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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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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

14. 사쿠라마치

사쿠라마치. 목포대 근처 일본인들 거주지역.

단층 목조건물들이 반듯반 듯 줄지어 있는 큰 신작로. 여름날이었나보다. 햇볕이 쨍쨍한 대낮 텅 빈 신작로. 목조가옥들의 검은 콜타르빛. 우리집 바로 앞 태선이 형네 과자점 진열대, 줄지어 있는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항아리들 안에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자줏빛 흰빛 검은빛 갈매빛 온갖 무늬, 갖은 이상한 모양의 반짝 반짝 빛이 나는 사탕과 과자들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꿈결처럼 화사하고 황홀한 세계! 항아리들 앞에 들러붙어 취한 듯 한없이 들여다보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 소녀, 태선이 형 누이동생, 나보다 두 살인가 위일 텐데 햇빛 속에 약간 찡그리고 있는, 뼛속까지 보일 듯 마알갛고 새하얀 파리한 얼굴, 여린 몸매, 간타노쿠, 그 원피스의 눈부신 흰빛. 내 눈 속에 깊이 새겨져있는 어머니나 친척들 이외 여자의 첫 영상이다.

그 무렵일 텐데 목포대 바위 다른 쪽 혼마치에 있는 큰 고모네 과일가게 앞, 희뿌연 날 물뿌린 한적한 거리, 길 건너편 동아부인상회 앞에 장미며 카네이션이며 백합같이 싱싱한 꽃묶음들이 나란히 놓여있고 아버지가 저만큼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가는 걸 쳐다보면서 길고 네모난 알루미늄 통에서 소금 깨 고춧가루와 후추를 뿌린 조그만 김조각들을 꺼내먹던게 생각난다.

뿌우연 한적함, 꽃빛, 김맛, 천천히 멀어져가는 침침한 아버지 모습. 이 영상은 늘,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나는 그 한때 호사했던가 보다.

누우렇게 빛바랜 그 시절 내 사진들을 보면 지금도 얼른 납득이 되질 않는 것이, 그때가 어느 땐가, 그 참혹하고 궁핍하던 시절에 조그만 아이가 값진 털외투에 멋쟁이 베레모에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가죽구두라니! 거기에 흰 목마까지 타고 있으니!

아버지는 그때 돈을 많이 버셨다 한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대판 금궁직공학교(金宮職工學校)에서 3년간 고학으로 전기 기계 기술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이십 전에 이미 목포에서는 최고 기술자로 인정받았다 한다. 귀국 직후 일본인 노구치란 자와 동업, 큰 전파상을 열었는데 라디오 전축 앰프 따위가 무슨 영물(靈物)이나 신기(神器) 모냥 사람을 매혹하던 때다.

더욱이 목포는 군산과 함께 쌀이나 목화 등을 집산, 일본에 반출하던 항구로 한참 흥청대던 때다. 대형화물선이 줄지어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 배란 것들이 일본에서 영국 등으로부터 헐값으로 사들인 고물 배라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기관이나 스크루를 몽땅 수선해야만 되었고 그것을 맡아 할 사람이 목포에서는 아버지밖에 없었다 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때다.

“돈을 가마니로 긁어 들였지”
물론 과장이겠지. 하여튼 그래서 그 때 아버지는 목포 일류 멋쟁이로 등장, 밤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카페란 카페, 요릿집이란 요릿집은 모조리 휩쓸고 낮에는 보트놀이 카메라 취미에 교향악 감상 그림 감상 소인극(素人劇) 독창회 음악회 무용발표회 조명이며 마이크 앰프 모조리 무료로 다 맡아 해주고 식물이며 화훼며 곤충채집 음반수집에다 온갖 장비 다 갖추고 지리산 한라산 구월산 묘향산에 금강산 백두산 일본 알프스까지 안간데 없이두루 등반.

한 번은 네로 흉내를 내본다고 카페 뒷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 귀한 아사히 맥주를 큰 나무통째로 수십 통씩이나 한꺼번에 갖다놓고서 들입다 호스로 빨아마시며 천장엔 낚시를 잔뜩 매달아 거기다 구운 생선토막 마른 문어조각 불고기 닭고기 과일 과자 따위를 주루루 꿰어놓고는 고기가 미끼채듯 톡톡 따먹는, 어디 만화에서나 본 것 같은 그런 풍류놀음을 며칠씩 짓이기다 그만 싫증나면 뒷개같은 데 나가 문저리회에 막걸리 한사발 쭈욱 들이켜고 나서 느닷없이 왈 “보리밥엔 역시 고추장이 제격이로구만 잉-” 뭐 이러셨다는 거다.

허무했을까?
아마도 이 허무가 아버지를 그처럼 지독한 공산주의자로 내몰았던 것은 아닐까? 역시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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