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쉴러 교수(미국 예일대학)가 역설적으로 현대 금융의 정당성을 적극 변호하고 나서 주목을 끈다. 우리 시대,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상에 남은 몇 안 되는 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던 그이기에,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오늘날 세상의 공분이 집중된 '금융 자본주의'에 대해 "그 혁신의 힘을 제한하기보다는 활용할 때 좋은 사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에 맞서
▲ <새로운 금융시대>(로버트 쉴러 지음, 조윤정·노지양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알에이치코리아 |
쉴러가 금융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우리의 통념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는 자산가들의 수익 극대화나 리스크 관리에 치중된 금융의 일반적인 정의 자체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금융은 "목표를 현실로 이루어가는 과학", 또 "목표 성취에 필요한 경제적 합의 구조이자 그 성취에 필요한 자산의 관리를 위한 기능적 과학"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의미로 재정의 되고 나니, 금융은 단순히 부자들의 돈 버는 목표가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사회적 목표의 실현을 지원하는 일종의 사회공학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제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도 재해석된다. 쉴러는 "인구의 폭넓은 계층에 금융이익을 분산하고 소유를 분배하기 위한 계획적인 정부 정책의 역사"로 풀이한다. 그는 '자본 소유의 분산'에 주목하는데, 그 역사를 해방 이후 한국의 농지개혁, 또 대공황기 미국의 뉴딜 정책과 20세기 초 영국의 '재산 소유 민주주의' 등으로 확대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맥락에서 보면 2000년대 초 서민의 주택 보유를 장려했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소유주 사회(ownership society)'가 단적인 예인데, 심지어 최근 중국의 대대적인 국민주택 정책도 같은 의미다.
하지만 미국에서 각종 첨단 금융 혁신으로 치장되었던 부동산 위주의 '소유주 사회' 실험은 아쉽게도 주택 거품과 초대형 금융 위기로 막을 내렸다. 뭔가 응분의 책임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쉴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금융 자본주의는 인간의 발명품이고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 따라서 그는 "실패한 요소들의 더미 속에서는 성공적인 금융 아이디어들도 많이 섞여 있다"며, "금융체계가 비록 불완전하다고 해도 나는 금융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중대한 화두가 되리라 믿고 있다"고 역설한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금융의 민주화
"금융과 좋은 사회"라는 원제에서 보듯이, 쉴러는 금융을 좋은 사회라는 테마와 직접 연결 짓는다. 다시 말해 "금융은 인류의 행복과 성취, 그리고 더 좋은 사회라는 목표를 실현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지금 상태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금융 시스템이 우리 삶에 폭넓게 스며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융과 좋은 사회를 연결 짓는 그의 사고의 핵심 축은 이것이다. 금융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통하여 좋은 사회를 향한 현대 금융의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 <버블 경제학>(로버트 쉴러 지음, 정준희 옮김, 장보형 감수,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랜덤하우스코리아 |
<새로운 금융시대>의 문제의식 역시 금융 민주화에 기반하고 있다. 쉴러는 앞에서 본 자본 소유의 분산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에 주목, "역사적으로 볼 때 금융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변해 왔으며,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금융거래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아직 한계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그는 "금융 개혁을 억제하기보다 풀어주어야 금융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쉴러가 말하는 금융 개혁은 금융의 과잉이나 오용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사회 자산 관리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그 범위와 다양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심지어 금권력의 횡포에 대한 예로 종종 언급되는 로비스트 문제를 끌어 들여 (1% 최상층 이외) "나머지 99%를 대변하는 단체들의 로비스트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융 민주화의 소재로 언급된 '소유주 사회' 등의 시도들이 결국 투기 버블로 전락하여 위기를 낳았던 것 아닌가? 이에 쉴러는 '금융의 인간화'에 초점을 맞춘다. 금융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나 행태 습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제대로 설계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행동이나 심리 특성에 주목하여 금융을 연구하는 '행태 금융론'의 창안자로서 면모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사실 쉴러를 세계적 명사로 만들었던 <이상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강국 옮김,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역시 이 문제의식, 특히 "투기적 버블의 심리학"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금융을 인간에 내재된 공격적 속성과 권력욕에 대한 일종의 "신사적인" 배출구로서 위치 지운다는 사실이다. "금융이 발달된 경제에서는 본질적으로 건설적이며 인명의 손실이 따르지 않는 공격성의 배출구가 제공된다"는 것. 이처럼 인간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기반으로 쉴러는 "그다지 고매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행위들이 본질적으로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제시스템"으로서 금융의 새로운 역할과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금융의 정취가 느껴진다.
