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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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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5>


5. 할아버지

함자는 옥삼(玉三).
우리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다.

내게만 아니라 집안 모든 이들에게, 심지어 이웃에게까지도. 장대한 체격, 높은 이마, 짙은 눈썹 아래 노여움이 이글거리는 타는 듯한 눈, 대춧빛 얼굴, 짙고 검은 긴 수염, 희고 넓은 동정 받친 시커먼 두루마기, 솥두껑 같은 손, 집안이 흔들흔들하는 그 큰 성음.

무서운 어른! 나의 기억은 그렇다. 범접할 수 없는 우뚝한 성채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분 앞에선 숨을 죽였다. 대거리나 너스레가 통하지 않았고 껄렁패들조차 그분을 보면 비실비실 골목으로 숨거나 절하는 것도 잊은 채 길바닥에 서서 작대기인 양 몸이 빳빳이 굳어 버렸다.

하긴 이런 일이 있긴 하다. 연동 수돗거리 물돈 받는 개수할매라고 곱살하면서도 성깔 고약스런 노파가 있었는데 한 번은 손짓해 날 부르더니,
“느그 할애비가 성은 옥가고 이름은 쌤이냐.”
하고 이죽거렸다. 아마 무슨 포한이 진 모양인데 우리 할아버지한테 감히 그따위 망할 소리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볼이 잔뜩부어 고집스럽게 대들었다.
“아니어라우. 김씨어라우.”
“흥, 그 할애비에 그 손자 새끼로고나.”

할아버지는 분노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암태에서 문씨에게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가엄이 관청에서 죽을 곤욕을 치르는 억울함을 겪었고 그날 밤의 활활 타오르는 그 복수의 불길, 맨주먹의 결투, 캄캄한 바다의 도피, 김제(金堤) 허허벌판에서의 울분의 세월, 천지를 뒤흔드는 갑오년 저 혁명의 함성과 총포소리, 피투성이 전장, 송장의 산더미를 아비를 따라 뚫고 나왔고 그 뒤의 피신, 가슴조이는 주아실의 그 어두운 나날, 그리고 증조부의 비극적인 죽음.

난 알 것 같다. 할아버지의 그 어두운 분노의 뿌리. 마치 온 세상에 맞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결하는 듯한 그 이글거리는 타는 듯한 노여운 눈빛의 뿌리를 이제 이해할 것 같다. 그것이 또한 내 번뇌의 뿌리라는 것도 오늘에야 비로소 이해한다.

증조부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는 법성포에서 그 무렵 처음 유행하기 시작한 조끼를 재봉틀로 대량 생산, 포목 장수로 그적에 광주를 드나들다 웬 프랑스 신부를 만났던가 보다. 천주교에 입교, 아마도 그 무렵 동학은 혹독한 탄압 뒤에 일진회 따위로 괴상하게 변질하고 있던 때라 이에 실망한 많은 동학꾼이 “이치는 다르지만 도는 같다”(道則同也 理則非也 水雲 東經大全)하여 천주교로 망명하고 있었는데 그 흐름을 탄 듯하다.

허나 그뿐일까? 그 뒤 우리 집안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어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들과 두 고모가 모두 영세를 받았고, 작은 아버지 한 분은 광주 구교우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복사까지 했었다 한다. 허나 그뿐이었을까? 그 직전 무렵이었다. 도피행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자그만 배로 단신 일본 큐슈(九州)로 건너갔다. 거기서 재봉틀 수선기술을 배워가지고 돌아오셨다.

지금이야 그거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무렵 그런 기술은 지금으로 치면 최고급 하이테크다. 자동차 운전수, 기계 기술자, 기관차 운전사 뒤를 일류 기생들이 환장해서 졸졸졸 따라다니던 시절, 훗날엔 엄복동이나 안창남 비행사가 민족영웅까지 되었던 시절, 육혈포 숭배, 기계 숭배, 개화자 강의 열풍이 휩쓸고 박래품이면 무엇이건 신비로운 전율마저 불러일으키던 그런 시절이다.

할아버지는 연장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광주만 들어가면 떼돈을 벌었다 하고 요리집에 파묻혀 밤새워 말술로 울분을 달랬다 한다. 그 무렵 아버지의 기억 한 토막.

“느그 할아부지가 자전거 타고 십리를 달려가면 나는 헐레벌떡 뒤쫓아가 다음엔 내가 타고 오리를 가고 할아부지가 뒤를 붙들고 밀어. 우리 부자지간은 십리대 오리다, 알것냐?”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요리집 문지방에 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밤새우는 게 일이었다 한다.

무서운 가부장, 요리집 난봉꾼, 파산한 불효자식, 변절한 동학꾼, 피 식은 망국노, 그뿐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할아버지는 그 무렵 잃어버린 암태땅을 조금씩 조금씩 사들이거나 되찾기 시작했다. 뒤따라 작은 할아버지 식솔을 암태로 다시 들여보냈다. 지금의 선산도 그래서 있는 거다. 이제야 나는 이해가 간다. 동학꾼의 서학 입도, 갑오혁명꾼의 도일(渡日)의 숨은 뜻을. 할아버지는 절치부심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일념으로 사신 거다.
허나 그뿐이었을까?

아버지 기억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나 낳기 닷새 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숨죽여 흐느끼며 노래를 부르시면 할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질러 “삼족 망합니다. 삼족 망해요!” 그러면서도 손님들과는 연신 소곤소곤, 함께 어딘가 훌쩍 가셨다가 삼사 일만에야 돌아오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그 이상한 사람들! 아주 먼 데서 온 듯 싶은 그 낯선 손님들! 뱃놈 같기도 하고 체장수 같기도 소금장수 같기도 한 그 체수 큰 울퉁불퉁한, 혹은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들! 헌데도 말씨 공순하여 젊은이에게도 공대하고 예절바르고 체모엄정, 웬 학식은 그리도 깊었는지! 그리고 그 완력들! 등짐지는 솜씨들! 그들이 바로 동학꾼이었다. 틀림없다. 동학재건 움직임!

할아버지는 천주교 신자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동학꾼이었다.
난 어릴 적에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저리 인물 좋은 할아버지가 저리도 못생긴 우리 할머니, 혈혈단신 곰보할매에게 장가들어 또 어찌 그리도 금슬은 좋은 건지, 반말 한 번, 큰 소리 한 번 하시는 것 전혀 못들었으니 과연 어째서? 곰보할매는 실은 증조부의 전사한 한 동학 동지의 외동딸이었다 한다. 선대의 약속! 동병상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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