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이미스는 영국의 풍자문학 전통을 현대 소설의 형식과 언어에 새롭게 이식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영국의 생존하는 작가 중 아마도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고의적인 악평과 비난을 가장 많이 받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1950년대 영국의 전후 세대 젊은 작가('성난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유명한 소설가(킹즐리 에이미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스물네 살에 발표한 자전적인 데뷔작 <레이첼 페이퍼스>로 (그의 아버지도 수상했던) 서머싯 몸상을 받은 마틴 에이미스는, 이후 신랄하고 적나라한 사회 풍자와 도발적이고 독특한 문체를 선보인 새로운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영국 문단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작품 외적인 사생활 스캔들과 사회 이슈에 대한 거침없는 의견 표명으로도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작품이나 인터뷰 중에 언급된 표현이 언론에 맥락 없이 인용되면서 여성 혐오, 이슬람 공포증, 노동 계층에 대한 경멸감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명사들의 이름(킹즐리 에이미스(아버지), 솔 벨로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우상), 줄리언 반스나 테리 이글턴(적대 관계), 크리스토퍼 히친스(절친), 믹 재거(닮은꼴))이 주석처럼 함께 언급되는 등, 언론이 좋아하는 이슈가 그를 늘 따라다녔다.
이런 유명세는 초기 대표작들이 일으킨 파란에 못 미치는 다소 느슨하고 미지근한 후속작들에 대해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고, 급기야 몇 년 전에는 가족과 함께 거주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완전히 옮기면서 영국을 버리고 미국을 택한 변절자로 언론에 매도되기도 했다.
타블로이드의 가십 거리로 전락하기 일쑤인 사생활 노출이나 여과되지 않는 솔직한 의견 표명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작가 자신의 성정 탓도 있지만, 그의 작품 자체가 현대 사회와 동시대인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노골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풍자를 표명하는 상황에서 그 풍자의 대상 혹은 주체가 되는 대중이나 평단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 듯하다. 게다가 호평이나 혹평이나 일관되게 합의를 보는 지점이 "일단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은 재밌다"이니, 이 정도 화제와 논란은 당대 풍자작가로서의 입지를 오히려 굳히는 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 문제에 대해 자신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려는 소설가의 열망이 때로는 영웅적이고 때로는 돈키호테적인 무모함으로 받아들여져 다소 요란한 파문을 일으키는 고전적인 사례랄까.
▲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마틴 에이미스 지음, 허진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런던 교외에 있는 가상의 슬럼가 '디스톤'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사실 원제("라이오넬 애즈보 – 영국의 현 상태")부터 영국 평단의 비난 화살이 날아와 꽂힐 과녁을 작가 스스로 미리 마련해둔 듯 위태롭기 짝이 없다. 특히 다소 생뚱맞아 보일 정도로 거창한 부제 붙이기를 좋아하는 마틴 에이미스가 이번 작품에 붙인 "영국의 현 상태(State of England)"라는 부제는, 영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변절 작가라는 오해의 꼬리표가 아직 완전히 떼어지지 않은 상황을 고려하면, 마치 "I ♥ NY" 티셔츠를 입고 유니온 잭에 삿대질하는 것에 맞먹는 도발적인 제스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라이오넬 애즈보의 '애즈보(ASBO)'는 1998년부터 영국 정부가 청소년들의 풍기문란과 비행을 단속하는 취지에서 내린 '반사회적행동금지명령'의 약자로, 제목과 부제만 놓고 보자면 영국의 현 상태를 한낱 청소년의 비행 정도로 비하하는 인상을 준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워낙 "신선한 불쾌함"을 던져주는 작가로 유명하기에 작품의 제목 자체는 에이미스 특유의 도발적인 블랙유머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정작 문제는 영국 사회에 대한 불쾌한 풍자임을 제목에서부터 표방한 소설이 그리는 세계가 그에 걸맞은 규모와 야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평단의 비판은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라이오넬 애즈보의 초상이 최소한의 리얼리티를 가진 있을 법한 인간이 아닌, 세상의 온갖 악과 불의를 모아놓은 듯한 캐리커처에 가깝게 그려진다는 점, 그리고 거창한 부제에 어울리는 문제의식의 규모나 서사의 야심을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 데다, 작가가 그나마 재능을 발휘해 풍자하는 시대상의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점에 주로 초점이 모인다(2013년까지 포함하는 소설의 시공간에서 십대 주인공이 휴대폰을 쓰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든지, 영국에서는 병 우유가 배달되지 않은지 이미 오래됐다든지, 라이오넬이 연루된 범죄와 관련된 죄명과 처벌의 법률용어가 죄다 틀렸다든지 하는 세부적인 정황 오류를 주로 지적하며 작가가 영국의 현 상황을 진단할 자격이 되는지 반문하는 리뷰가 대부분이다).
