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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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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

괴상한 일인데, 기억이나 환상이나 꿈 속에 빈 집이거나 빈 방이 자주 나타난다. 물론 그건 상징이겠지만 혹시 어릴 적에 본 집들과 관계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두 갈래로 작은 강물이 갈라지는 둔덕에 용마루가 뾰족하게 높이 솟은 남방계같은 이상한 빈 초가집, 토방에 식칼이 놓인 텅 빈 초가집, 마루가 높은 세 칸짜리 그 을씨년스런 빈 초가집, 천장이 낮고 부처의 나무 부조(浮彫)를 새긴 나직한 불단으로 둘러진 불그스름한 둥글고 작은 빈 방, 흰 신작로 가에 우뚝 선 커다란 초가집 속의 검은 동굴같은 방.

그런데 이 모든 집이나 방들이 혹시 그 무렵 내가 성철이 아버지 빠가빠가 영감네 가게 길 건너편에 있던 한 빈 집의 유리창 많이 달린 푸른 방속에 혼자 오도마니 앉아 있던 때의 그 고즈넉하고 기괴한 느낌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대체 나는 그때 왜 그 괴상한 푸른 방에 그토록 오랜 시간 혼자 앉아 있었을까? 그 집 그 방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 방 벽에 참혹한 어떤 젊은 여자의 웃음이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붉은 종이학 하나. 환상일까?

***홍수**

그 무렵 어느 날 밤의 꿈.
컴컴한 한밤중, 왕자회사 옆 원둑을 넘어 수없이 많은 불을 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푸른 기선이 하늘로 치솟는 흰 물보라 해일과 함께 뻘바탕으로 연동으로 마구 밀려 들어오는 장대한 꿈. 어른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클라고 그란다. 클라고 그래!”

허나 얼마 안 있어 원둑이 터져버리고 연동이 물바다가 되었다. 모두들 산정국민학교와 목포상업학교로 피난들을 했는데, 아아, 아아 참 신나는 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제 정신이 싹 나가 천방지축 허둥거리고, 집이 둥둥 떠다니고, 세간이며 문짝이며 온갖 잡동사니가 다 떠서 돌아다니고, 돼지 닭 오리새끼들이 사방에 붕붕 떠 꽥꽥 소리지르고, 시커먼 구렁이들이 작대기에 둘둘 말려 여기 저기서 꿈틀꿈틀 떠밀려 다니고 그랬다. 여러 조무래기들과 함께 몹시 흥분해서 소리소리 지르며 나는 방문짝 위에 올라타고 기인 막대기로 온종일을 미친 듯이 노젓고 다녔다.

왜 그리 즐거워했을까? 수많은 이재민이 나고 우리집도 큰 집도 다 침수되었는데 왜 소갈머리 없이 뭐가 좋다고 히히거리며 그리 지랄하고 다녔을까?

예로부터 전쟁이나 천재지변은 불행한 사람과 어린이에겐 해방이요, 지복인 법이다. 헌데 결국은 저희도 똑같은 재앙 속에서 고통받거나 굶주리거나 죽어갈 것이 분명한데도 그리 미쳐 환장해서 좋아라 날뛰는 것은 도무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마음이며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다만 삶이란 건 몹시도 불가사의하다는 것. 요즈음 숱한 젊은이들이나 지식인들이 큰소리 쾅쾅치며 줄줄 쏟아내는 그 반짝반짝한 언필칭 과학. 그 놈의 얄팍한 과학적 이론 따위 가지고는 땅디딤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 특히 전쟁이나 재난 속에서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그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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