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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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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

21. 검은 함석집

그러나 일곱 살 무렵의 그 궁상만이 나의 유년의 다는 아니다. 그보다 조금 전 다섯 살 때던가, 여섯 살 때던가.

나는 수돗거리에서 산정리 쪽으로 한두 굽이 돌아들어간 후미진 산어덩밑 구시나무집, 정일담씨 조카되는 내 친구 정성일이네집 길 건너 논가에 움푹 박힌 검은 함석집에서 살았다.

여름철이었나 보다.
밤이면 천지가 떠나가게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를 ‘과악곽 과악곽’ 입으로 내내 흉내내다 잠이 들었고 낮이면 마당이나 논두렁에 기어다니는 두꺼비 흉내, 내 두꺼비 흉내는 유명했는데 이렇다. 네 발을 쩌억 벌리고 엉금엉금 몇 발짝 기어가다 뚝 멈춰 하늘을 쳐다보며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는 불룩 불룩 불룩, 또 엉금엉금 기어가다 뚝 멈춰 불룩 불룩 불룩. 아마도 잠자리 흉내, 참새 어깨 웅크린 흉내, 빗속에 날개터는 흉내, 아장아장 걷는 오리며 고개숙인 해바라기 따위 눈에 보이는 산 것은 모두 다 흉내내며 놀았나 싶다. 외진 데라 친구가 없었다.

구시나무집 친구 성일이는 워낙 점잖아서 꼼짝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가뭄에 콩나기로 함께 놀 때가 있었는데, 그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유난히도 뜨거운 날이었던가 보다. 머리가 얼얼했다. 친구와 놀 일이 기뻐 호주머니에 한 웅큼 마른 멸치를 집어넣고 나의 큰 자랑거리이던 등산그림책을 들고 구시나무집으로 내달리는 내 발 밑에 폭폭 일어나던 하얀 먼지가 그림처럼 떠오른다.

멸치를 나눠먹으며 구시나무 열매를 흰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던 것 같다. 푸르고 싱싱한 구슬빛, 꿰어진 구멍에서 배어나오는 풋풋한 진냄새가 아직껏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 우리는 뒷산에까지 올라갔다. 난생 처음 오르는 산. 산 위의 그 건조하고 상쾌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산위에서 우리는 그림책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등산모 등산화에 등에는 배낭, 손에는 피켈을 들고 흰 구름 위 푸른 하늘 위로까지 높이 솟은 산봉우리 위에 앉아 쉬는 모습이 거기서 보니까 더 신기했다.

나는 지금도 산악인들을 대하면 조금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곤 하는데 아마도 어려서부터 산에 대한 무언가 깊고 신비한 관념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일 게다.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난 등산엔 별 취미가 없다. 산은 나같은 뻘짱뚱이 땅강아지에겐 그저 높고 아득한 안개 저편의 산신령의 전설 같은 세계였고 지금도 거기 그대로 두고 싶은 두렵고 거룩한 곳이기만하다. 한두 차례 산에서 술에 만취한 끝에 불경한 짓을 하긴 했지만.

뒷산 위에서 그날 나는 처음으로 넓은 세계를 보았다. 내가 사는 동네와 연동, 가깝고 먼 여러 동네들, 원둑, 왕자회사, 영산강, 비녀산과 주교당이 있는 솔개산, 유달산 그리고 멀리 뒷개 앞바다와 희미한 용당리를 보았다. 허나 그때 그 넓은 세계에 대한 무슨 가슴뛰는 동경같은 건 별로 없었고 다만 내가 사는 곳을 내가 멀찍이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그것이 신기했던 것 같다. 흔히들 묻는다.

“해외는 어디를 다녀 오셨습니까?”
“예, 제주도요”

대개 놀라곤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난 타고난 땅두더지인가 보다. 낯선 새 세계나 여행자의 모험, 기이한 영웅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필시 나의 일부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본바탕은 땅두더지. 작고 편안하고 익숙한 곳이 좋다. 내 평생의 꿈, 그것은 붙박이다.

최근 홍콩, 미국, 그리고 일본에 세 차례 다녀왔는데 이 곳 공항에 내릴 때마다 느끼는 깊은 안도감은 내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땅두더지임을 확인케한다. 나는 그럼 유목민이 될 수 없는가? 그러나 내면의 붙박이에 외면의 떠돌이? 그런걸까? 그러나 내 유년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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