'카스트적 평형' 혹은 '거대한 환상'의 위험
인간적 면모를 지닌 금융의 민주화에 대한 그의 고민을 좇다 보면, "나머지 99%"를 향해 열린 '따뜻한 금융', '새로운 꿈을 키우는 금융'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쉴러는 오늘 날 금융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도 금융업 종사자들, 또 금융권 진출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하면, 금융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직업 안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 1부에서 현대 금융 관련 직업들의 역할과 위상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상 과열>(로버트 쉴러 지음, 이강국 옮김,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매일경제신문사 |
문제는 이러한 분노가 실은 사회 스스로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이른바 "거대한 환상"의 위험을 제기하는데, 당초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직전 그 위험을 환기시켰던 노먼 에인절(전 영국 국회의원)이 제기했던 테마다. 당시 세계 열강들이 집착했던 "군사적 정복이 경제적 이득을 가져 온다"는 막연한 생각, 다시 말해 거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착시'가 세상을 불안의 늪으로 내몰았고, 결국 자기실현적으로 세계대전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생각이 환상인 것은 1870년대 독불(獨佛)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으로서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던 프랑스가 오히려 승전국 독일보다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로 반증된다. 배상금을 갚기 위해 프랑스가 어떻게든 수출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쉴러는 금융에 대한 불신, 즉 금융의 경제적 정복에 대한 대중들의 불안이 결국 새로운 형태의 '거대한 환상'에 다름 아니라고 진단한다. 나아가 이러한 불안 혹은 불신이 사회적 전염병처럼 확산될 경우, 자기실현적 방식으로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그 결과 세상을 나락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금융 민주화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현대의 카스트적 평형상태에 대한 굴복적 심성, 나아가 세상을 불안의 늪으로 끌고 가는 거대한 환상을 해체하기 위해 더더욱 금융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쉴러의 '따뜻한 금융' 역시 실패할 운명?
쉴러의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금융의 순기능을 살려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게 하여 사회 구성원들 전반에게로 그 수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여러 맹점들이 남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써야 한다면 제대로 된 발명품을 만들어 쓰는 것이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가장 실리적인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심지어 위기의 화신으로 비난 여론이 집중되었던 투자은행마저 "인간의 공격성을 좀 더 신사적인 모습으로 발산하게" 만든다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또 상업은행은 아예 "사회 자산의 관리자"로 격상된다.
그러나 쉴러의 고민에도 몇 가지 아쉬운 측면이 엿보인다. 가령, 현대 금융의 확대된 역할에 대한 요구는 일견 우리 사회 전체를 금융의 변덕스런 속성에 내맡기는 무책임한 처사 아닌가? 또 금융의 창의성 혹은 상상력에 대한 욕망이 도리어 수익 극대화만을 노린 새로운 인센티브를 유발하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의구심들에 비추어 그의 따뜻한 제안들은 아직 현실 검증을 거치지 못한 소망에 불과한지 모른다. 세계대전의 위험을 경고했던 에인절의 분투가 실패했듯이, 금권력에 대한 분노가 지닌 위험을 경고하고 새로운 금융시대를 개척하려는 쉴러의 시도 역시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날 운명은 아닌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개인적으로 쉴러 교수의 기존 저서 몇 권에 대한 국내 번역본에 감수·해제자로 참여한 적이 있기에, 그의 고민들을 이래저래 곰곰이 뜯어보고 반추할 기회를 가진 바 있다. 사실 의외로 국내에 그의 저서들이 대부분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 표현된 그의 고민과 관심 대부분이 이미 다른 책들에도 녹아 있어 함께 살펴보면, 현대 경제나 금융의 진화 및 다양한 실험에 대해 더욱 풍성한 사고의 경험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상 과열 : 거품증시의 탄생과 몰락> 쉴러를 그야말로 세계적 명사로 만든 책이다. 여기서 쉴러는 닷컴버블 붕괴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금융 시장의 투기적 버블 속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특히 이러한 투기 버블의 핵심적인 기제로서 "사고의 사회적 전염"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사고 경향 혹은 행태 속성을 제대로 간파해야만 버블·붕괴의 고통이 되풀이 되는 것을 회피하거나 적절한 보완책을 강구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새로운 금융질서: 21세기의 리스크>(정지만 외 옮김, 어진소리 펴냄) 이 책은 거시적 차원의 리스크 관리를 위한 금융 시장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데, 금융 민주화에 대한 그의 고민도 여기에 등장한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최신 정보기술과 리스크 관리기법으로부터 무시되어 온 기본적인 리스크, 즉 우리 직업이나 가정의 가치에 대한 리스크, 우리 사회의 생명력에 대한 리스크, 그리고 국가 경제의 견고성에 대한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
이미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애커로프와 공저한 이 책은 케인스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조명하면서, 그동안 케인스의 사고에서 체계적으로 거세되어 왔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는 테마를 복원시키고 있다. 그 핵심은 경제학에다 심리학 혹은 사회학적 통찰력을 가미한 '행동경제학'인데, 특히 이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넛지>(카스 선스타인·리처드 탈러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펴냄) 유의 미시적 차원이 아니라 거시적 맥락에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버블 경제학 : 세계적 현상, 부동산 버블과 경제 시스템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다> 이 책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단초가 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를 반추하면서, 역설적으로 금융의 새로운 역할을 제안한다. 즉, "지금의 위기는 날로 정교해지고 있는 금융 인프라인 리스크 관리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개선의 노력을 배로 늘릴 기회"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 책을 통해 "금융 민주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도한다. *한편 금융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쉴러의 웹사이트(☞바로 가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개 글에 이러한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다. "금융은 거대한 힘을 지닌 기술이다. 이 힘은 국민들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며, 모든 국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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