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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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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

11. 아버지

‘아버지 김맹모(金孟摸) 씨는 공산주의자였다’

이 한마디는 나의 60년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 주문 같은 것이다. 미당(未堂)이 ‘아비는 종이었다’라는 한마디에 그 일생이 결정되었듯이 내게 있어서도 이 한마디가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나는 이 한마디를 끝끝내 함구하려고 했었다. 이미 폐지되었다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시퍼렇게 살아있는 연좌제(蓮座制)의 굴레에 빠지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 의식과 삶 속에서는 여전히 폐기되지 않고 또 하나의 연좌제처럼 살아있었다.
살아있었다!

그리하여 4.19 직후 통일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민족통일연맹엔 가입하지 않았던 것, 5.16 뒤 반파쑈운동, 한,일 회담 반대 운동에 헌신적이었을 때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에는 가입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친연성을 가졌음에도 내내 비판적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내 혈통이나 이념 인식이나 타고난 기질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중요하게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그 그늘진 생애가 내 마음에 깊이 드리워진 결과였다.

이 한반도, 특히 남한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실패한 공산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일본에서 기술을 배울 무렵에 공산주의를 접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직전에 동료들과 함께 조선해방 게릴라 운동의 준비단계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헌신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침착하고 냉정한 주요 간부로써 목포시당에서는 알아주는 투사였다고 한다. 여러차례 중선(中鱓)지대로 피신한 경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러차례 중선을 여행한 적이 있다. 모두 아버지를 찾아 떠돈 것이며 때로는 직접적인 감시나 추적을 피해서 떠돈 피신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나의 초등학교 입학이 늦어졌고 또래의 아이들과는 늘 거리가 있는 우울한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철학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해방 전엔 큰 기선의 엔진 수리 등으로 수입이 좋아 한때는 멋쟁이 한량처럼 카페나 드나들고 온갖 장비를 다 갖춘 채 백두산이며 일본 알프스까지 등산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그때는 소수 지식인이나 풍요한 삶을 누리는 지주 자산가 출신 예술가들만이 할 수 있었던 연극, 영화, 사진이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무용 음악 등의 써클에 가담하고 또 실험적인 조명 예술에 정열을 불태우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행동과 철저한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연동, 지금 같으면 목포의 달동네에 해당하는 뻘바탕의 밑바닥 청년들을 밤을 틈타서 비밀리에 교양, 조직하는 힘들고 음산한 일을 철저히 수행했던 것이다.

인민군 점령하에서는 목포시당의 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문불출, 집안에 묻혀 단파라디오로 유엔군의 인천상륙정보까지 들어서 인민군의 패배를 환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상륙작전 때에는 동료들과 함께 영암 월출산(月出山)에 빨치산으로 입산했었다.

그리고 기본계급 출신의 과학기술자로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아들, 즉 내가 거적에 쌓여 수장(水葬) 되었다는 소식에 접해서는 내 주검 옆에 몸을 눕히겠다는 일념으로 하산을 결행한 것, 이 모든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무신론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실 적에 영적인 환상을 무수히 보았던 분이다.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아버지는 평생 나에게 증조부, 조부 등 우리 집안 내력 이외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나를 아들로서 아끼는 잔정이 없으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떤 정다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분명 아버지 김맹모씨, 그 실패한 공산주의자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받는 외아들인 것이다.

이제 남북에 길이 열리고 경의선이 복구된다. 이 대세는 역전이 불가능함을 나는 그 어떤 정보보다도 행동가로서의 나의 짐승같은 본능으로 느낌으로써 이것을 안다. 나는 드디어 아버지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에 관해 말함으로써 삶과 세계에 대해 가림없는 인식과 가림없는 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중요하다.

삶과 세계는 이제 나에게 쓸쓸하고 외로운, 그러나 빛으로 환한,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어주고 있다.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가 대립과 투쟁을 넘어선 평화와 상생과 화해와 큰 창조의 사상 및 논리를 거리낌없이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월출산을 하산할 때, 그리고 그 뒤의 심정을 훗날 다음과 같이 내게 실토하셨다.

‘그것은(공산주의) 틀렸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엔 없어. 아직까지는 그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공산주의)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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