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MBC 수목 드라마 <미스코리아>. ⓒMBC |
만약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시원은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미뤄야 했을지도 모르고, 나정의 하숙집은 재정난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IMF라는 시대보다 낭만과 설렘이 가득했던 시절을 비췄던 두 드라마와는 달리, MBC 수목드라마 <미스코리아>는 1997년 겨울부터 1998년 봄까지 IMF 한파가 몰아쳤던 몇 개월을 배경으로 한다. 즉 <응답하라 1997>의 순수한 고등학교 시절과 <응답하라 1994>의 떨리는 대학 시절을 지나 IMF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은 청춘들의 서글픈 생존기를 보여준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6개월 다니다가 엄마의 곗돈으로 '비비화장품' 회사를 창업했던 형준(이선균)은 현재 빚에 쪼들려 사채업자 선생(이성민)에게 보디가드를 빙자한 24시간 감시를 당하는 서른 살이다. 남고 앞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못 피는 남학생들까지 줄 서서 담배를 사게 만들었던 여고생 지영(이연희)은 지금 드림백화점 엘리베이터 걸이자 구조조정 대상 1순위인 스물일곱 살이다. 그리고 형준의 동창 이윤(이기우)은 형준에게 "미스코리아 진을 만들어오면 원하는 투자금액을 전액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비즈니스맨이다.
미스코리아 대회 참가는 지금으로 치면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 <K팝스타> 같은 것이다. 어쩌면 더 좁은 등용문일지도 모른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밑바닥 인생들이 타고난 미모와 몸매만으로 인생한방, 로또당첨을 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형준에게 미스코리아란 화장품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구세주다. 배고프면 엘리베이터 CCTV를 머리로 가린 채 물도 없이 삶은 계란을 우걱우걱 삼키고, 싸고 천박한 엘리베이터 걸이라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나와도 '와이키키' 미소 연습을 해야 하는 지영에게 미스코리아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항상 "벗어봐. 내가 너 미스코리아 만들어줄게.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이 널 볼 거야"라고 외치는 퀸 미용실 원장 애리(이미숙)에게 미스코리아란 자신의 권력을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이상하리만치 미스코리아에 집착하는 현상이 가능했던 건, 그 때만 해도 미스코리아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자 미스코리아 중계는 "국민의 절반이 시청하는" 핫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IMF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돈을 벌던 아버지들이 평생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다음 해인 1998년 가을에는 한스밴드가 회사 대신 오락실을 전전하는 아버지들의 일상을 담은 곡 '오락실'을 발표했다.
▲ 엘리베이터 걸 지영(이연희)과 화장품회사 사장 형준(이선균). ⓒMBC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 회사에 헌신하다가 헌신짝 되던 시절. 형준과 지영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스코리아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성실함이 생계를 담보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나무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2013년의 청춘도, 1997년의 청춘도 모두 안녕하지 못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형준을 만나 지난 10년의 세월을 곱씹어보던 지영은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1층에서 모든 손님이 내린 후 지영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지만, 이내 상사의 강요 속에 '와이키키' 미소 연습을 하고 만다. 과연 미스코리아는 지하까지 내려온 청춘들의 엘리베이터들을 다시 끌어올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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