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중종입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선 왕 중에서도 건강한 왕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이 중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사대부를 물리치고 여의(女醫) '장금'을 가까이 뒀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라마로 허준과 함께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의 '장금'의 신화는 중종 때문에 탄생한 것이죠. 드라마는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편집자>
똥, 오줌을 약재로?
10월 24일부터 중종은 대변이 막혀 곤욕을 치른다. 10월 29일 대변이 통하자 한숨을 돌렸지만 임종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11월이 되자 심열과 갈증을 호소한다. 혀가 갈라지고 입이 마르고 손바닥에도 번열이 있자 청심환, 생지황고, 소시호탕 등 다양한 처방을 통해 치료한다.
재위 39년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野人乾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11월 8일 박세거가 들어가서 임금을 진찰하고 이렇게 적었다.
"갈증이 줄어들고 열은 이미 줄었다."
중종도 이런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여오라 했다."
☞관련 기사 : 중종의 건강학 ① 복통 호소하는 왕, 대장금의 화끈한 처방은… |
야인건수는 전염병에 열이 심할 때 먹으면 관 속에 든 사람도 살아 나온다고 해서 파관탕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판소리 명창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오고 열이 나면 절간의 똥물을 길어다 끓인 다음 마시고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논리선상에 있다.
이 처방의 뿌리엔 쓸개즙이 있다.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선 갖가지 음식 색깔이 버무려지지만 대변을 보면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쓸개즙이 희석됐을 때 나타나는 색이다. 황달이 생겨 쓸개즙이 간으로 역류해 혈액 속에 퍼지면 노란색이 되는 것과 같다. 똥 속엔 분해된 쓸개즙의 일부가 포함돼 열을 식혀준다. 오월(吳越) 전쟁 때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했다는 고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열을 쓸개즙을 맛보면서 식혔다는 방증이다.
오줌도 약으로 쓰였다. 환원탕이란 이름으로 처방됐다. 송시열이 어린아이의 오줌을 받아 마셔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오줌을 달여 만든 약을 추석(秋石)이라고 하는데 정력 보강에 좋은 약재다.
추석도 음련추석과 양련추석으로 나뉘어 음기와 양기가 허약한 사람을 각각 보충한다. 특히 약효가 좋은 것은 7세 이전 어린아이의 오줌이다. 궁중 내의원에선 관상감, 봉상시, 사역원에서 교육받는 어린아이를 동변군으로 차출해 소변을 받아 한약재 가공 재료로 사용했다.
중종은 8회에 걸쳐 야인건수를 복용한다. 그때마다 열이 잡히면서 치료 성과를 올린다. 죽기 전날까지도 야인건수와 청심원을 처방한다. 하지만 마지막 날은 열이 잡히지 않으면서 불알이 오그라졌다. 죽음을 앞두고 생명력이 다했음을 기록한다.
치통엔 엽기적 처방
치과가 없었던 옛날엔 치통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치료했을까. 실록은 중종이 치통으로 고통받았음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재위 34년 중종이 치통 때문에 영정을 맞는 일을 세자에게 하도록 맡긴다. 39년 다시 치통이 말썽을 부리자 의관과 치통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나에게 본디 이앓이 증세가 있는데 아픈 것은 빠졌으나, 지금 있는 이가 또 아프고 흔들린다. 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렵겠고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중종은 원인도 스스로 분석했다.
"감기엔 반드시 열기가 생기므로, 이가 움직일 때 잇몸도 헐고 열이 나니 감기 때문에 일어난 듯하다. 잇몸이 조금 붓고 진물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튼튼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강현이 대답한다.
"먼저 옥지산으로 양치질한 다음에 청위산을 복용하고 뇌아산을 아픈 이 겉에 바르고, 또 피마자 줄기를 아픈 이에 눌러 무는데 뽕나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다만 뇌아산에는 양의 정강이뼈를 넣으므로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잇몸엔 치조골 인대가 붙어 있다. 인대는 뜨거우면 늘어나 결합이 단단하지 못하게 되면서 구강의 노폐물이 이와 잇몸 사이를 채우면서 느슨해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염증이 잘 생기는데, 이것이 풍치의 원인이다. 중종은 이런 원리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동의보감>은 잇몸이 패어 이뿌리가 드러나고 치아가 흔들리는 현상을 다시 튼튼하게 되돌리는 처방을 제시한다. 양의 정강이뼈와 몇 가지 약재를 조합한 '엽기적' 처방이다. 그러나 <중약대사전>에 보면 양 정강이뼈의 화학적 성분은 인산칼슘이 절반이고 불소가 중요한 성분으로 포함돼 있다고 분석한다.
치아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인산칼슘이고 충치를 막고 보호하는 불소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으로 분석해도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아문'에는 버드나무 껍질로 치통을 치료하는 조문이 나온다. 버드나무 껍질이나 잎을 끓여서 머금었다 뱉으면 어금니의 아픈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아스피린의 원료는 살리실산인데, 이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해 얻을 수 있다. 진통제의 원조가 아스피린인 것을 보면, 조상의 지혜가 현대 과학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임플란트로 빠진 치아를 보강하겠지만 옛날엔 어떤 방식으로 치료했을까. 낙치중생방(落齒重生方)이란 조문에는 빠진 치아를 재생하는 엽기적인 처방이 등장한다. "치아를 다시 나오게 하는 데는 숫쥐뼈를 가루로 만들어 쓴다"고 하며 뼈를 발라내는 방법까지 기재하고 있다("쥐를 잡아 껍질을 벗긴 다음 노사라는 약물을 문지르면 3일이 지나서 살은 다 헤어지고 뼈만 남는다"). 또 한 가지 처방이 기재돼 있다.
