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의 출생
나는 1941년 음력으로 2월 4일, 먼 동 트기 전 캄캄한 시간에 전라남도 목포시 연동 뻘바탕 수돗거리 물전 건너 옛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이제껏 나는 나 태어난 곳이 목포대(木浦臺) 바위아래 지금도 남아있는 그 일본식 목조가옥인줄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야 비로소 그곳은 두 살 때 옮겨 산 곳이고 애당초 낳기는 연동 뻘바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째서 외가에서 났을까? 외갓집 바로 곁에 우리 친가가 붙어 있었는데 나 낳기 얼마 전에 나보다 한 살 위 배다른 형이 그 집에서 죽고 이어 닷새 전에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무엇인가 좋지 않다 하여 서둘러 자리를 외가로 옮겼다는 것이다.
나 태어나던 바로 그날, 하늘에 유난히 빛을 내는 샛별이 떠오르고 유달산이 사흘을 내리 울며 영산강 하구에서 기이한 고기가 뛰어오르고 집 주위에 온종일 오색채운(五色彩雲)이 머물며 지붕 위에 은은한 서기(瑞氣)가 틀림없이 어렸을 것 같지만 하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서운하다.
때는 전인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지옥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어두운 때, 이 땅에서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국민총력연맹 조직, 황국신민화운동과 생산보국운동을 강행하던 때, 바로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 발발을 눈앞에 둔 험악한 때다.
내 이름은 김영일(金英一). 본래 영화영(榮)자 항렬인데 누군가 그 글자가 안좋다 하여 소리만 같은 꽃뿌리 영(英)자로 호적에 올렸다 한다.
아주 희미한 기억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 나와 처음 본 것이 불빛과 그림자인 것 같다. 벽과 천장에 일렁거리는 버얼건 호롱불과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컴컴한 사람 그림자들, 역시 희미하지만 두 번째 기억은 눈부신 아침햇살 뒤에 침침하게 응달진 검은 바위그늘, 아마 목포대 그 집 마당인 듯 하다.
그 집에서의 얘기인데 어머니 말로는 내가 본디 여간 조심스러운 아이가 아니어서 그렇게 방안을 함부로 기어 다니면서도 비좁고 높은 토방마루에서 한 번도 땅에 떨어져 본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 내 느낌으로는 아무래도 그 무렵 한 번 까꿀잽이로 땅에 굴러 떨어져 된통 널부러진 적이 있는 것만 같다. 혹시 크게 혼이 난 뒤부터 조심스러워진 게 아닐까?
뚜렷한 기억은 세 살인지 네 살 때다. 어둑어둑한 저녁때 어머니 등에 업혀 큰 길가 어떤 집 처마밑에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서 데스가부토, 그러니까 그때 일본군 철모를 쓰고 아버지가 이쪽으로 또-닥 또-닥 걸어오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무렵이었나 보다. 나는 기억못하는데 집안에선 유명한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그 무렵 한밤중에 사이렌이 울리고 방공연습을 했다 한다. 우리 어머니가 원래 성미가 급한 분이라 나를 일본식으로 바삐 들쳐업는다는 것이 그만 띠를 잘못 둘러 목을 잔뜩 졸라놨던 모양이다. 길가 처마 밑에 서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발을 동동거리며 그리 한참을 있자니까 이윽고 해제 사이렌이 울리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잔뜩 조이고 느리데한 목소리로
“엄마 나 밥 어떻게 먹어?”
이랬다는 것이다. 나 미련하고 곰같은 데를 놀려먹을 때는 꼭 튀어나오는 얘기다. 따라붙는 어른들 말씀,
“밥 못먹게 될께비 그게 걱정이디야? 밥이 그렇게 좋디야? 이 미련한 놈아 목을 그렇게 졸라놓으면 영락없이 죽을 텐디 죽는 건 걱정 안되고 밥 못먹는 것만 걱정되디야? 에에끼 이 미련한 놈아!”
어릴 때 내 별명이 ‘징게멩게들’이다. 징게멩게는 김제만경의 그쪽 사투리, 두 눈 사이가 한참 멀고 펑퍼짐, 콧대까지 푹 꺼진게 영락없이 둔덕 하나없는 김제만경 그 넓으나 넓은 들판같다는 놀림이었다.
요컨대 못났다는 얘긴데 하긴 돌사진을 보면 내 눈에도 똑 찐빵같은 게 참 못났다. 또 ‘산신령’이란 별명도 붙어 있었다. 동굴같은 콧구멍에서부터 입술을 지나 턱있는 데까지 허어연 산신령같은 코가 한참 흘러 내려왔다가 훌쩍 숨을 들이마시면 동굴로 쑥 들어간다고.
‘밥미련’이니 ‘징게멩게’니 ‘산신령’이니 하고 날 놀릴 때면 반드시 뒤따라 나오는 어른들 말씀 또 하나
“느그 형은 참말 잘생겼제”
나 낳기 얼마 전에 죽은 한 살 위 배다른 형. 그렇게 인물이 좋았다 한다. 이목구비 수려하고 훠언하니 달덩이 같았다는데 그만 몹쓸 병을 앓았다한다. 이상한 것은 고통이 지독할 텐데도 그 조그만 사람이 생전 울지도 않고 단 한 번도 신음소리조차 내는 법없이 늘 빙그레 웃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왠지 신령스러웠다는 것이고 발바닥에 큰 대(大)자까지 뚜렷해서 더욱 기이했다는 이야기다.
하나 더 이상한 것은 어머니다.
‘너 같은 건 옆에도 못가. 을마나 좋게 생겼는디!’
도대체 얼마나 좋게 생겼길래 의붓자식을 그렇게도 칭찬할 수 있는 걸까?
수수께끼,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또 하나.
작은 고모의 기억이다. 목포대에서 연동에 옮겨와 살 무렵, 내가 어느날 난데없이 고모더러 뻘바탕 다리뚝 밑에를 가자더란다. 다리뚝 밑 어느 한곳에 여기를 파면 형 장난감이 나온다고 자꾸 우기더란다. 그래 마지못해 파봤더니 과연 혹은 썩기도 하고 혹은 아직 성하기도 한 갓난애 장난감들이 여럿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내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 뒤로부터 나는 어른들 사이에서 ‘이상한 자석’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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