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끌어내려면 사고 실험을 위해 상정된 가상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등학생들도 잘 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그것인데, 이 상태에서 인간 개체는 어떠한 공동체나 결사로부터 연대, 우애 그리고 사랑도 누릴 수 없다. (<스타크래프트>에서 덜렁 홀로 남은 마린이라고나 할까?) 이 가상 전쟁의 상태에서는 오직 살아남고자 하는 개체들의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모두의 전쟁이 일반화된 상태에서 나만 착한 마음을 품는 것은 나의 생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삶은 불안과 공포의 연속일 것이고, 미래에 대한 계획은 사치에 불과하다. 요컨대, 하루하루의 생존을 넘어선 발전, 개선, 상승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 <리바이어던>(토마스 홉스 지음, 신재일 엮어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
이러한 리바이어던의 논리에 반기를 든 인물 둘을 대라면, 아마도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로 (적어도 경제라는 영역에서는) 리바이어던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역설했던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꼽을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발상을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의 영역에서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불안과 공포 대신 모두의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홉스와 스미스 양자 모두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은 공통의 규칙 따위는 없는 무법천지의 세상이고 스미스의 시장은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화적‧제도적 기반과 기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은 커다란 차이다. 어쨌든 스미스의 세계에서 이기심이라는 위험한 동기를 공동의 선으로 바꾸는 '보이지 않는 손'은 다름 아닌 시장이다. 경제학에 대한 모든 갑론을박이 샘솟는 원천이 여기이니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이쯤에서 접도록 하자.
그런데 왜 다른 한 명이 다윈일까? 이제는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살아남은 것이 강하다"라는 생존 원리의 가장 오묘한 귀결의 하나는 서로 싸워 마땅한 존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창발적인 협력이다.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김관선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다윈 자신이 역설하기도 했지만, 생명 현상 그 자체가 가장 고차원적인 협력의 산물이다. 그냥 두었다면 한쪽을 절멸할 때까지 싸우는 게 논리적으로 당연해보이지면, 진화의 역사는 그 반대를 실증해왔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자신의 상호부조론의 기둥으로 다윈과 진화론을 끌어들인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요컨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은 진화의 시각에서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협력에 근거한 진화를 거듭해온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의 생래적인 성향 속에 협력과 공감의 능력이 들어 있다는 것 역시 당연히 추론할 수 있다. 살아남은 존재들은 극한의 이기심을 지녔고 후대로 내려오며 이를 갈고 닦은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을 조절하고 성공적으로 협력해온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 <펭귄과 리바이어던>(요차이 벤클러 지음, 이현주 옮김, 반비 펴냄). ⓒ반비 |
어쨌든, 벤클러는 넓은 의미에서 '이기심'의 리바이이던이 지배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으며 그 대안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설파한다. 그 조짐은 역설적이게도 이기심의 총아인 자본주의 기업에서 먼저 관찰되었다. 협업을 미덕으로 삼은 일본의 도요타는 세계 공장의 모범이 되었으며, 놀이터 같은 일터인 구글을 지배하는 것은 자율과 창의 그리고 비공식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다. 한발 더 나아가 위키피디아와 같은 자발성에 기댄 "대중의 지혜"는 엘리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생산해 낸 브리태니커를 짧은 시간에 제압했다. 이 모든 협력의 시대를 가속화하는 지렛대 인터넷을 움직이는 핵심 기술은 공개 소프트웨어 리눅스다. 이렇게 리눅스의 상징인 펭귄이 리바이어던의 대척점에서 리바이어던 (그리고 시장)에 의지한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벤클러의 웅변에 크게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설득력도 충분하고 펭귄의 시대를 뒷받침하려는 지적 노고 역시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비슷한 이야기들은 철학과 모습을 바꿔가며 이미 여러 번 등장하지 않았던가? 크리스 앤더슨('롱테일'과 '프리코노믹스' 이론의 창시자)에게서는 거래비용의 감소가 어떻게 작은 것을 복되게 했는지를 들었고, 위키노믹스를 주창한 돈 탭스코트는 위키피디아를 새로운 시대의 경제 모델로 격상시켜 집단 지성을 찬미한 바 있다.
