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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배신자'에 맞서 총을 든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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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배신자'에 맞서 총을 든 빅토르 위고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나폴레옹 이야기 ④

1948년 2월 루이 필립 왕이 물러나 프랑스 제2공화국이 출범했으나 당시의 프랑스인 대다수가 공화정을 꼭 원한 것은 아니었다. 50년 전 제1공화국의 기억은 공포와 혼란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1815~1830년간의 반동적인 부르봉 치세도 1830~1848년의 중도적인 루이 필립 치세도 실패로 돌아간 이제 공화정만이 대안으로 남아있었다.

혼란이 되풀이될 조짐은 곧 나타났다. 권력의 공백을 틈타 사회주의자들이 '일할 권리'를 내세워 강행한 국민작업장 제도가 경제 파탄과 사회 혼란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질서당이 6월과 9월의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다. 질서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제정해 11월 4일 반포한 헌법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규정한 것이었다. 이 헌법이 독재를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며 반대에 앞장선 쥘 그레비(1807~1891년)는 나중에 그 통찰력을 인정받고 제3공화국 대통령을 지내게 된다.

질서당은 왕정주의자와 공화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월 10~11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질서당은 공식적으로 루이-외젠 카베냐크 후보를 지지했지만 왕정주의자들은 확고한 공화주의자인 카베냐크를 경원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의 반대자들은 대체로 그를 경시했다. "자기가 독수리인 줄 아는 칠면조"라고 그를 조롱한 말이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서 왕정 복고를 드러내 추진할 수 없던 왕정주의자들은 세력 기반이 약하고 정치 이념도 없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 되면 왕정 복고를 향한 징검다리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나폴레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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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나폴레옹이 일단 두각을 나타내자 대중의 열렬한 지지가 그에게 쏠렸다.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처럼 후세에 알려지지만, 파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혁명의 열의가 일부 지식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영광을 떠올려주는 '보나파르트'란 이름과 견줄 만한 무기를 다른 어느 후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 선거는 제2공화국이 루이 나폴레옹에게 차려준 밥상이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행정권을 부여하는 대신 임기를 4년 한 차례로 제한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이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속셈은 당시 사람들도 대개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다. 대통령 재임 3년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지 세력 확충에 매진한 자세에서 이 속셈이 드러난다.

보나파르트 대통령의 첫 번째 중요한 정책이었던 이탈리아 출병에서 이 자세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출병 자체가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에 대한 대중의 향수에 영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을 옹위함으로써 가톨릭 세력의 환심을 사려 했다. 당시 비오9세 교황은 주세페 마치니와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민족 운동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청년 시절(1831년) 이탈리아 민족 운동과 연계하려 한 일이 있는 루이 나폴레옹으로서는 하나의 배신이었다.

한편, 교황에게는 교황령 국가에 나폴레옹 법전을 채용하고 개혁 정책을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공화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이탈리아 민족 운동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황에게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이 모순된 태도는 국내 여러 세력에게 추파를 던지는 원칙 없는 포퓰리스트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 회에서 황제로서 루이 나폴레옹의 치세를 개관할 텐데, 그가 매우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1851년 12월의 쿠데타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그의 치적에는 그런 면모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황제 즉위를 향한 권력 강화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헌법에 따른 의회 선거가 1849년 5월 13~14일에 시행되었다. 750명의 의원을 뽑는 이 선거에서도 질서당은 400석이 넘는 과반수를 확보했다. 사회주의자와 급진 공화주의자의 좌파 연합은 약 200석으로 제2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좌파 연합 지도자들이 권력 탈취를 위한 봉기 시도에 실패하고 좌파에 대한 극렬 탄압이 시작되었다.

혁명적 요소가 제거되고 질서당 일색이 된 의회에서는 정통 보수파와 보나파르티스트 사이의 대립이 전개되었다. 왕정주의자 중심의 보수파는 선거권의 축소를 추진했다. 국민 주권 이념의 핵심인 보통 선거권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수파는 "3년 이상 거주" 조건을 붙임으로써 900만 명 유권자 중 약 350만 명을 줄이는 선거법 개정에 나섰다. 유산계층과 농촌 주민의 선거권을 보호하면서 산업 노동자와 도시 빈민층의 선거권을 위협하는 조치였다.

1850년 5월에 이뤄진 이 선거법 개정을 계기로 루이 나폴레옹은 의회를 무시-적대하는 독재 체제 구축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선거권의 수호자'를 표방하며 자신을 국민 주권의 대표자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국민 주권의 원래 제창자인 좌파를 탄압으로 배제해 놓고 보수파를 상대로 국민 주권의 옹호자 행세를 한 것이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의회의 보수파를 비난하고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정치공세가 일으킨 효과는 의회에서도 나타났다. 1850년 5월의 선거법 개정 표결은 찬성 433표에 반대 241표였다. 그러나 몇 달 후 루이 나폴레옹의 재개정 요구에 대한 표결은 찬성 348표에 반대 355표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됐다. 적지 않은 의원들이 나폴레옹의 공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1851년에 들어서자 의회의 보수파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군부와 지방 정계의 지지를 확보한 루이 나폴레옹은 보통 선거권의 회복을 넘어 의회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헌법 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루이 나폴레옹의 헌법 개정안은 1951년 7월 의회에서 찬성 446표, 반대 278표로 3분의 2 찬성에 못 미쳐 부결되었으나 보수파 최후의 보루인 의회마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다. 몇 달 후에 일으킬 친위 쿠데타를 루이 나폴레옹은 아무 조직적 저항 없이 공공연하게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1848년의 프랑스 상황을 바라보며 노령의 웰링턴 공작(1769~1862년,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후에 영국 수상을 지낸 장군, 정치가)이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지금의 프랑스는 또 하나의 나폴레옹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아직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

▲ 빅토르 위고. ⓒwikipedia.org
1851년 12월에는 또 하나의 나폴레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혁명의 열기를 막아낼 길도 없고 키워낼 길도 없는 상황이 50년 만에 되풀이되는 프랑스의 모습에 대한 한 이웃나라 지도자의 탄식으로 이해한다.

당대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년)는 루이 나폴레옹의 공화정에 대한 배신을 가장 치열하게 고발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는 <소 나폴레옹(Napoléon le Petit)>과 <어느 범죄의 역사(Histoire d'un crime)> 등 많은 기록과 작품을 통해 나폴레옹3세의 폭압적 통치를 고발했을 뿐 아니라 온 몸으로 제2제정을 거부했다.

1848년에 의회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의 가장 유력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표방한 실용적 개혁주의를 지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 강화에 나서자 반대로 돌아서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시민군 조직을 위해 거리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준비된 계엄군 앞에 시민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400명 가까운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고, 1만여 명이 체포되어 유배나 추방을 당했다.

위고는 브뤼셀로 망명했다가 노르망디 앞바다의 영국령 채널군도에 거처를 잡아 20년을 지냈다. 1859년 나폴레옹3세가 내린 사면령도 거부하고 1870년 황제 퇴위 후에야 프로이센 군에게 포위당한 파리로 돌아와 그 해 겨울의 참혹한 농성에 동참했다. 이로써 위고는 작품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는 지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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