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에드워드 T. 콘 지음, 김정진 옮김, 앨피 펴냄). ⓒ앨피 |
영화 <대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교차편집이 멋지다고 해서 그 장면을 감탄만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왜 그 장면에서 교차편집이 이용되었는가, 이 교차편집의 상승 효과는 영화 전체를 어떤 방식으로 상징하는가 등의 질문은 <대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만든다. 또한 그 장치들에 대한 이해는 등장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도움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안으로 한 발 더 들어올 수 있게끔 한다. 관객이 영화에 감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지향점과 방법론을 이해함으로써, 즉 '던진 공을 박수치며 쳐다보는 대신에 달려가 받음'으로써 캐치볼-영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공 받기'는 창작자 외에 그 작품에 관련된 모든 이들, 심지어 유료로 감동을 소비하려는 감상자들에게도 지적 성실성을 요구한다. 편의상 이런 관점으로 음악 또는 예술 작품을 대하는 자세를 지성주의라고 하자. 음악학자이자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에드워드 T. 콘이 쓴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는 바로 음악 감상의 지성주의를 권유하는 책이다. 원서의 제목 'The Composer's Voice'가 좀더 직관적이다.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는 지성을 이용한 음악 해석 활동을 통해 작곡가의 목소리(말하려는 것)을 들음으로써 그 음악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여기에는 오해가 없어야 한다. 저자는 "나는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적 문맥과 동떨어진 '순수한' 음악적 문맥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마치 음악적 지성의 총체처럼 떠받들어지는 텍스트-악보 지상주의에 반대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에서 텍스트의 기계적인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텍스트의 '신성화'는 저자가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반대하는 개념이다. 신성화된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의 도취적 기능을 거부하는 일종의 제례 음악이고, 제례 음악은 신(또는 그에 상응하는 절대적 기준)을 향하기 때문에 연주자 또는 감상자가 텍스트로부터 '일탈'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T. 콘은 이렇게 고착화된, 그릇된 숭배 속에서는 아무리 명곡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가운데 고갈되어 버린다고 경고한다. 질려버리는 것이다. 에드워드 T. 콘은 이러한 신성화(화석화라고 해도 좋겠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지성을 요구한다. 연주자 또는 감상자로 하여금 작곡가가 그 곡에 심어놓은 페르소나를 발견하고 그 페르소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카니발, 가면무도회, 샤머니즘적인 축제-제례의 세계로 떠나자고 반복해 부추긴다.
'페르소나persona'란 무엇인가? 한 개인이 대외적으로 쓴 가면, 외적인 인격이다. '음악적 페르소나'는 작곡가와 연주자, 악기, 청취자 등 음악을 이루는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에 주어진 상상적인 역할 또는 의인화된 인격이다.
이 음악적 페르소나와 연주자·청중을 잇는 일체감이란, 기교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신비하거나 불가사의한 느낌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일체감은 정당한 연주와 지적인 청취에서 나오는, 근거가 확실한 구체적인 태도이다. 자기만의 사고 행로를 따라 상상 속에서 작품의 전개 과정을 주의 깊게 따르고, 음악의 속도와 흐름에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맞춰 음악의 활기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17~18쪽)
20세기의 음악이론가이자 유명한 비올라 연주자인 파울 힌데미트 역시 같은 점을 강조한다. "귓전에 펼쳐지는 음악 구조를 청취하는 동안, (청취자는) 음악적 구조와 나란히 그리고 동시에 이를 거울 이미지로 병행하여 정신적으로 구성한다." (23쪽)
따라서 음악적 페르소나를 '착용하고 우리 자신이 페르소나가 되기' 위해서는 곡의 구조와 그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 지성은 음악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쓰이는 게 아니다. 질문을 발견하고 해답을 구하고자 그 안으로 뛰어들어 몸부림치면서 곡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다.
이러한 탐색 작업은 심지어 그 곡을 작곡한 작곡가 자신조차 예외일 수 없다. 이는 음악적 페르소나가 작곡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곡가의 바깥에서 독립된 존재로, 타자로,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는 수수께끼를 품은 주체적인 존재로 태어난다는 증거인 셈이다.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는 작곡가와 그가 작곡한 곡이 서로 대면하고 대화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제공한다. 바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유명한 마지막 악장 이야기다.
<합창>의 피날레인 4악장 '환희의 송가'에 쓰인 가사는 독일의 대시인 F.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이다. 3악장까지 이어진 주제와 형식상의 즉흥적인 우유부단함 혹은 혼란이 마지막 4악장에 이르러서도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자, 급기야 베토벤은 공표한다. "O Freunde, nicht diese TÖne!(친구여, 이 곡조보다 더한 것 없으리!)" 이는 베토벤이 직접 붙인 가사이다. 복수 명사인 'Freunde'는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작곡자가 아닌 오케스트라(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가상의 대행자)임을 보여준다.
