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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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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

10. 외할머니

외가의 자존심과 오만은 유명하다. 그 오만의 정신적 배경이 바로 외할머니인 듯하다. 허나 막상 외할머니 자신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쥐띠고 외할머니는 범띠, 완전한 내주장이었고 집안은 한 마리 커다란 암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듯 상호도 영락없이 호상이었는데 허나 큰 만큼 품도 또한 넓었다. 자식들의 좁쌀오만과는 전혀 다른 태산같은 오만이고 교악같은 자존심이었으며 ‘무서운 어머니’ 유형의 대두목의 천품이었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
해남 상공리 중인출신 큰 물상객주의 둘째 딸.

외할머니의 아버지란 분을 아버지가 한번 뵌 적이 있다 해서 어떠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한마디로 ‘범!’.

그랬다. 그 똑닮은 딸이었으니 삼동네 여편네들 ‘성님’이고 온동네 남정네들 ‘누님’이고 세 절의 ‘대화주(大化主)’요, ‘큰 보살’이요, 째보선창과 뒷개 나무 밀상(密商)들 ‘오야붕’이요, 도무지 몇 갠지 알 수 없는 계의 ‘단골왕초’에다 그 숱한 젊은 해병(海兵)들의 공동의 ‘어머니’였다.

생활이 넉넉한 것은 외할아버지 수입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내림이 장사수완이라 강원도 오징어 축떼기, 중선배 빌려 나무장사, 무안 망운 채소 과일 도리떼기, 계 굴려 돈 불리기.

살림솜씨도 대단해 장독대에 반짝반짝 윤나는 독이 즐비하고 멸치젓 송어젓 깡다리젓 조기젓 갈치젓 뱅어젓 꼴뚜기젓 철철이 다 담그고 명란젓 숭어알젓 토하젓까지 갖추었다. 졸개들 잔뜩 거느리고 꽃철엔 화전놀이에 벚꽃 구경이요, 여름철엔 모래찜, 겨울철엔 온천목욕, 폭포에 가 물맞기, 절에 가서는 불공.

기억난다.
한겨울밤 돋보기 쓰고 손에 침발라 넘기며 가락붙여 읽으시던 장화홍련전 유충렬전 조웅전 소대성전 구운몽 옥루몽 홍루몽에 숙영낭자전. 갈 데 없는 중인이다.

외할머니 그 유식한 옛날 이야기에도 내 문학의 뿌리가 있을 것이다. 허나 모두가 영웅 재사 미녀 열녀요, 충신 간신 악처 악당 흉계 복수 입신출세며 고관대작에 도사며 신선이라 난 별로 재미가 없었다.

청운(靑雲)과 백운(白雲)! 나는 그것과는 인연이 없는 붉은 황토, 푸른 바다, 노오란 비파열매와 검은 뻘과 도깨비와 이슬내리는 새벽녘 땅두더지의 기이한 꿈을 꾸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프고 익살스런 소박한 이야기가 더 좋았다.

대대로 불심이 깊어 절 출입이 잦으셨는데 유달사에 큰 종을 조성하는 대화주였고 그 종에는 내 이름도 새겨져 있다. 외할머니가 나 갓난애기때 하도 울보라 ‘우리 울냄이’라 불렀다 한다. 종을 조성할 때 내 이름을 써넣으며 ‘우리 울냄이 울음을 다 이 종 속에 넣습니다’하셨다 한다.
이모할머니 두 분이 계셨다. 한 분은 음전이요, 한 분은 덜렁이, 외할머니 합쳐 이 세 분이 비록 땅꼬집안 오랜 한(恨) 끝에 느지막에 본 사내 동생이요, 비록 일본까지 유학하고 고문 패스하여 높이된 동생이라지만 도무지 죽는 날까지 목숨바쳐, 비굴하게 벌벌 떨며 온갖 괴팍을 다 무릅쓰고 아비 모시듯 공경한 그 까닭은 무엇일까?

슬프다!
억업 속에 살아온 여인들의 일그러진 마음의 역사여!

6.25전쟁 때 외가 옆 산정국민학교에 인천상륙작전을 끝내고 후방 교체된 해병여단이 들어왔다. 부상자 천지였는데 그 불쌍한 젊은 해병들에게 외할머니는 참으로 큰보살이요 큰어머니였다.

궁핍한 때다. 부식이란 소금국 밖에 없을 때다. 하루에도 몇 양동이씩 그 맛있는 김장김치를 ‘더 가져가라’ ‘더 가져가라’ 마구 퍼주었다. 어머니, 어머니하며 집안을 무시로 드나든 사람만도 이십 명이 넘을 게다. 그 중 아들 삼은 몇 사람은 최근까지도 연락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이북 출신의 병조장인데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외가 한 방에서 부대 이동 때까지 줄곧 외할머니의 따뜻한 간호를 받았다. 그가 떠날 때,

“어머니,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제 마음의 표시로 제 군견(軍犬)을 드리고 갑니다”

큰 셰퍼드였다. 이놈이 애지중지 보살피는 외할머니를 그만 물어버렸다. 그 독으로 깊은 병이 드셨고 그 뒤 얼마 안돼 유달사 법당에서 예불 중에 쓰러져 염주 손에 쥔 채 부처님 좌대 밑에서 자는 듯이 조용히 눈감으셨다.

일설에 측간에서 똥싸시다가 힘을 너무 주는 바람에 그만 돌아가셨다는 풍문도 있으나 나는 분명 법당에서 점잖게 돌아가셨음을 주장하는 바이다.

큰보살이시여,
극락왕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외할머니 없는 외가는 대들보 빠진 집이었다. 돌아가신지 얼마 후에 마당에 커다란 검은 구렁이가 나와 뒹굴었다. 동네 사람들이 끌고가 때려죽였다. 외가는 급속히 몰락했다. 목포에서 뿌리뽑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장미는 시들고 꽃피는 섬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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