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증조부
증조부를 생각할 땐 난 늘 상쾌하다. 맑은 시냇물이 소리쳐 달리고 푸른 수풀 속에 벌거벗은 큰 사내들이 깃발처럼 흰 옷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그런 쾌활한 영상이 보이곤 한다.
우리 증조부는 우뚝한 분이었다 한다. 성함은 영(永)짜 배(培)짜. 얼굴 잘 생기고 영특하고 기운이 장사였다 한다. 말술에 담력 또한 대단했다 한다.
곰보할매 왈,
“느그 증조부는 눈이 호랑이같이 이글이글 불방울같고 얼굴빛 대추 같고 키 훨씬 크고 어깨 딱 벌어지고 목소리가 우렁우렁 종소리 같었니라.”
허나 큰고모는 왈,
“느그 증조부는 눈이 가을 샘물같고 얼굴 하아야니 갸르스름하니 아다암하니 똑 흰 학 같고 키는 보통 키에 목소리만 그저 시커먼 까마귀같이 수리성이었제.”
어째서 이리 엇갈릴까? 사람은 한 사람인데 컸다 작았다, 붉었다 희었다, 호랑이다 학이다, 불방울 가을샘물, 대추에 까마귀에 종소리에 수리성이라! 어째 이럴까? 어려서도 그게 몹시 궁금했다.
혹시 고조부와 증조부가 기억 속에서 겹쳤을까? 아니라고 한다. 틀림없는 증조부. 그렇다면 그 어른이 요술, 분신술, 둔갑술을 한 것일까?
허나 영으로 살았던 옛 사람들은 영의 움직임으로 사람의 인상을 기억한다. 전설이란 그런 것이다. 더구나 집안의 큰 자랑이요 신화와 같은 어른이었으니까.
문재철이란 사람이 있다. 일제 때 암태도 대지주였고 목포조선면화회사 사장이었고 문태중학교 교주였고 암태도 소작쟁의 때는 농민들의 원한의 표적이었던 친일파 악질지주 바로 그 장본인이다. 이 사람 아버지 문 아무개 씨가 바로 우리 집안의 말하자면 불구대천의 원수다.
증조부가 이 문씨와 골패를 한 모양이다. 땅문서 집문서 몽땅 걸고 사생결단을 한 모양이다. 막판에 문씨가 속임수를 쓰고 증조부가 이걸 되잡아 윽박지르자 급기야 문씨는 관헌을 끌어들여 증조부를 잡아다 죽도록 곤장을 친 모양이다.
풀려나 떠메나온 증조부. 재산 몽땅 빼앗기고 원한에 사무쳐 이를 갈며 복수를 맹세했다 한다. 어느 날 밤 문씨네 집에 빙둘러 불 싸지르고 문씨 찾으나 튀고 없고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그 집 머슴들 하난지 둘인지 셋인지, 맨주먹으로 다 때려죽이고 나서, 이 대목은 아무래도 뻥튀김 같은데, 하여튼 그 길로 중선배에 식솔 태우고 밤새 바다를 달려 영광 법성포로, 법성포에서 전북 줄포로, 줄포에서 김제로, 김제 어딘가로 깊숙이 들어가 외진 데 눌러앉아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바로 그쩍에 동학에 입도했다 한다. 그러다 갑오혁명 때는 두목으로 몸을 세워 이름을 크게 떨쳤다 한다. 천도교쪽 기록에 의하면 갑오당시 금구두목이 김인배(金仁培)씨로 되어 있는데 증조부와는 무슨 관계일까? 이것이다.
올해 그러니까 단기 4334년, 서기 2001년 3월 12일 나는 아내와 함께 전라북도 모악산 아래 금산사 주지 도영스님 방에 앉아있었다. 향토사학자인 최순식 선생이 함께했다.
최선생 왈,
“전에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회상기에 김선생 증조부님 김영배(金永培)씨가 이곳 김제 쪽에서 동학을 하셨다고 돼있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저 유명한 김인배(金仁培) 두령의 집성촌 마을인 봉서(鳳棲)마을, 김제군 봉남면(鳳南面) 봉서동에서 사셨던 것 같소. 오늘 김제역으로 가는 길에 봉서마을에 한번 들러보실랍니까?”
이상한 느낌이 왔다.
이제까지는 그저 집안에 내려온 전설이던가, 천도교쪽 자료에서 김인배 두령의 이름을 보고 그 연관성을 짐작만 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이렇게까지 돼가니 막상 나의 ‘뿌리’가 내 바로 앞에 드러나 있어 알렉스 해일리처럼 내적인 흥분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김제역 가는 길에 봉서마을, 봉서동에 잠깐 들렀다. 바로 길가에 있는 마을로 10여호 될까 말까, 그 중앙에 김인배 두령의 고택이 있었다. 증조부가 그 마을에 사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거기서 논밭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솔숲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녹두 전봉준 장군의 처가가 있던 곳이라 한다. 최선생에 의하면 김제 금구 원평포의 수장 김덕명(金德明) 두령은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익산 사자암에 숨어계실 때 직접 교화를 받아 입도했다는데 김제 동학의 일반적인 강력한 교세 속에서 입도한 녹두는 처가살이를 접고 고부군 조소리(鳥巢里)로 포덕(布德)하러 옮겨간 것이라 한다.
아아 혁명!
동학의 저 위대한 개벽적 혁명의 혈통이 지금 내 안에서,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한반도의 저 논밭과 들녘의 현실로 명백한 동학의 역사 안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차로 돌아와 가슴에 손을 얹고 침묵에 빠진 나에게 아내가 근심어린 얼굴로 속삭였다.
“흥분을 가라앉혀요. 현실이니까 현실로 받아들이면 돼요.”
현실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며칠 지나서 최선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인배 두령의 증손자를 만났는데 영배씨가 봉서마을에 살았음이 분명히 확인된다고 하는구만요! 금산사에 다시 내려올 때는 한번 꼭 만나보자 하는군요.”
갑오동학에서 급진과격파로 김개남과 함께 쌍벽이었던 김인배! 광양 등지에서의 피비린 전쟁과 함께 김인배의 혁혁한 이미지가 증조부의 전설적인 영상과 함께 우뚝우뚝 겹쳐보였다. 김인배! 김영배!
가슴에 손을 얹고 겸손되이 회상해야 마땅할 일이지만 억제할 길 없는 흥분에 순간 몸을 떨었다. 내 삶이 이 반도의 산하에 깊이깊이 뿌리박힌 순수한 토박이의 삶이란 사실을 전율과 함께 확인하는 기이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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