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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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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4>


4. 주아실

동학군이 관군과 왜군과 민포군에게 풍비박산이 나고 영광 법성포 주아실 주아머리에 피신한 증조부는 여러 해 거기 숨어 사시다 그 뒤 법성에서 광주 나가는 후미진 고갯마루에서 이상한 죽음을 당하셨다.

이상한 죽음! 또 이상한 죽음이다! 목 졸려 살해당한 것인데 범인이 누군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다. 강도였는가? 돈은 털리지 않았다 한다. 원한이었나? 원한 살 사람이 근동에는 없었단다. 동지들의 배신일까? 거기엔 어른들도 고개만 갸우뚱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죽음, 이상한 죽음! 어린 시절 이후 끝끝내 내 가슴 밑바닥에 먹점 모냥 또렷이 찍혀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나의 스산하고 어둡고 잔혹한 색채를 빚은 그 이상한 죽음의 이미지.

곰보할매 왈,
“칠산 바다가 한눈에 뵈는 주아실 큰 느티 밑에서 느그 증조부는 몇 년을 눈썹에 손을 얹고 살았니라.”
눈썹에 손을 얹고 살다니!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왠지 섬뜩하기만 했다.

1984년 초가을이었나 보다. 광주에 갔다가 잔뜩 술을 마시고 새벽녘 여관에서 눈을 떴을 때 벽 위의 바퀴벌레를 머얼건히 보고 있자니 문득 곰보할매의 그 말이 내 머리 속에 파아란 불켠 기호처럼 연이어 찍혀졌다.

주아실, 주아머리! 그게 어딜까? 거길 한 번 찾아보자!
전남대 송기숙 교수, 오수성 교수, 작가 황석영 씨와 원경 스님이 나와 동행했다. 법성포는 거의 폐항이었다. 한산한 부두, 우중충한 상가에서 이리 묻고 저리 물어도 주아실은 아는 사람 없고 칠산 바다가 보이는 곳이란 내 말로 대충 비슷한 방향만 주워듣고서 바다 쪽, 구법성 쪽으로 무작정 더듬어 갔다.

사람도 집도 더는 보이지 않는 쓸쓸한 갯가에 문득 깍아지른 바위가 우뚝 솟아 막아서고 길은 거기서 끝나 버렸다. 막막했다.

근처에 그물 손질하는 어부가 있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주우두요”
좌우두(左右頭)라? 황석영씨는 빠른 사람이다.
“형님, 바로 여기요!”
좌우두는 주아머리의 한자 표기, 왜놈들 장난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

우리는 머리가 바다로 돌출한 부분이고 실은 쑥들어간 부분이니까 이 바위가 바로 주아머리고, 바위 뒤쪽 어딘가 쑥 들어간 곳에 주아실이 있으리라는 걸 유추해냈다. 그렇다면 길이 있을 것이다. 과연 절벽 옆구리에 실낱같은 조로(鳥路)가 숨어 있었다.

절벽에 아슬아슬 몸을 붙이고 간신히 바위 뒤쪽으로 비잉 돌아나가 보니,
아!
탄성밖엔 나올 것이 없었다.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이며 칠산 바다 그 광활하고 황량한 광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황석영 씨가 중얼거렸다.
“세상 끝에 온 것 같군.”
높이 솟은 바위등성이에서 오른쪽으로 나지막이 쑥 들어간 곳에 모래밭 짝띠가 있고, 그 너머, 산어덩에 과연 초가집 대여섯 채가 숨어 있는데 기가 막힌 은신처였다. 거기가 주아실이었다. 그리고 큰 느티가 보였다. 그런데 그때 그 느티 아래 집 마당에서 시커먼 무엇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칼이 쭈뼛했다. 모래밭 쪽으로 한참 내려가서 다시 느티쪽을 쳐다보니 머리 감던 웬 아낙인데 검은 머리를 산발한 채 계속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아하, 그렇구나!
증조부가 저 집에서 몇 해를 숨어 살며 주아머리 돌아오는 낯선 사람을 관헌인가 아닌가 살피기 위해 눈썹 위에 손을 올리고 늘 바라봤다는 뜻이었구나!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아니면 저 황량한 칠산 바다 물결 소리에 실려 오는 우주의 탄식인지, 생명의 한(恨)인지, 뭔지 모를 커다란 그늘이 내 가슴에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 집안 최고의 우투리 증조부의 슬픈 날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날들! 나의 날들! 선천(先天)에 반역하는 모든 삶, 모든 날을 지배하는 그 이상한 죽음의 이미지! 쌔하얀 소외의 이미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배(流配)의 그 황막한, 황막한 이미지! 나의 세계, 나의 깊고 깊은 번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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