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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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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

7. 할머니

우리 할머니, 곰보할매는 지금도 내 마음의 고향이다.

할머니는 아주 키가 작고 못생기고 곰보였는데 곰보를 발음 못한 나는 고무할매 고무할매 그랬다. 이름은 없고 군산때기라 김군산이라 한 것이 이름이 돼버렸다 한다. 항구 군산이 아니다. 고부 군산이다. 헌데 본성은 전주(全州) 이씨인데 왜 김씨로 호적에 올랐을까? 무서운 시절이었다.

선친은 동학 큰 두목으로 갑오 적에 돌아가시고 집안은 쑥밭이 되고 외동딸로 혈혈단신 할아버지한테 시집와 4남 2녀를 낳으셨다. 평생을 말없이 밤낮없이 일만하고 고생고생하시다가 끝내 영화 못보고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곰보할매”
입속으로 부르면 얼굴 모습보다 마음이 먼저 다가온다. 꺼끌꺼끌하면서도 보드랍고 조용하면서도 포근하다.

국민학교 적에 학교가 파하면 나는 으레 사탕이며 과자며 오징어 따위가 흔해빠진 부자 외갓집으로 안 가고 곧바로 달려 가난한 곰보할매한테로 가곤 했다. 할머니는 물레 젓던 손을 멈추고 물레 뒤에 미영이 하얗게 앉은 종발을 꺼내 후후 불어낸 뒤 나에게 먹으라고 내놓으신다. 뻘땅에서 캐낸 세발나물을 된장에 무친 것. 그것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 곁이 덮어놓고 좋았다. 가난하나 정이 있고 사람다운 수고가 있고 따뜻한 침묵이 있었다. 곰보할매는 내 정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없었다면 지난 시절 그 엄혹한 시련 속에서 나는 필경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썩어 문드러져 버렸을 것이다.

베틀 아니면 물레, 물레 아니면 조대통이나 시동통, 호미 갈퀴 부삽이 손에서 떨어질 적이 없었다. 한창 가난할 때는 목포역전 청과물 시장 입구에서 팥죽도 파시고 장떡도 파셨다. 족편을 만들어 불총대까지도 팔러 다니셨다. 쫄랑쫄랑 쫓아다니며 곁에 쪼그리고 앉아 오며가며하는 사람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아, 그때, 그 가난이 이제는 나의 가장 커다란 정신의 자산이 될 줄이야.

도무지 말씀을 안 하시는 할머니를 조르고 또 조르면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얘기는 때기 때기밭에 불나서 영감 공알이 혹 타부렀다” 아니면 “해남 해우장시 해남장에서 해 보다가 해해웃고 죽어부렀다”

싱겁기 짝이 없었다. 헌데도 막상 그 중요한 증조부 얘기를 들려준 것은 할머니다. 그 얘기를 하실 땐 어찌 그리도 말씀이 또록또록 하던지! 하긴 아주 슬픈 얘기도 들려 주셨다. 명절에 끼니 이을 양식도 없는 집 소년이 말하는 남생이를 얻어 팔러다니는 얘기다.

“명절은 닥쳤는디 우리 부모 어쩔끄나 말하는 남생이 사시요. 말하는 남생이 사시요!”

슬펐다. 가난이 슬프고 소년의 마음이 슬프고 남생이 처지가 슬펐다. 수없이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나의 슬픈 감성, 나의 슬픈 문학의 시작은 할머니다. 이 사실을 나는 바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운다. 허나 할머니는 나의 웃음과 익살의 시작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나를 흔들어 깨우며

“영일아 도깨비 왔다!”

과연 배고픈 도깨비가 부엌에서 솥뚜껑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할머니가 후다닥 문을 열어 제치면 파란 불, 빨간 불이 호들갑스럽게 놀라 뜀뛰는데 할머니는 춤을 추듯 튀어나가 부지깽이로 도깨비들을 막 두들겨 잡는다.

“아나, 밥 먹어라. 아나, 밥 먹어라. 잡았다”

새끼줄로 꽁꽁 묶어 잡아서 방으로 들고 들어오는 것은 도깨비가 아니라 늘 몽당빗자루다.

그 방.
그 붉은 방.

빠알간 호롱불이 일렁이고 벽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춤을 추고 할머니와 고모, 삼춘들이 모여앉아 밤참에 뜨거운 북감자를 후후 불며 먹던 그 겨울밤의 연동 그 집 그 붉은 방, 밖에는 찬 밤바람 소리, 방안에는 끊임없는 옛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난 데 없는 뻥튀김, 우김질에 웃음소리. 자주바탕 무명천에 흰 꽃무늬 있는 이불, 울긋불긋 원앙새 수놓은 벽보, 흔들거리는 횃대 그림자, 물레와 베틀 그림자, 아슴푸레한 졸음 속에 근심도 걱정도 없고 오직 사랑과 신뢰만 가득찬 그 꿈결같은 붉은 방.

지금도 자주 꿈에서 보고 괴로울 때는 그려보는 가고 싶은 내 마음의 고향. 그 밤 그 붉은 방. 나의 잃어버린 낙원. 영화 붉은 수수밭의 그 버얼건 술도가 뒷방 색조에서 내 뇌리를 잠시 스쳐간 그 방의 영상,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속의 곰보할매의 방이다. 다시 현실에서 되찾아야 할 내 삶의 모습이다.

언제였던가?
나는 비익빅거리며 물레 돌리는 할머니 곁에 누워 감기를 앓고 있었다. 파들거리는 뚫어진 문창호지 밖엔 새파란 겨울 하늘, 하늘에는 황막한 갯바람 소리 소소리치고, 나는 할머니 물레 속에서 천천히 돌며 포근히 잠들어가고 있었다. 감기는 행복했고 할매는 나의 고향이었다. 지금도 감기에 앓아누워 있으면 언제나 창 밖엔 겨울 하늘과 바람 소리가 있을 것 같고 머리맡엔 할매의 물레가 도는 듯하다.

그 할머니, 나의 그 곰보할매는 전곡에서 찢어지는 가난과 새까만 외로움 속에서 기어이 혼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뒤 몸에서 수없이 수없이 많은 이들이 끝없이 기어나왔다 한다. 그 이들! 아아, 이 더러운 무정(無情)! 앞으로는 이를 잘 모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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