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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친일파 청산, 그의 용기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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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친일파 청산, 그의 용기에서 시작됐다

[철학자의 서재] 정운현의 <임종국 평전>

웃음이 고통을 이기다

책 표지에서 임종국 선생의 얼굴이 웃는다. 장맛비 내린 뒤 방긋 웃는 해처럼 밝게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는다. 개구쟁이같이 웃는 그이기에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친일문학론>을 쓸 수 있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서 너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면, 연자 맷돌에 온 몸이 갈리더라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임종국 평전> 456쪽)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삶은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서재를 뜨지 않았다.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친일문학론> 쓰기를 고집했는가?

▲ <임종국 평전>(정운현 지음,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한 일본군 병사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순간 그 일본군 병사는 마치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꼭 20년 후에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

회담이 타결되기도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 제2의 송병준이, 제2의 박춘금이가 얼마든지 또 생겨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237~238쪽)

부끄러워해야할 지식인

▲ <친일문학론>(임종국 지음, 민족문제연구소 펴냄). ⓒ민족문제연구소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을 내면 많이 팔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식인 사회에서 치열한 논쟁도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출판사부터 이런 책 내기를 꺼렸다. 선숙의 증언에 따르면, 평화출판사 이전에 몇몇 출판사에 출판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고대 동문인 신일철, 민영빈 등은 "나중에 안 좋다"며 책 출간을 말리기도 했다.

어렵사리 낸 책도 시장에서 외면 받았다. 평화출판사 허창선 사장은 <친일문학론>을 이 세상에 낸 사람이다.

"허 사장은 초판 1000부를 찍으려다 500부를 더 얹어 1500부를 찍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허사장의 예측이 맞았다. 초판 1500부를 소화하는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1979년 10.26이 난 뒤에 가서야 겨우 재판을 찍었다. 하나 놀랍게도 초판 1500부 가운데 500부는 국내에서 소화되고 나머지 1000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허 사장은 전했다." (253~254쪽)

<친일문학론>에서 거론된 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발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단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을 실명으로 비판하고 나섰으니 상식적으로 본다면 언론도 대서특필하고 또 당사자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명예훼손이니 어쩌니 난리법석을 피웠을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모두 빗나갔다. 마치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언론도, 문단도 모두 의외로 조용했다.(물론 전연 보도가 안 된 건 아니다. 다만 비중이나 관심도가 낮았다는 얘기다)."(255~256쪽)

<친일문학론>이 많이 팔리지 않자 임종국 선생은 크게 실망한다. 지식인 사회의 무반응이 그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혼, 힘겨운 밥벌이 등이 그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다. 사진은 많은 것을 말한다. <임종국 평전> 452쪽 사진은 선생의 삶이 힘들었음을 잘 말해준다. 이 책을 쓴 정운현은 그 사진 밑에 이렇게 썼다. "죽어서는 '바람'이 되고자 했던 종국, 요산재 옆 눈밭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꺾이지 않는 기상을 유지했다. 이 기상은 자기 아버지의 친일 경력까지 책에 거론하는 꼿꼿함으로 이어졌다.

"끝으로 종국이 부친 임문호의 친일 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싣게 된 경위를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 경화의 증언이 있다(순화도 같은 증언을 했다).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 '아버지! 친일 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 (366쪽)

임종국 선생 도우미

백기완 선생은 감옥에서 <친일문학론>을 퍼뜨린 사람이다. 그는 "한국의 진보는 임종국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임종국 선생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임종국 선생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지난 1984년 한길사에서 펴낸 <분단을 넘어서>에서 "임종국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이 분이 펴낸 <친일문학론>은 앞으로 세워질 독립기념관의 현관, 제일 눈에 띄는 위치에 진열될 만한 가치가 있다."(294쪽)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개관됐기 때문에 리영희의 이 문장은 미래시제로 되어있다.)

임종국 선생이 어려움 속에서도 친일파 청산에 나섰기 때문에 이 땅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올 수 있었다. 비록 국회의원을 지낸 친일파 후손들이 친일인명사전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이 땅에는 깨어있는 민주시민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네티즌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2004년 1월 8일 오후에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제작비 국민 모금은 만 4일이 채 지나지 않은 12일 오전 11시 30분 이미 1억 원을 넘어섰다. (…) 이번 캠페인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정운현 칼럼 '다떨어진 헌 고무신짝을 부여잡고' 아래 독자의견으로 붙은 '참세상(kimhr)'이란 네티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을 모읍시다'라는 글이 도화선이 됐다." (홍성식, <오마이뉴스> 2004년 1월 12일)

이 캠페인은 시작된 지 열하루 만에 5억 원의 사업비를 민족문제연구소에 안겼다. 최종적으로 7억 원이 모금되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송재소 지음, 한길사 펴냄) 147쪽)


호방하고도 섬세한 시인 임제(林悌)가 황진이의 묘 앞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쓴 이 시조는 그의 직계 자손인 임종국(林鍾國)의 죽음에도 애도의 마음을 담는 듯하다.

나도 시간 내서 <임종국 평전>을 한 권 들고 임종국 선생 묘소에 한 번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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