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을 아는가? 반딧불이 짙푸른 밤하늘에 환한 점점점 불점을 찍으며 그 꿈같은 빛의 포물선의 다리, 다리를 만들며 소리없이 천천히 나는 것을 보았는가? 늘 보아도 그것은 놀랍고 기이하다. 두 마리 세 마리 여러 마리가 이곳저곳에서 한밤의 검은 고요를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빛의 다리로 겹겹이 수놓을 때 세계는 내게 쌍무지개보다 더 심오한 아름다움이었고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가슴에 서언히 들어오는 깊은 우주의 숨소리 같은 것으로 가득차곤 했다.
소리 없는 소리, 차갑고 따스한 빛, 나는 반딧불을 잡을 땐 나도 모르게 그윽하고 조용해지곤 하던 것이 기억난다. 아주 조심스런 손길로 몇 마리를 잡아 노오란 호박꽃 속에 살며시 넣고는 흰 실로 꿰매 등을 만들어 머리맡에 놔두고 그 은은한 빛을 한없이 들여다보며 눈뜬 채로 꿈을 꾸곤 했다. 그 빛의 느낌을 말로 어찌 표현할 것인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함부로 다칠 수도 없는 섬세한 보배! 마치 머언 외계에서 온 듯한 빛의 느낌. 아아, 그 반딧불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는가?
명절이면 동네 누이들이 입고 나서는 초록이며 분홍이며 쪽빛이나 색동 치마저고리 빛깔의 느낌이 지금의 그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민화에서 보듯 그것은 한마디로 꿈결이었다. 하기야 꽃이파리 풀 나무진 따위에서 뽑아낸 자연염료였을 테니까. 원앙새를 수놓는 수실도, 이불보의 무늬며 바탕 빛깔조차도 지금과는 생판 달랐다.
나는 이 꿈결같은 빛, 이 옛 빛깔들 속에서 늘 포근함을 느꼈고 내 안주할 곳을 찾았다. 거기엔 이 고통스러운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었던 것 같다. 서먹서먹함도, 낯설음도, 슬픔도, 공포도 없었고 가슴아픈 헤어짐도, 한없는 기다림도 없었다. 꽃 새 벌레 작은 물고기 같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그 빛 무늬들 속에 영영 떠나지 않고 거기 파묻혀 살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런 느낌을 주는 빛깔이나 무늬에는 나도 모르게 집착하는 버릇이 있는데, 훗날 내가 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바로 공포심리와 도피기제에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생각하듯 나의 유년이 그렇게 투명하고 지복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 어느 만큼은 몹시 어둡고 괴로운 것이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참 쓸쓸한 순간이었다.
하나비.
그땐 그렇게 불렀다. 불꽃 노리개. 눅눅한 꽁지에 불을 달면 팍-하고 터지면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 불꽃, 찬란하고 덧없는 불꽃. 그 때뿐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때 불꽃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순간이나마 화사하게 작렬하다 사라지는 불꽃. 눈부셔 바라보며 넋을 잃곤 했다. 나의 오랜 버릇이었던 찰나주의가 혹시 이 하나비 동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애가 뭘 그 나이에?”
그럴 것이다. 글쎄, 그런 뜻이라면 난 그저 웃을 뿐, 더는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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