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여선생님
이름마저 잊었다. 일학년 때 담임선생님. 그 나이쩍 여선생님이 누구에겐 그렇지 않으랴만 내게 있어 유독 그분은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 곱고 따뜻하고 눈부신 분이다.
기인 그림자가 우선 생각난다. 내 그림자, 어느 일요일 아침 산정국민학교 운동장, 학교 바로 옆 외가에서 매를 맞고 쫓겨나 울며 거기 서 있었다. 화단에 이슬 머금은 무궁화가 만발했었으니 여름이었나 보다. 아침 해를 등에 진 나의 그림자가 운동장 복판에까지 길게 뻗은 걸 머얼건히 바라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김영일!”
내 그림자 속에 선생님 예쁜 신발이 들어와 멈췄다. 쳐다보는 내 얼굴을 왜 우느냐 묻지도 않고 묵묵히 흰 손수건으로 닦아주고는 손을 붙잡고 교무실로 데려갔다. 과자와 크레용, 도화지를 앞에 놓으며
“과자 먹으면서 뭐든지 맘대로 그려봐”
나는 그때 푸른 물 위에 떠가는 흰 돛단배를 그렸다. 바로 그 자그마한 그림이 전라남도 전국민학생 미술전에 입선했고 그 자그마한 그림 한 폭이 내 평생을 일관한 그림에 대한 그 좌절된 목마른 그리움을 불질러 놓았다. 그 그리움 안에 바로 선생님에 대한 나의 뽀오얀 보랏빛 그리움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이제 깨닫는다.
그 무렵 선생님은 터진목 너머 미창 건너편에 있는 학교관사, 일본식 목조가옥에서 혼자 사셨다. 순천이 집이었고 미혼이었으므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김영일, 학교 파하면 선생님집에 와!”
차마 갈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매번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고 혼이 난 뒤에 소 도살창 가듯 억지 용기로 집 앞에까지 가 한참을 비실대는데 창문을 열어제치고 내다보는 선생님, 그 소리없는 환한 웃음에 끄벅끄벅 끌려들어간 것이 딱 한 번.
흰 옷차림의 선녀같이 앉은 모습. 차분하게 정돈된 방안. 차곡차곡 쌓인 책들. 화병의 꽃향기. 창문의 흰 커튼. 나는 지금도 이런 분위기에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안절부절. 왜 그럴까? 태생이 본디 시커먼 뻘짱뚱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고개를 가슴에 쑤셔박고 쥐구멍만 찾는데 가슴이 괜히 뛰고 머리가 어질어질 손바닥에 빠작빠작 땀이 솟았다. 나를 가만히 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영일이는 바보!”
그날 내가 어떻게 터진목과 후미끼리, 그 건널목을 넘어 뻘바탕으로 돌아왔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 선생님은 기관사였던 두 공산주의자 오빠와 연루되어 여순반란 진압 때 순천에서 총살당했다. 그 소문을 듣던 날 나는 무얼 했을까?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뒷산에 올라가 메뚜기를 잡고 있었을까? 아니면 땅바닥에 돌팍으로 군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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