈 꺼내듯이 하나하나 되살려내 요모조모 음미하며 스스로를 달래곤 하는 그 버릇. 그 뻘에 얹힌 배 모습이 그후 자주 떠올랐는데 그것이 내게 무얼 뜻하는 걸까.

언젠가 낯선 도시 캄캄한 밤거리의 한 술집여자가 내게 던진 말
“선생님은 선원증 없는 뱃사람!”
흔한 얘긴데 바로 그 뜻일까? 아니라면?

해남의 자그마한 포구 상공리는 내게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때 짝띠에 배가 닿아 산판이 걸쳐졌을 때 일렁일렁 흔들리는 좁고 긴 산판 위에서 내가 느낀 것은 물 위에 뜬 배에서 땅으로 건너가는 일의 어려움이었다.

물과 땅, 움직이는 것과 딱딱한 것 사이. 고된 시간이 끝나고 편안한 때가 시작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이 가장 어렵다는 것. 그 어려움은 홀로 이겨낼 수밖에 없고 온 힘을 모아 신중하면서도 날렵하게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에 대해 사람은 늘 그래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처음 알았으니까.

버스로 상공리에서 산이면으로 가는 길가 숲속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햇살 춤추는 연록색 잎새들의 엷고 혹은 짙은 온갖 모양의 그늘 흔들림 속에 전에 들은 옛 산속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수런거렸다. 비온 뒤였나. 그리 산뜻했다. 산이면까지 어찌 갔나, 꿈꾸듯 갔다. 노래하듯 물 흐르듯 갔다. 그리고 그 길을, 그 짧은 시간을 내내 나는 잊지 못한다.

산이면 신작로 가 큰이모할머니네 집 뒷솔숲 언덕 위에 서 있던 늙은 솔 한 그루, 지금도 거기 그대로 그 어른 살아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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