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서양음악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포스터라고 대답하면 흔히들 웃는다. “의외로 감상적(感傷的)이네요!” 그러고 나선 미안한지 또 실실 웃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 넋이 침침해질 땐 가끔 떠오르는 포스터의 노래 한 가지, 그리고 잇따라 떠오르는 영상들이 있다.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나지만 이 노래만은 결코 한 번도 입으로 불러 본 적이 없다. 마음에 흐르는 가락을 따라 떠오르는 영상들이 왠지 내게 너무 무거운 듯해서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 번 떠나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마음속에 사무쳐
자나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 다시 갈까
아아 내 고향 그리워라’
못생긴 계집애, 칠칠치 못하고 늘 옷을 아무렇게나 꿰어입고 다니던 한반의 커다란 대갈장군 계집애. 그날 어둑어둑한 둔덕 너머 한 뼘 남은 마지막 햇발에 미미하게 번득이며 짙누우런 보리 물결이 흔들리고 있었다.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이 그 반대쪽 끝에서 천천히 뒤덮여 오고 있었다. 학교 맞은 편 정미소 넓은 뒤뜰에서 벌어진 동네 학예회. 대갈장군이 부른 그 포스터의 노래. 또 다른 날 노을 무렵 다른 둔덕 위의 조금 더 선명한 짙누런 보리물결. 저만큼 떨어져 가던 구시나무집 성일이 친구. 곧이어 떠오르는 어둑어둑한 저녁 마당가 대갈장군 계집애의 가마니 덮인 시체. 뒹구는 방문짝. 새빨갛게 아가리벌린 노을. 방 속의 시커먼 짐승같은 신음소리. 고향?
주교당이 있는 화창한 날 솔개산 잔등이다. 내 짝꿍일 것이다. 검은 머리가 눈썹 위에까지 덮인 눈도 얼굴도 자그마하고 하아얗고 주근깨가 있는 조용한 계집아이. 공부만 하던 그 계집아이. 순천이 본집이라는 그애 어머니. 우리 어머니, 그리고 나. 거기 왜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자모회 모임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딜 가는 길이었을까? 그 모녀도 함께 죽었다.
여순반란!
한반에 건우라는 애가 있었는데, 서울아이였는데 희멀건 게 똑 비락이니 남양분유통에 나오는 우량아. 그애를 둘러싸고 늘 아주 심각한 논쟁이 불붙곤 했다.
“남대문 문턱이 있냐. 없냐?”
“있다” “없다” “있당께!” “없당께!”
“니가 봤냐?”
“봤다”
“으디서 봤냐?”
“책에서 봤다” “울 아부지가” “우리 삼춘이”
“우리 고모부와 친한 사람이….”
심판은 늘 건우가 내린다.
“없어, 얘!”
잠시 조용하다 또 불이 붙는다.
“이승만 박사가 방구 꾸냐, 안 꾸냐?”
“꾼다” “안꾼다” “꾼당께” “안꾼당께”
“니가 냄새 맡아 봤냐?”
내가 늦게 입학하여 반장이 되기 직전이었나 보다. 그때 한 명만 뽑는 월반 시험이 있었다. 뒷벽에 붙은 긴 한글문장을 소리내 읽는 것인데 서운하게도 내가 한 자 놓쳤다. 다 읽어서 합격, 즉석에서 책가방을 들고 월반한 친구가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소설가 박화성 선생의 막내아들이요, 역시 소설가인 천승세 선배의 동생인 천승걸 씨다. 그때 내가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뭐 늦게 들어간 판에 그만하면 만족했을 법한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아아, 내게도 역시 시샘이 있었다는 걸 이제 깨닫는다. 깨닫고 나니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짜 소리 듣는 주제에 공부시샘마저 없었더라면 그 험한 세파를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
얼짜! 울냄이, 밥미련, 징게멩게, 산신령, 늘낙지, 멍충이, 순둥이, 부에까심.
내 별명을 주욱 더듬다보니 문득 뚜렷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하나 있다. 그 무렵 제일 친했었지.
고용기.
중국 아이다. 아버지가 중국, 어머니는 한국.
부리부리한 두 눈, 커다란 키, 억센 주먹, 든든한 뱃심, 허나 무엇보다 그 어린 나이에도 늘 내게 보여준 깊은 의리와 정의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얼짜같은 나의 용감한 수호자였다.
