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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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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2>

제1부

1. 앞 글

노을 무렵인데 짙푸른 하늘 아래 파아란 초겨울 보리밭 가장귀에 버려진 채 모로 누운 돌부처.

옛 꿈이다. 스물두 살 땐가 처음 꾼 뒤로 여러 번 거듭 꾼 이상한 꿈이다. 꿈에서만 아니라 생시 쓸쓸하고 괴로울 때도 가끔 떠오르는 환상이다. 고즈넉하고 황량하고 무언가 불길하면서도 화안하니 편안하여 깊은 의미가 있는 듯한, 그러나 역시 서글픈 꿈이다. 동아일보와 이 글을 쓰기로 합의한 날 밤, 울적해 잠 못 이루며 지난 날 돌이켜보던 내 마음에 또 그 꿈이 떠올랐다.

내 운명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 의미나 목적을 읽어낼 만한 능력은 내게 없다. 허나 막연하지만 날카로운 어떤 느낌은 있다. 그 느낌을 길양식하여 이제 나의 긴 회상을 시작한다.

나의 번뇌, 그 깊고 깊은 뿌리를 찾아 명상여행을 떠난다. 눈 펄펄 내리는 거기 어느 골엔가 반가운 매화가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여러분에게, 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두 아들에게도 역시 반가운 매화가!

2. 내 력

나의 내력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귀에 들려오는 황량한 물결소리가 있다. 그리고 그 물결소리 저 편에 검은 섬 하나가 우뚝 선다. 안개 속에 우뚝 서 움직이지 않는다. 무기미하다. 번뇌의 검은 점. 아마 나의 선조가 뭍에서 몸을 피해 건너던 바다 한복판에서 부딪친 광경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다. 슬퍼진다. 그분의 그때 마음인가 보다.

저 검은 점 안에 나의 번뇌의 씨, 내 운명의 뿌리가 들어 있다. 검은 점은 점차 형상으로 확대되고 의미망으로 변한다. 마음의 빗장이 뽑혀나가며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스산하다. 허나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인생의 큰 선배인 어느 분의 충고대로 단순하고 소탈한 웃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나의 회상을 시작하겠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입금리.
그러니까 일제 때 소작쟁의로 유명한 그 암태도다. 이 섬이 바로 우리집안의 태다. 지금도 선산이 있고 일제 때에 되돌아 들어간 사촌 숙부네가 지키고 있다. 한 번 가본 적도 없지만 산음(山蔭)같은 건 별로 없는 듯하다. 하기야 우리네 같은 민초들 강산정기가 당할 소린가. 허나 지금은 개벽이요, 지기(至氣)의 때라 진용(眞龍)이 사람에 있고 명당(明堂)이 사람 마음에 있을 터이니 사람만 저 잘나면 그것이 천지음덕일 것이다.

무슨 공(公), 무슨 대부(大夫), 모슨 이조니 호조니 판서 참판 따위 뭐 그런 시끌벅적하고 너덜너덜한 품계나 직위 같은 것 잔뜩 박아놓은 그 뭍에서의 족보, 난 그건 별 관심 없다. 내 정신 속의 집안 내력은 단연 섬으로부터 시작이다.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그 입도조(入 島祖) 어른, 그리고 그분 뒤로 이어져 내려온 저 검붉은 ‘우투리’의 핏줄을 나는 자랑스러운 나의 참 족보로 생각한다.

우리 집안은 우투리 집안이다.
‘우투리’란 전라남도 연안 섬지방 사투리로 제주사람들은 ‘오돌또기’라고 하는데 키 작고 나부데데 옆으로 바라진 섬토종들과는 달리 뭍에서 건너온 입도(入島) 종자들, 기골장대하고 성정 억세고 머리 좋고 피 뜨겁고 일 잘하며 기운 세고 유사시 반항적인 그런 종자들.

평소에는 부지런히 일만 하고 우스개 소리에 눈물 많고 인정 많은 그런 양민이지만 한 번 사세 뒤틀리면 관헌이고 지주고 간에 모지락스럽게 두들겨 패고는 냅다 튀어 뭍이나 딴 섬들로 바람같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종자들을 가리켜 ‘우투리’, ‘우툴’ 혹은 ‘오돌’, ‘오돌또기’라 부른다. 아마도 뭍에서 반란에 가담했거나 법을 어기고 섬으로 몸을 숨긴 선조들의 거칠고 뜨거운 반역의 핏줄 때문일 게다.

본관은 김해(金海).
김해 김씨(金海金氏) 목경파(牧卿派). 흔히 그냥 경파(卿派)라고도 한다.
신안군 내 다도해 일대 모든 섬 김씨들은 몽땅 경파(卿派)다. 하의도(荷衣島) 김대중(金大中)씨 집안도 경파(卿派). 헌데 이 경파(卿派)가 뭍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우리 입도조(入島祖)는 무슨 일로 뭍을 떠나 암태에 들어왔을까? 당쟁인가? 역모인가? 민란인가? 범금(犯禁)인가? 아니면 그저 가난인가?

뚜렷한 전설은 없다. 아마도 대대로 단단히 함구령이 내린 탓일 터이다. 다만 개황(槪況)으로 보아 붉은 바람 누른 티끌 속 번뜩이는 그 칼빛 같은 운명을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 운명에서 울려나오는 어둡고 장연한, 해맑고 익살스런, 그런 모순에 가득 찬 복잡한 시나위 가락, 혹은 짙고 현란한 극채색 민화의 환열을 마치 내 운명의 서장처럼 나는 느낀다.

입도조(入島祖) 섬에 들어온 뒤 부지런히 땅 갈고 배 저어 고기 많이 잡았던가 보다. 살림이 포실했다 한다. 인망 도탑고 자손은 번창, 논밭도 꽤는 있었다 한다. 허나 우투리 집안의 내림, 그 비극적인 운명 때문일까? 몰락의 어두운 그림자가 차츰 집안에 내려깔리기 시작했다.

몇 대조 때라던가 어느 날 노을이 붉게 탈 무렵 어마어마하게 큰 시커먼 구렁이가 방으로 기어들어와 사람들이 그것을 마당으로 끌어내놓고 불 밝혀 밤새도록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집안에 이상한 살인 사건이 났다. 이야기는 언제나 여기서 뚝 끊긴다. 어릴 적이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은 말을 안 하려 굳게 입 다무는 어른들. 그 얼굴에 드리우는 음침한 그늘에서 나는 무엇인가 컴컴한 물체 같은 것이 치렁치렁한 자락을 땅에 질질 끌며 느릿느릿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아 등골에 오스스 소름끼치는 것을 느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나는 붉은 황토, 푸른 영산강, 저 눈부신 태양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어른들의 그 낯선 어둠과 몰락과 범죄의 세계에 꼼짝없이 붙들려 들어가는 것 같아 속이 메스껍고 멀미를 느끼곤 했다. 세계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이상한 뜨내기가 된 것 같았다.

젊어서 내가 되풀이 꾸어온 한 꿈이 있는데, 희뿌연 날 외따로 떨어진 텅 빈 초가집 마루에 식칼이 하나 놓여 있는 꿈이다. 이 꿈이 떠오를 때면 늘 피투성이 구렁이와 이상한 살인사건의 전설이 뒤따라 생각나고 어디선가 먼 하늘에 날카로운 비명의 울림이 꼬리를 끌며 아득히 사라지고 그리고 나서는 또 영원한 적막, 영원한 유배와 고립과 형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 외롭고 쌔하얀 소외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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