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해방되던 날의 기억이 없다.
1945년 8월 15일.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항상 중요한 역사의 날, 충만과 절정의 날엔 그 현장에서 멀리 있다. 1960년 4월 이승만 하야의 날. 거리를 가득 메우고 만세를 불렀던 민중의 그날, 나는 성북동 골짜기 자취방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980년 3월 1일. 이른바 서울의 봄엔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 있었고 1987년 6월 29일에는 해남 남동집 귀퉁이 방에서 중병을 앓고 있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불운으로만 굴러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행운으로만 굴러나가는 사람이 있지요. 기회라는 건 매우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김 선생은 어느 쪽이십니까?”
민족 해방의 날.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칙간에서 똥싸고 있었을까? 그 좋아하는 밥을 우겨넣고 있었을까? 산이었나, 바다였나? 벌레와 함께 혹은 새와 함께 놀았을까? 풀잎하고 꽃잎한테 그때도 ‘안녕, 안녕!’하고 바보 같은 인사만 하고 있었을까?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해방!’ 그러면 내겐 만세의 영상이나 감격의 기억은 없다. 다만 그 뒤 낡은 트럭을 타고, 마차들을 타고 시내 쪽으로 줄지어 들어가던 연동 아저씨들, 그 숱한 가난뱅이들 머리에 질끈 동인 흰 띠, 플래카드, 격렬한 좌익 노래와 왜가리 소리 같은 거친 구호들, 그런 것뿐이다.
그리고 밤엔 골목에 조무래기들을 잔뜩 모아다 줄지어 앉혀놓고 밤낮 처녀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동네 청년들이 언제 모두 그리 애국자가 되었는지 눈엔 횃불, 목엔 힘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몇 번이고 몇 차례고 죽어라 복창시키던 그놈의 노래.
산너머 바다건너 태평양너머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이런 거.
또 공수 형님인가, 판수 형님인가. 키 작달막하고 등 잔뜩 굽고 리젠트 머리에 포마드가 번쩍번쩍, 단벌 흰 와이셔츠 바람에 웬 책 한 권은 노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웩웩하고 된목에 쇳소리로 맨날 입만 벌리면 그저 똑같은 소리, 하잘 것 없는 동네 아이들 말싸움에 공연히 끼어들어 책을 공중에 냅다 흔들어대며
“민주주의가 말이여, 헌법이 있는디 말이여, 엄연한 삼권분립인디,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갖다가 선거란 것이 있는디, 느그들이 머슬 으째야?”
그래 조무래기들이 그 형님만 보면
“쩌그 헌법 간다야”
“저그 민주주의 온다야”
뭐 이런 거,
이런 것만 그저 생각난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해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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