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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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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

수돗거리

“어른들은 잠도 안자나”
늘 궁금했던 일이다. 꿈결에도 꼭두새벽이면 늘 불을 켜고 일어나 부스럭 부스럭 두런두런 말소리 발소리를 죽여가며 가만가만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가는 소리. 덜컹 덜커덩 물통소리. 삐이익-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 물전에 물받으러 가는 것이다.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으레 그런 것이지만 매일 밤 깨어 일어나 두새거렸으니 궁금할 수밖에.

허나 난 그게 왠지 좋았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도 어른들이 깨어있고 화안히 불이 켜져 있어서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왜 그리 내게는 포근한 안도감을 주던지.

가난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매일매일 비상체제다. 허나 목포사람들, 그 중에도 연동 뻘바탕 사람들은 24시간이 비상체제. 캄캄 밤중부터 수돗거리 물전에 물통을 갖다놓고 차례를 기다려야 하니까.

때로는 나도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뽀오얀 신새벽 한도 끝도 없이 줄지어 늘어선 물통들의 장사진 곁에 붙어서서 우리 물통을 지키곤 했다. 일본말인 모양인데 ‘인치키’라고 했다. 새치기가 심했다.

새치기하다 흔히 쌈박질이 벌어지곤 했다. 연동사람들 정 좋은 건 유명하지만 물싸움 한번 붙으면 인정사정 없다.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그 지독한 욕설과 함께 빈 물통을 앞세우고 들입다 서로 돌진하면 쾅-쾅-똑 ‘고’하는 판에 양쪽 새끼트레가 들러붙어 공중으로 용트림해 오르듯 물통들이 우당탕탕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서로 궁한 판에 밥까지 나눠먹는 친한 처지에도 이랬으니 물이 밥보다 더 귀한 생명의 보배란 것을 나는 일찌감치 사무치게 깨달은 셈이다.

목포는 물에 한(恨)이 진 곳이다. 얼마나 귀했으면 웬만한 배앓이 따위는 물 한 대접으로도 능히 가라앉히는 것으로 흔히 믿고들 있었고 이에 좋다면 물로만 이를 닦는 사람, 눈이나 귀아픈 데도 그냥 물만 바르는 사람까지 있었겠나. 나도 여러 번 그랬다. 그것이 벌써 40여 년 전.

헌데 요즈음 목포에선 그 비싼 수돗물마저 먹을 수 없게 되어 근처에는 별로 흔치도 않은 먼 곳 샘물이나 우물물을 뜨러 가느라 매일매일 비상체제요, 생수네 지하수네 정수기네하고 북새통이니 이게 뭘 뜻하나? 어디 목포만인가? 자고로 물 좋다는 우리나라 4대강이 몽땅 썩어 3급수 이하, 전국민에게 물비상이 걸렸으니 이게 뭘 뜻하나?

정치의 목적은 생명의 보위에 있다. 그래서 예부터 정치의 근본은 치산치수(治山治水)다. 이리 회상하다보니 새삼 깨닫는 것은 지난 40여 년 동안 이 나라엔 아예 근본정치라는 건 없었다는 것. 그럼 뭐가 있었나? 원천치정!

“엄마 십 원”
“헹-엄마 십 원만 줘”
“십 워언”
어머니가 삐걱삐걱 물지게를 지고 한참을 간다. 바짝 뒤쫓아가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느려터진 소리로
“엄마 십 워언”

쾅!
물통이 땅에 떨어지고 물이 사방으로 튀며 어머니가 확 돌쳐선다.
“저놈의 새끼가 밤낮 십 원 십 원 십 원! 내가 십 원이 어딧냐아아아!”

후다닥 튀어 달아나 저만큼 멀리 떨어져 서서 말똥말똥 건너다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다시 물지게를 지고 삐걱삐걱 한참을 간다. 어느새 바짝 뒤따라 붙어 또다시
“엄마 십 원”
“헹-엄마 십 원만 줘”
“십 워언”

쾅!
“저놈의 새끼가!”
후다닥

지치지도 물리지도 않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십 원 쟁취 투쟁이었다. 나는 그 무렵 수돗거리에서도 아주 이름이 난, 그쪽 말로 ‘부에까심’이었다. 그때 이미 게릴라전의 명수였던가 보다. 히트 앤드 런 앤드 히트, 끈질긴 지구전!

얼마 전 어느 후배 여교수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너무 끈질겨요. 삼빡한 데가 너무 없어요. 무서워요.”
“무섭다? 무섭다.”

그래, 사실은 나도 내가 징그러울 때가 있다. 똑 잡초.
허나 잡초 아니라 잡초 할아비래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돈 나올 때가 있나. 가난했으니까. 해방이 되어 일본배가 드나들지 않는 목포는 신파쪼 대사 그대로 불꺼진 항구여서 아버지 벌이가 영 시원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투쟁하느라, 조직하느라 집에도 안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혹은 피신하느라 멀리 떠나있을 때가 많아 우리 모자는 늘 가난했으니 어떡하나. 나의 그 영용한 게릴라전도 기껏 욕이야 회초리야 부지깽이야 장작개비야 고무신짝이야 닥치는대로 우지끈 뚝딱 매밖에는 버는 게 없었다.

허나 질긴 그악만이었을까?
언젠가 어머니에게 쫓겨 뒷산 목화밭으로 달아난 적이 있었다. 쫓다 쫓다 지쳐 헉헉거리는 어머니가 민망하여 멀리 못가고 주변을 뱅뱅 도는데 어머니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화가 나셨던가 보다. 얼굴이 노오랗게 질리는 어머니에게 팔을 내주며 주춤주춤 다가가며 여깄소, 손 여깄소, 잡으쇼, 잡어라우.

십 원 쟁취 투쟁이 실패하면 꼭 내가 가는 곳이 있었다. 수돗거리 물전 가까이 이모네 구멍가게. 말 그대로 형편없이 쬐그만 구멍가게였는데 그냥 이모라고 친밀히 부르긴 했지만 사실은 사돈네 팔촌도 안되었다. 미안하고 계면쩍어 쭈볏쭈볏하면서도 그놈의 달디단 사탕맛이 자꾸 끌어당기니 별 수 있나. 일부러 코를 안풀고 지일질 기일게 내려뜨려 갖고선 가게 근처를 공연히 뱅뱅 돌고 있으면 눈이 노오란 이모가 나를 한참 노려보고 있다가

“코 풀어라”
하고는 사탕 몇 알을 쥐어 주곤 했다. 멋쩍고 창피한 마음을 달디단 사탕 맛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훗날 낙백시절에 술기갈이 나서 공연히 명동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물주 나타나길 학수고대, 속으로는 늘 혀를 끌끌 차

“허! 내가 똑 이용악이 꼴이 돼가는구나”

허나 사실은 이용악이 꼴이 아니라 유년에 이미 마련된 팔자!
아마 그게 미운 일곱 살, 그 무렵 아니면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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