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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철학 입문서' 추천해 달라고요? 기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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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철학 입문서' 추천해 달라고요? 기준은…

1.

1926년에 나온 이래 아마도 교양철학서 분야의 최장기 스테디셀러이리라 짐작되는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정영목 옮김, 봄날의책 펴냄)는 한국에서도 그동안 여러 번역본들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전에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에 얽힌 내 기억은 8년 전쯤의 짧은 에피소드 하나뿐이다. 종로 교보문고에서였는데, 한 노인이 이 책을 찾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바로 옆에 서 있던 내가 책 찾는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마침내 책을 손에 쥐고 고마움을 표하던 노인은 한참이나 어린 내게 공손한 말투로 "선생님께서는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이것을 시작으로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저는 올해 칠십인데, 뒤늦게 법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이 책에 볼테르를 다룬 부분이 있다고 해서요."
"네, 여기 있네요."
"볼테르가 그런 말을 했었지요?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
"네, 그렇게 들은 것 같습니다."
"요새 강정구 교수 문제로 시끄럽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강정구 교수 사건을 보다가 볼테르의 말이 생각나서 좀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네에."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만진 유일한 때였다. 그리고 이제 새 번역본이 나온 지금에서야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마침 '좋은 철학 입문서란 어떤 책일까?'라는 물음을 가끔 떠올려보곤 하던 때였다.

2.

너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철학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아주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좀 난처하다. 직접 읽어본 책을 권해줘야 할 텐데, '교양철학서'에 속하는 책들을 잘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철학과에서 철학을 배웠더라면 흔히 그렇듯이 1학년 때 이런저런 책들을 추천받아 읽어봤을 법도 한데 그러지 못했다.

대학 졸업반쯤에서야 철학이라는 걸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선배에게 어떤 책을 보는 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짧았다. "플라톤부터 읽어야지." 그래서 <변론>, <크리톤>, <에우튀프론>, <파이돈>, <향연>을 차례로 읽었고 이것들이 내 철학 입문서가 되었다. 선배들과 함께 읽고, 혼자 읽고, 글로 정리해보고 하기를 2년쯤 하고 났더니 혼자서 <국가>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데카르트의 <성찰>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지식한 선배 덕에 나는 교양철학서를 읽는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고전에 몸을 담갔던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자기 경험대로 남에게 권할 수 있을 뿐이니 나도 누가 물을 때마다 고전을 읽으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 좋기야 하겠지만 혼자서 도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고전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매개자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직접 안내해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역시 책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책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이것은 공연한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고전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책이 요즘처럼 넘쳐나는 때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개의 책들은 독자를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저자를 위한 책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가벼운 글재주나 재기만으로 독자에게 아부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좋은 교양철학서란 어떤 책일까?

3.
▲ <철학 이야기>(윌 듀런트 지음, 정영목 옮김, 봄날의책 펴냄). ⓒ봄날의책
이런 물음을 품은 상태에서 <철학 이야기>를 받아들었다. 11개의 장에서 각각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현대 유럽 철학자들(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현대 미국 철학자들(산타야나, 제임스, 듀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해설하는 평범한 형식이니 첫인상이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점에서 좋은 교양철학서의 견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대번에 알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제목 그대로 '이야기'라는 것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30대의 듀런트가 노동자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강의를 했는데, 한 출판업자가 우연히 플라톤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출판을 제의한 것이 이 책이 탄생한 계기라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은 저자가 책상에 앉아 혼자 쓴 책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것도 철학도들이 아닌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듀런트의 문장에는 생기가 돈다. 출판업자가 반한 것이 이해될 만한 유머와 통찰은 큰 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아부하지는 않는다. 듀런트는 어려운 이야기를 일부러 피해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철학자들의 책의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반드시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런 대목에서는 엄숙한 강의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2판 서문을 보면 실제로 이 책이 출간된 후에 고전 판매가 200퍼센트 늘었다니 듀런트의 권유는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철학도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사실 철학고전을 읽을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용어의 난해함도, 논리의 복잡함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죽은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불안 섞인 의문이다. 듀런트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책들이 비인격적인 논리의 집적물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는 이 책들이 어떤 의미에서 시대의 산물이며 철학자 본인의 인간적 고투의 산물인지를 이야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로 하여금 지식체계의 창안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을 인간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17쪽) 그래서 나는 듀런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철학자들의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철학이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 그것은 내게는 작은 위로였다.

4.

옮긴이는 이렇게 썼다.

"듀런트가 이 '이야기'를 쓰면서 노린 것은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어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불가해한 학문으로 전락한 철학을 그 상아탑에서 끌어내, 현실을 해석하고 또 때로는 바꿀 수도 있는 생각의 무기로 다시 다듬어내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철학에 현실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지적인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용할 양식으로 삼게 하자는 것이었다."(7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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