대개 이런 비판에는 1949년생으로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마틴 에이미스가 자신이 현재 더 잘 쓸 수 있는 소재를 새롭게 발굴하지 않고, 예전의 파란으로 여겨졌던 대표작의 반복과 변주로 퇴행하고 있다는 단정이 곁들여지곤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마틴 에이미스 특유의 재기 넘치는 필력과 능숙한 솜씨로 조율하는 다채로운 언어 층위(비속어, 신조어, 유행어, 타블로이드 가십 기사의 문체, 포르노그래피적인 표현, 법정 용어)의 패스티시조차 "필레미뇽으로 만든 빅 맥"이라는 빈정거림의 소재가 될 뿐이다.
느슨하고 무뎌진 풍자 대신에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마틴 에이미스의 주인공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꾸준한 도덕적, 교육적 성장을 보이는 라이오넬의 조카인 혼혈아 데스먼드 페퍼다인(데스)의 성장담이다. 소설 전체의 무게 중심은 명백히 악인 라이오넬이 아니라, 그의 선한 조카 데스에게 있다. 즉 이 소설은 마틴 에이미스의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꾸준히 성장해가는 플롯을 가진 셈이다.
애즈보가 하류층의 혐오스러운 속됨과 악함이 농축된 캐릭터라면, 조카 데스는 마치 뒤바뀐 아이처럼 신기할 정도로 그 독에 전염되지 않고, 교육을 갈구하고 정직한 직업을 구해 모범적인 일부일처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데스 역시 디스톤에 태어난 원죄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물로, 이 소설의 1장은 근친상간, 그것도 자신의 외할머니(조기 출산율이 높은 디스톤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첫 애를 낳았기에 손자와 근친상간을 할 당시 나이가 39살밖에 되지 않는)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십대 소년 데스가 타블로이드 신문의 성 상담 코너에 보낼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데스가 고민하는 건 양심의 가책이나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삼촌 라이오넬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소설 전체의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데스가 성장해가면서 점점 크게 느끼게 되는 원죄의 무게는 그를 도덕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사생아인 자신을 키워준 반(反) 아버지인 삼촌에게 느끼는 애증과 두려움은 라이오넬 애즈보로 상징되는 폭력과 악으로부터의 거리를 유지하며 악이 발동하는 기제를 관찰하게 하는 심리적 저지선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데스가 심리적, 도덕적 부채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된 어른으로 성장하는 소설의 결론에 이르면, 라이오넬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순수한 악조차 데스를 원죄로부터 구원해주는 대속적인 기능을 떠맡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반면, 감옥에서 탈취한 복권이 당첨되며 인생역전을 이루게 되는 라이오넬 애즈보는 자신의 악행을 뉘우칠 계기도, 고백록의 화자가 되어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돈과 향락이 지배하는 속물들의 세계에, 타블로이드의 헤드라인과 TV 리얼리티 쇼의 입맛에 맞게 연기하며 살아가는 소극(笑劇)이나 보드빌 같은 삶 속에 던져진다. 그는 결국 애증과 복수의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친과 조카에게도 악한의 논리에 따른 불의를 행하고 만다.
사실 마틴 에이미스의 세계에서 라이오넬 애즈보 같은 순수한 악인이나 데스먼트 페퍼다인처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성장을 완수하는 인물은 다른 세계에서 방문한 듯한 낯선 캐릭터들이다(출간 직후에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마틴 에이미스는 데스먼드 페퍼다인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이 이제까지 그 어느 캐릭터보다도 힘들었다고 한다). 이 인물들과 디스턴이라는 시공간을 애정을 가지고 묘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3인칭 서술자의 어조 또한 특이해서, 아이러니한 억양과 이야기꾼의 구어적인 리듬이 살아있는 전통적인 유럽 풍자 소설의 서술자에 오히려 더 가깝다(나보코프는 제인 오스틴의 서술자 특유의 아이러니 기법과 풍자적 문체를 '나이트의 행보(체스 말 중 유일하게 삼차원 이동이 가능한 나이트처럼 의외의 심리적 전환이나 서정적 일탈을 가져오는 기법)'와 '특수 보조개(평범한 정보 나열 속에 아이러니한 문맥을 심는 문체)'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는데, 이 설명은 이 소설의 서술자에게도 무리 없이 적용될 것이다).