요차이 벤클러의 <펭귄과 리바이어던>이 흥미로운 대목이라면 리바이어던의 대항마 '펭귄'을 상당한 부분에서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정당화에 동원되는 것은 당연히 최근 이기적 유전자의 냉혹한 얼굴에서 협력의 전도사로 변신중인 (어떤) 진화생물학, 우리의 마음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설파하는 인지 심리학, 그리고 게임이론의 논리적 귀결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며 인간의 전략적 행동을 지배하는 다양한 동기에 대해 탐사하는 행동 게임이론 등이다.
우선 방법론적으로 봤을 때 가장 줄을 잘못 세운 것은, 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는 인센티브에만 근거한 경제학의 과오들이다. 사실 인센티브라는 도구 역시 사고 실험경제학자들은 모델링이라고 부른다으로 도입된 것이며, 덕분에 경제학은 사회과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깔끔한 방법론을 지닐 수 있었다.(누군가는 잃은 것이 더 크다고 반기를 들지라도 말이다.)
▲ 리눅스의 마스코트 펭귄 'TUX' ⓒLarry Ewing |
책에서 주장하듯 냉혹하게 인센티브-중심의 시스템은 사실 현실에서 흔히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넓은 제도의 차원에서 인센티브와 비(非)인센티브에 뿌리를 둔 시스템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 역사와 운용에서 둘은 당연히 섞일 수밖에 없다. 벤클러가 인용하고 있는 연구들의 상당 부분이 (주류) 경제학의 성취물들이며, 그 저자들 역시 스스로 자신의 연구를 인센티브와 대척점에 두려 하지 않는다. 사실 주류 경제학이 아주 강한 형태의 이기심에 기반을 둔 모형 외부를 탐색한지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으며, 이제 그 성과들은 "행동 경제학", "행태 게임이론" 등을 통해 견고하게 한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학의 현 상태가 이러한데, 인센티브에 기반을 둔 시스템을 뒤늦게 때리는 것은 아마도 낡은 허수아비에게 너무 힘주어 검을 휘두르는 격이 아닐까? 공동체가 공유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연구하여 이기심의 인센티브가 낳은 냉혹한 결론("공유지의 비극")에 가장 큰 타격을 입한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협력에 기반을 둔 시스템은 익명의 시장에서는 얻기 힘든 가까운 공동체를 통해 획득 가능한 세밀한 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과거라면 공동체로 묶이지 못했을 사람들의 무리가 인터넷을 필두로 하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공동체로 묶이면서 창발할 수 있었다. 책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공유 경제(Share Economy)"라는 이름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그 영역 또한 불과 몇 년 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공동주거, 금융거래, 교통수단까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협력-중심 시스템을 보다 잘 유지하고 이것이 붕괴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더 높은 수준의 협력일까? (혹은 인간 개조?)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공공재 게임"의 여러 사례는 사람들 사이에 이타적이고 협력하려는 모티브가 있더라도 그것이 소수의 파괴자들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공 화장실이 더러운 이유는 사람들이 (순전히 1차적인 의미에서) 계산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미 누군가가 더럽혀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랬다면 나만 그럴 이유가 없기도 하고, 어쩌면 내 앞이나 뒤에 올 잠재적 배신자에 대한 심리적 응징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 널린 공공재 게임이 더러운 '공중화장실'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경제학의 "기제 설계(Mechanism Design)"는 이에 대해서 이미 상당히 세밀하고 다양한 연구를 축적하고 있다. 이렇듯 인센티브 중심의 연구가 협력 중심의 시스템을 보존하는 데 크게 소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차이 벤클러가 웅변하는 바, 시장과 리바이어던의 비생산적인 무한 셔틀을 벗어날 펭귄들의 또 다른 길은 이미 윤곽이 드러난 듯도 하다. 하지만 그 길 앞에 놓인 과제와 장애물 역시 만만치 않다면, 시장과 리바이어던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되 치열한 고민을 놓지 않았던 오래된 지혜가 그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인센티브에 엄밀한 모델만을 따졌던 경제학이 다니엘 카너먼의 심리학적 통찰을 받아 들여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유연한 분야를 낳은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이 책이 말하듯 펭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 그 시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다시 리바이어던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지적 유연성과 개방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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