그 시점까지 음악의 진행을 책임진 것은 베토벤이 아닌 그들(친구들freunde)이다. 어쩌면 오케스트라 연주 파트를 열고 마무리짓는 비범한 불협화음은 오케스트라가 아직 페르소나의 지배를 완전히 받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낮게 웅얼거리는 현악(첼로)의 레치타티보는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찾을 때까지 주제를 하나씩 상기시키며 음악을 통제하려는 페르소나를 대표한다. 결국 혼란의 회귀에 소스라치게 놀란 레치타티보의 가상 대행자는, 자아를 초월하고 실제 등장인물로 전환하여 갑자기 인간의 목소리가 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피날레에 등장하는 유일한 극은, 작곡가의 개인적 투쟁의 표현이 아니라 이처럼 상징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37~38쪽)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다. 신의 절대성에 맞선 휴머니즘의 승리 운운하며 시민적 의식과 민주주의 체제를 들먹이는 흔한 이야기들과는 다른 시선이다. 에드워드 T. 콘이 보는 <합창>은 음악적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들을 잡아내 조합하는 작곡가 사이의 논쟁이며, 다른 무엇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음악을 위한 음악'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합창>이 찬양하는 외부의 존재란 게 있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구조주의 정도일 것이다. 계파를 막론하고 온갖 정치적 행사에 끌려 다니는 건 물론이요, '올해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송년회 레퍼토리로까지 끊임없이 호출당하는 (그럼으로써 페르소나를 말살당하고 제례 음악으로 변질되는) <합창> 공연들을 생각하면 저 발췌 부분은 마치 꿈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렇듯 좋은 예술-음악은 작곡된 어떤 곡의 페르소나 안에 작곡자와 연주자, 그리고 감상자가 모여 내집단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페르소나의 형식적 요소를 두고 일종의 토론을 벌임으로써 비로소 기능한다. 이 기능은 여러 방식의 결과를 제공한다. 질문과 긴장이 나중에 절묘한 형태로 재구성된 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만나거나(수많은 교향곡과 소나타들), 질문 자체를 반복하며 아름다운 무한의 타래를 만들어 내거나(종결된 상태에서도 반복이 멈추지 않는 푸가들), 아니면 질문에 잠식당해 침몰하면서 세계에 대한 일종의 시적 은유로 작용한다(광시곡들, 환상곡들, 거의 모든 슈만의 실내 기악곡들).
물론 이러한 여러 종류의 결과는 확정적이지 않고(확정적이지 않아야 한다!) 각각의 연주자 또는 감상자의 내면과 음악적 페르소나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생한다. 페르소나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답변자라는 변수의 무작위성으로 인해 대단히 다양한 결과를 발생시킨다. 작곡가는 그 곡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연주자는 그 페르소나를 직접 착용하고 소리로 실체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감상자 역시 거기에 동참할 수 있다. 연주자가 내뿜는 소리와 함께 연주자의 제스처와 표정 등을 깊게 관찰하고 거기에 동일시하는 감각적 동일시가 한 가지 방법이며, 작곡자와 연주자의 페르소나 반응이 어째서 이런 결과물을 창조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함으로써 페르소나 해석의 내집단에 참여하는 방식이 두 번째 방법이다. 감각과 지성을 모두 열렬한 상태로 두기.
▲ 글렌 굴드의 |
글렌 굴드의 바흐 인벤션과 신포니아 앨범을 예로 들 수 있다. 교묘할 정도로 뛰어나게 피아노 음색을 조절하는 피아니스트가 일부러 남겨놓은 스튜디오 소음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문 여닫는 소리와 의자 소리 등 잡음들이 일부러라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잡음들은 감상자의 주의를 각성시키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게 만든다. 천하의 스튜디오 오타쿠가 왜 이 앨범에 유독 소음을 남겨 두었는가?
위와 같은 방식이야말로, 같은 곡을 계속 들으면서도 그 곡을 화석화를 방지하기 위해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가 추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는 또한 서커스 연주 쇼와 '음악적인 음악 연주'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음악을 텍스트의 한 종류로 읽어냄으로써 시험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해석과 이해를 요구하는 세계 자체가 확장되는 보너스까지 주어진다. 본 혜택보다 더 큰 보너스 같기도 하다.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는 이렇게 페르소나에 대한 논의를 전반적으로 마친 뒤, 중후반부에 들어서면 음악적 페르소나를 도구 삼아 몇몇 곡을 분석하고 음악계의 현실을 살피는 데 주력한다. 이 점이 좋다면 좋고 아쉽다면 아쉽다. 만약 한 권 분량의 페르소나론이었다면 보다 엄밀하거나 깊은 사고를 발견할 수 있었겠으나, 페르소나 자체에 대한 논의는 초중반부와 맨 뒤의 결론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 분량이나 논지의 전개 면에서 다소 추상적인 표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약점이 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정도의 페르소나론만으로도 특히 음악 감상자들이 좌우명 삼기 좋은 유용한 도구로 기능하겠지만, 선명한 이론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대신에 건질 만한 곡 해석이나 페르소나의 응용 사례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주어진다. 일례로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 온 분들 중에는 중간에 이런 의문이 생긴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흐의 제례 음악들을 '예술적으로' 공연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저자는 칸타타의 형식과 코랄의 역할 등을 얘기하면서 때로 제례였던 것들이 어떻게 예술 속으로 편입되는지도 언급한다. 슈베르트의 <마왕>을 통해서는 가곡 속에서 작곡가의 페르소나와 성악가의 페르소나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를 동시에 목격하는 감상자의 혼란과 그 혼란의 매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구성은 일관적이지 않으나 여러 응용 사례를 만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즐거운 경험이다.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사실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의 가장 큰 문제는 내용보다는 디자인이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내용에 만족한 지금도 이 책의 격렬한 표지 디자인이나 뒤표지의 강렬한 문구('고급한 음악적 감성을 장착할 超절호 기회') 등을 보면 어쩐지 심란해진다. 심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서가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책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책의 교훈을 받들어 눈 딱 감고 이 책의 텍스트 안으로 한번 들어와 보시면, 이게 쏠쏠하고 즐겁다.
방금 든 생각인데, 그렇다면 혹시 이 표지는 책의 내용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표지 안에 내재된 텍스트의 매력을 반증하는 '표면'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음, 그래,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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