마틴 에이미스는 소설 출간 후 인터뷰에서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에서 디킨즈적인 인물 구성과 줄거리를 차용한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디킨즈는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보드빌 작가에 가까우며 현대의 장르 중 디킨즈 소설과 가장 가까운 장르는 디즈니 카툰일 것이라는 의견을 표한 바 있다. 제인 오스틴과 디킨즈의 공통점은 이들이 그려내는 풍자의 세계가 현실을 반영하고 풍자하는 한편, 독자적인 논리와 리얼리티를 가진 일종의 동화(fairy tale)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탤릭체와 느낌표들의 세상"인 런던 교외의 가상 마을 디스톤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체스판의 흑백 말처럼 선악으로 선명하게 대립하는 라이오넬 애즈보와 데스먼드 페퍼다인이라는 두 캐릭터의 얽히고 엇갈리는 '운명의 팬터마임'을 작동하는 기제 역시 동화의 그것과 흡사하다.
가령 이 인물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줄거리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는 모티프부터가 지극히 동화적인 요소, 즉 우연히 손에 넣은 복권 한 장이나 동화 속의 불길한 요술 상자 같은 물건(뚜껑이 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대형 쓰레기통)이 발휘한 의외의 기적이다. 또한,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각 부 마지막 장은 "별로 특이한 일이 없었다"는 표현 다음에 디스턴이나 디스턴 사람들에게 몇 년간에 걸쳐 일어난 일이 나열식으로 요약된 다음, 마치 북구의 사가 분위기를 풍기는 계절 이야기("겨울들은 미소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추웠다.", "겨울들은 중세처럼 추웠다."등등…)로 마무리되는 구성이 반복되는데, 이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의 세계임을 표명하는 일종의 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에는 워낙 개성적인 문체와 독특한 유머 감각이 그의 작품임을 보증하는 인장처럼 찍혀 있는 탓에, 그가 매 작품 야심차게 시도한 서사 시점과 구조의 다양한 실험은 오히려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틴 에이미스는 1인칭 자전 소설로 데뷔한 이후 전통적인 피카레스크 소설 형식을 차용한 악한의 1인칭 고백 형식을 취하거나 여성 화자의 시점을 택하는 등 다양한 서술 시점을 시도하고, 작가 자신이 실명으로 등장해 화자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을 넣거나, 사건의 경위를 시간 역순으로 서술하는 포스트모던 소설 기법 등을 차용하는 등 소설의 서사 전략 및 형식 차원의 새로운 시도를 꾸준히 해왔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가장 최근에 내놓은 결과물(가장 멀리 온 기착지)에서 택한 서술 시점이 제인 오스틴이나 디킨즈 등 전통적인 풍자작가의 소설들에 더 가까워졌다는 점은 내게는 꽤 흥미로운 전환으로 여겨진다. 마틴 에이미스의 세계에 일어난 이 전환을 작가의 무뎌진 풍자의식이나 나이브한 상황 인식(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에서 비롯된 퇴행으로 단정하기 전에, 자신이 지금까지 작품 속에서 구축해온 인물상과 풍자했던 세계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 작가가 의식적으로 취한 전략으로 본다면, 그의 열세 번째 장편소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는 마틴 에이미스가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말년의 양식(Late Style)의 포문을 여는 첫 작품으로 새롭게 읽힐 것이다.
▲ 1980년의 마틴 에이미스. ⓒAngela Gorgas, 출처 telegraph.co.uk |
작가였던 새어머니의 권유로 십대 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우연히 읽고 문학에 심취하게 된 마틴 에이미스는 풍자를 현대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라고 얘기해왔다. 그에게 풍자가 일종의 게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보코프도 지적했듯이 풍자는 패러디와 달리 교훈이라는 판돈이 걸려 있기에 독자에게 현실의 이면이나 인생의 진실을 거리 두기와 유머라는 왜곡과 굴절의 작업을 경유해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제인 오스틴이나 디킨즈, 고골리 같은 뛰어난 풍자 작가는 그 자체의 내적 완결성과 생생한 리얼리티를 가진 가상의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당대 독자에게 현실의 틈새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무대 장치에 익숙해져 보지 못했던 삶이라는 짜임에 난 구멍을 조각칼로 돋을새김 하듯 선명하게 드러내곤 했다.
마틴 에이미스의 현실 풍자가 도달한 최근의 기착지가 동화의 세계라는 점은 보기에 따라 중견 작가의 퇴행을 보여주는 지표로도, 혹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사회 풍자소설 장르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 과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마틴 에이미스의 다음 소설이 도달할 혹은 되돌아갈 지점을 한 번 더 지켜본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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