"눈을 뜨지 못한 쥐새끼 서너 마리를 5가지 약재를 넣고 빚어서 사용한다."
쥐가 이빨에 특징을 지닌 설치류임을 감안한다면 한의학이 약물을 쓰는 원리, 즉 살아가는 생기를 빌려 약물로 쓴다는 원리가 반영된 처방인 셈이다.
조광조를 죽이다
▲ 조광조(1482~1520년). ⓒ프레시안 |
"중년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 하여 옛날 정치에 뜻을 집중하였으나, 신진(新進)만을 전임(專任)하였으므로 일이 과격한 것이 많아 뜻을 능히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비록 여러 차례 간사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능히 다시 개오(改悟)하였으니 학문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의 아이콘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진의 대표 주자는 조광조였다. 실록 14년 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賜死)한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지난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이 모두 시종으로 있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진강하여, 내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좋은 관직을 가려서 임명하고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서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높은 자리에 발탁했으니, 내가 그들을 대우함에 부끄러움이 없다 할 만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조광조 등이 서로 어울려 결탁해서 자기에게 붙는 자는 퇴출시키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힘 있고 중요한 자리를 틀어잡았다. 조종의 법도는 지킬 것이 못 된다 하고 원로의 말씀은 쓸 가치가 없다고 하며, 후배들을 유인해서 과격한 언행이 버릇이 되도록 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때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있으면 반드시 극구 배격하고 막아서 상대를 꺾고 자기를 따르게 하니, 국론이 뒤집히고 나라 정치가 날로 잘못되었다. 조정 신하가 가만히 분개하고 개탄하는 자가 많았다."
사관의 평가는 약간은 씁쓸한 어조다.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사약을 내리는 장면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압권은 역시 당시 38세였던 조광조의 사사 장면이다. 사약을 받자 자신의 사사가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 의금부 도사 유엄에게 심정(沈貞)의 지위를 묻는다. 그러고는 거느린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어라. 먼 길 가기 어렵다."
실록엔 '거듭 독주를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거듭 마셨다는 것은 사약을 먹었는데 죽지 않은 것이다.
다른 기록에 이 부분을 보충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사약을 마셔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나졸들이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고 했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 머리를 보전하려 사약을 내렸는데 어찌 너희들이 감히 이러느냐"라고 소리 지르며 독한 술을 더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두 얼굴의 약재, 부자
당나라 고종대인 653년에 제정된 당률에선 대표적인 독약으로 짐독, 오두, 부자, 치갈(治葛)을 손꼽았다. 오두와 부자는 같은 종류의 독성 식물이다. 오두는 같은 식물의 모근이고 부자는 그 곁가지인 자근에 속한다.
짐독은 무엇일까. 짐새의 독인데 중국 남해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새의 털을 술에 담가두면 독주가 되어 치명적인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본초강목>에는 꿩과에 속하고 형태는 공작과 비슷하며 목은 검고 부리는 붉으며 뱀을 통째로 삼키며 이 새가 물을 마신 곳에선 모든 벌레가 전멸한다고 적혀 있다. 오직 코뿔소의 뿔만이 이 짐독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나 그 실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다만 독살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두와 부자는 잘 알려져 있다. 부자의 맹독성은 예전부터 사냥에 이용돼왔다. 북반구의 원시민족은 부자 뿌리에서 독성을 추출해 화살 독을 만들어 새나 짐승을 잡았다. 중국에선 그 즙을 달인 것을 사망(射罔)이라고 불렀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독이 사냥한 새와 짐승에서 분해돼 저독성으로 바뀌며 조리하면 무독성이 된다는 것이다. 북반구에서 자라며 남방에선 자라지 않고 독성도 거의 없어진다. 남미 인디언은 화살 독으로 큐라레를 사용했다. 방기과의 수지상 흑색 덩어리인데 약물로 개발돼 골격근 이완제와 전신 마취제의 보조제로 사용된다.
부자는 그 독성으로 인해 '독의 꽃' '악마의 뿌리' '살인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골짜기를 못 건넘'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기도 했다. 서양에선 아코니틴으로 불리는데 그리스의 아코네라고 하는 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코니틴에 의해 사망했으며, 영웅 테세우스를 독살하기 위해 메디아가 사용한 약물도 이것이다.
부자는 한방에서 쓰는 가장 힘 있는 처방인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중요한 약재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양기가 부족해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에 좋은 처방이다.
조광조가 사약으로 먹은 부자나, 부자가 들어가는 팔미지황환이라는 보약 사이의 간극도 큰 것이 아니다. 똑같이 부자가 들어간다. 사약의 부자는 날것이고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부자는 '포제'라고 해서 통째로 구워 오래 숙성한 것이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의 평가도 부자와 닮은 측면이 있다.
"조광조의 타고난 성질은 신실하고 아름다우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에서 시행한 것이 사리에 지나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어 마침내 일이 실패했다. 만약에 학문이 충실하고 덕성과 재능이 성취된 이후에 정사를 담당하였으면 어디까지 갔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