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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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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

6. 할아버지의 여인들

한 고운 작은댁이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목포로 떠나올 때 배 떠나가는 갯가, 뻘밭으로 십리를 내내 울며 불며 외쳐부르며 함께 데려가 달라 애걸복걸하며 나막신 벗겨지고 엎어지고 고꾸라지며 끝끝내 따라오던 한 슬픈 여인이 있었다 한다.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한다. 모질다!

또 한 분, 주아실네. 나도 희미하나 기억이 난다. 곱고 때깔 좋은 할머니. 명주수건에 눈깔사탕 싸와서 늘 내게 주던 그 영광법성 주아실 갯가 주막의 주모였다는 작은댁 할머니. 그리 자주 와 온갖 허드렛일 다 하며 따뜻한 말 한마디 기다렸지만 단 한 번 제대로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한다. 모질다!

정이 없어서였을까! 아닐 거라. 선대부터의 엄중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 떼려고 일부러 그러셨을 거라. 난 그리 이해한다.

목포로 옮긴 할아버지는 역전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 포목 장사에 기계 수선까지 해 한 재산 모았다가 또 그놈의 골패로 홀라당 날리셨다 한다. 기억난다. 어릴 적 연동집 마당. 밤에 흰 차일치고 멍석깔고 카바이드 불빛 아래 벌어진 그 희한한 골패판.

할아버지가 흰 이를 드러내 웃는 걸 그때 처음 보았다. 귀기 같아서 오싹했다. 내림인가? 사람들의 날카로운 외침, 핏발선 눈, 싸움, 패잡는 순간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 번들거리는 얼굴들, 함부로 엎어진 술사발, 김치종발, 흐트러진 고무신짝들.

기괴한 장면이었다. 무시무시한 마귀의 늪. 끔찍했다. 논문서 밭문서 집문서 세간붙이며 패물, 가족들은 악쓰며 울부짖고 판은 계속되고 패가망신! 그리고는 길고 긴 가난! 내림인가? 소름끼친다. 아버지와 나는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노름만은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 뒤 복쟁이 요리하는 식당도 해보고 기계 수선도 계속했지만 이미 낡은 기술. 끝내는 목포 북부의 흉악한 가난뱅이 동네 연동. 그러니까 지금의 산정동 뻘바탕으로 밀려나 다시는 그곳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다가 결국은 거기서 뿌리 뽑혀 병드신 몸으로 나 대학 다닐 때 숙부가 사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 한탄강가 나지막한 어덩 움푹한 판자집으로 옮겨 오셨다.

할아버지를 최후로 뵈었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범 같던 분이 기운이 다 쇠진하여 눈빛은 흐리고 입가엔 경련 같은 희미하고 애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이 웃음이 내가 두 번째로 본 웃음이다. 내 손을 만지며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단 한마디,

“영일아, 집안을 일으켜라.”

운명하시기 전 나를 애타게 찾으셨다 한다. 그 무섭기만 하던 할아버지가 나를. 허나 나는 그때 감옥에 있었다. 전곡 천주교 공동묘지. 숙모와 함께 무덤을 찾은 가을날 이슬아침 무덤에서 검은 구렁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나와 내 앞에 조용히 도사렸다. 숙모의 말,

“니한테 허실 말씀이 있는 게비다”

나는 안다. 할아버지의 꿈이 무엇인지, 한(恨)이 또 무엇인지. 증조부이래, 입도조(入島祖) 이래 우리 ‘우투리’ 집안의 희망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안다. 훗날 그 참혹한 고통과 무섭도록 아름다운 매혹과 전율의 나날, 해남에서 나는 또다시 할아버지의 영을 만난 것이다.

그 한(恨)은, 그 꿈은, 그 희망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네 같은 민초들, 모든 생명들, 그 아침의 이슬도, 무덤의 붉은 흙도, 구렁이까지도 스스로 신령해지고 세상에서 한울님 대접을 받는 후천개벽을 성취하는 것. 그것뿐이다. 개벽만이 확고하게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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