어느 날 나는 무언가를 빌려주지 않는다 해서 큰 놈들 둘에게 얻어터지고 걷어차이고 있었다. 발에 차여 땅바닥에 너부러질 때의 그 이상한 느낌이라니! 아랫배가 순간 텅 비며 사지에서 맥이 쭉 빠지고 눈앞이 온통 샛노오래지는 그 슬픈 절망감! 눈은 퉁퉁 부어오르고 코피는 터져 줄줄 흐르고. 나는 훗날에도 거듭거듭 이 절망감을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 아예 살기가 싫었다.
중학교 때던가, 내 생애에 단 한 번이다. 다시는 병신취급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맞선 적이 있었다. 허나 결과는 더 참혹했다. 발이야 주먹이야 비오듯 쏟아지는 판에 아예 처음부터 눈을 질끈 감고 그것도 고개를 뒤로 훽 돌리고 제딴엔 그래도 싸운답시고 허공에 이리저리 맥없는 팔만 휘휘 내젓다가는 그냥 쾅-.
별이 번쩍하며 앞이 샛노오래지며 배가 텅 비어 짜릿한 슬픔에, 또 그놈의 절망감에 휩싸이며 땅에 널부러져 버린 것이다. 꼬락서니라니! 나는 그때 싸운답시고 허우적거리던 그 우스꽝스런 내 모습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뒤로부턴 그냥 송장처럼 매질에 몸을 내맡겨 버리곤 했다.
용기가 그때 후다닥 뛰어들었지. 이놈 치고 저놈 치고 좌충우돌.
“나쁜 새끼들! 순한 애기를!”
연방 소리소리 지르며 막 두들겨 댔다.
그런데 참 웃지도 못할 것은 그때 비실비실 털고 일어난 나의 태도다.
눈은 퉁퉁, 코는 째지고 흙범벅 피범벅이 된 주제에 왈
“싸우지마야아! 싸우지말어야아아! 싸우면 못써야아아아…”
뭔 공자능신이 붙었던가? 질질 울면서까지 끝끝내 싸움을 말렸으니!
돌아오는 길에 용기가 그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이고 숨을 씩씩거리며 내게 하던 말이 생각난다.
“영일이 니는 머저리다!”
조금 있다가
“영일이 니는 천치다, 바보다, 병신이다!”
조금 있다가
“임마, 그랄 때는 대가리가 깨져부러도 막 뎀벼부러야 돼!”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니는 참 묘한 놈이다.”
수돗거리 뒤편에 있는 용기네집 방 아랫목 큰 쌀뒤주는 우리 둘만의 비밀의 과자점이었다. 궁해서였겠지만 생쌀이 어찌 그리도 맛있었는지! 한 번은 한참 신나게 훔쳐먹다 용기 어머니에게 그만 들켜버렸다. 지금이야 쌀을 알기를 뭣만도 못하게 알지만 그땐 쌀을 한울처럼 귀하게 여겼다. 좀체 성을 내지 않는 분인데 참 모질게 닦달했다. 한데 울지도 않고 꼼짝도 안하고 아예 내 이름 따위는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용기는 끝끝내 꿇어앉아 그 매를 다 맞으며
“잘못했소. 인자 안 그랄라우”
어른이었다. 멀리서 이걸 보며 내 마음, 내 얼굴은 그때 어찌 됐을까?
나는 중국인을 존경한다. 중국인을 보면 꼭 용기가 생각나고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따뜻한 우정과 존경심이 우러나곤 한다.
23년 만에 다시 만났다. 흰 모자와 흰 행주치마를 벗으며 주방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그의 여전히 부리부리한 두 눈, 후리후리한 키, 씨익 웃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세월은 없었다. 그 독한 배갈을 도무지 얼머나 마셨던지!
“영일이. 난 자네를 존경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천지가 변해도 인(仁)과 의(義)는 도리의 근본 아닌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나의 글, 나의 행적을 다 읽고 있었고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로 그의 우정의 깊음과 넓음에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눈물 터질 듯한 뜨거운 마음 위에 끝없이 독한 술만 퍼붓고 있었다.
그는 얼마 후 카나다로 이민해 떠났다. 박정희의 중국인 박해를 못 견디고 떠난 것이다. 부끄럽다. 박정희의 서푼짜리 민족주의 때문에 나는 존경하는 친구를 멀리 떠나보내야 했고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위대한 중국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그런 그가 작년에 친척 만나러 귀국한 길에 내게 들렀다. 여전한 모습이었으나 얼굴엔 왠지 알 수 없는 온화한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영일이, 나 하느님 믿네.”
그리고 또 한마디, “나라꼴이 꼭 정신병원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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