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외동아들이다. 혈혈단신 외로운 처지를 어디다 의지할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이 만 리 파도 밖에 홀로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홀연 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다. 전라도 해남 땅 어느 큰 부잣집에 출가한 배다른 누이 한 분이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사자(嗣子)이므로 제기(祭器) 향로 촛대 병풍과 약간의 서책만 배에 싣고 해남으로 향했다. 중도에 풍랑을 만나 파선하여 침수되었으나 가까스로 어찌 어찌 짐과 몸이 구조되어 해남땅에 당도했다 한다. 그때 물에 잠겼던 향로와 병풍 등이 내 어릴 적에 본 그것들인데 향로는 변색하고 병풍은 얼룩덜룩한 것이 과연 그럴싸하고 신기했다.
병풍은 오곡(五曲)으로 청(淸)나라 유명한 화가의 것이라는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큰 글자 안에 그려넣은 대병(大屛)이다. 외가에서는 내내 이것들을 마치 가문의 영예를 나타내는 신기(神器)인 양 몹시 외경(畏敬)했다. 내가 외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사람얼굴이나 사건 대신에 물건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제사 지낼 때 생각이 난다. 주칠한 큰 목기(木器) 수십 개가 한꺼번에 상에 오르고 큰 병풍은 상 뒤에 벌려있고 향로에서는 연신 향연이 피어올라 온 방안에 이상한 냄새가 가득하고 놋촛대의 황촛불은 일렁거리고 제복(祭服)을 입고 꿇어앉은 외할아버지 입에서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제문(祭文)이 한도 끝도 없이 높았다 낮았다 하며 낭랑하게 울려퍼질 적에 구석에 꿇어앉은 나는, 글쎄 본디가 바탕이 상놈이어서 그랬는지 끝없이 낯설기만 하고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꼬꾸라져 잠이 들어선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목기(木器)의 주칠같이 시뻘건 대문들이 수없이 많이 달린 웬 으리으리한 궁궐에 병풍에서 본 퍼런 호복(胡服)을 입은 사람들이 끝없이 우왕좌왕, 시퍼런 층층 기와지붕, 오색채운 휘감은 붉은 난간, 띵똥땡똥 온갖 악기소리 들리는 중에 향로 아가리에선 불길이 솟고 처마며 용마루에선 무서운 용대가리들이 꿈틀거리는데 수없이 많은 알 수 없는 한문글자들이 어지러히 춤을 추며 나를 둘러싸서 이리 가도 한문, 저리 가도 한문, 콧속으로도 들어가고 입 귀 눈 배꼽 똥구멍으로도 막 들어가 내장이 온통 한문이 되어 나중에는 이것들이 웬 음악따라 사방으로 흩어지며 나를 잡아당겨 몸이 막 찢어진다.
“악!”
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제사는 이미 끝나있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시며
“크는 꿈을 꾸었구나”
하여튼 서먹서먹했다. 중국과 양반문화의 낯선 느낌, 외가의 이런 제사 분위기에 대한 서름서름한 느낌이 그 뒤로도 줄곧 나를 지배했다.
외할아버지는 키도 자그마하고 용모가 아주 단아하고 눈매는 봉안(鳳眼)에 살빛이 흰 분이다. 꼿꼿이 좌정하여 전후좌우로 조금씩 몸을 흔들며 눈을 감았다 떴다 천천히 말씀하시는 거나 입맛을 쩝쩝, 이를 딱딱 맞추는 습관이 그대로 타고난 양반임을 증명한다. 늘 외롭고 추워 보여 뼛속까지 스민 유배의 고달픔과 천애고아의 소심함과 침울함이 느껴지는 분이다.
외할아버지는 해남에 와서 천주학을 버리셨다 한다. 시절 탓이겠지만 친일적이었던 것 같다. 통감부 시절엔 순검을 지냈고 총독부 들어서면서는 보통학교 교감, 옛 사진첩을 보면 까까머리 제복에다 긴 칼을 찼다.
외할아버지와 칼.
나의 심상 속에서 외가는 붉은 제기(祭器), 검은 한자, 그리고 칼의 영상과 연결되어 있다.
의례적이고 고답적이고 가파르고 날카롭다. 물론 나도 외손이니까 이런 특징이 내게도 있는 것이 틀림없겠으나 그런데도 내게는 항상 뭔가 이물질처럼 섬뜩섬뜩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이물질이 훗날 두고두고 의식을 괴롭히는 억압의 비수가 된다.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아주 호방한 성품의 야심만만한 중인으로, 해남 상공리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중선배 여러 척을 부리는 큰 부자요, 거물급 무상객주였는데 외할아버지의 출신과 인물을 탐해 데릴사위로 삼았다 한다. 혼례 뒤에 외할아버지는 해남에서 목포로 나와 정년이 될 때까지 줄곧 조선운수주식회사, 지금의 통운 지점장 대리로 계셨다.
생활은 항상 유족한 편이었고 나 다니던 산정국민학교 옆, 비록 초가이긴 했으나 규모가 있고 쾌적한 아주 큰 그 집, 앞뒤뜰에 가득 장미꽃이 만발하여 ‘장미집’이라고도 불렸던 그 집은 목포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였던 연동 시커먼 뻘바탕 한복판에 우뚝 선, 마치 외따로 떨어진 꽃피는 섬 같았다.
외가식구들은 뻘짱뚱이같이 꺼뭇꺼뭇한 나의 친가나 동네 상놈들과는 단연 구별되는 도도하고 콧대 높은 하아얀 귀족이었다. 그리고 내 의식은 검은 뻘밭과 흰 꽃섬 사이에서 끊임없이 중심을 뻘밭에 두려 하면서도 섬으로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며 두 다리를 걸친 채 엉거주춤 바둥거리는 괴상한 딸깍발이 꼴이었다.
우습다. 글이 여기에 이르러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이 지점이 훗날 나의 그 고통스런 양극 분열의 한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오만하고 뾰족한 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집안에 아무도 없던 어느 날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불러앉혀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앞으로 글을 쓸 아이다. 이 말을 잊지 마라. 사람이 글을 쓰려거든 똑 요렇게 써야 헌다. 한 놈이 백두산에서 방귀를 냅다 뀌면 또 한 놈이 한라산에서 ‘어이 쿠려’ 코를 틀어막고,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펄쩍 뛰어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쾅 떨어진다, 요렇게!”
양반이라기보다 차라리 동학당 하시던 증조부의 그 호방한 세계에 가깝다. 어렸지만 나는 그때 왠지 놀라서 눈을 크게 뜬 것 같다. 물론 당신 자신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내 문학의 중요한 한 규범으로 깊이 간직하고 있다.
선고(先考)의 실학(實學)이 가 닿는 어느 언저리에 뜻밖에도 임백호(林白湖)나 진묵(震黙)의 호연세계(浩然世界)가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개 비친 외할아버지는 오만은 커녕 늘 외롭고 쓸쓸한 분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흑석동 구석 비개 그 좁고 어두운 골방에서 홀로 이 세상에서의 긴 유배의 생을 마치셨다.
신주단지를 깬 천주학쟁이, 국모시해를 방관한 친일매국노의 오명, 삭탈관직, 원악도유배에 가문은 흩어지고 고적하게 적소(滴所)에서 종명(終命)한 불운한 선고(先考)의 그 떠나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를 끝끝내 안고 살다 쓸쓸하게 가신 분이다. 그 마지막에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천주(天主)? 묵시록 21장? 수정과 유리와 은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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