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한국 정치학은 서양 정치를 해설하는 일이 과업이었다. 이건 서양식 삶이 우리 삶의 북극성이 된 근대 이래의 상식이다. 한국 정치학자의 과업은 정치라는 것의 표본을 서양에서 찾아서 그 최신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서유견문'이 한국 정치학의 방법론이었다. 당연히 한국 정치학자에게 '한국'은 피사체였을 뿐 주체였던 적이 없었다. 정치학을 보편 과학으로 상정하고 그 진리를 배워 이 땅에 '적용하면', 이 땅의 정치도 개화, 문명화되리라는 과학주의적 신화가 한국 정치학의 오랜 신앙이었다.
1910년 조선이 망한 후 100년 세월이 흘러 오늘에서야 현대 한국을 주제로 삼은 한국 정치의 '문학'이 탄생하였음을 직감한다. 정치학자 최정운의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펴냄)은 한국 정치학이 드디어 한국인의 삶을 논하기 시작했다는 자립의 선언서로 다가온다. 인류학자 기어츠가 지적한 바, "인류학자는 촌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촌락에서 연구한다"라는 말을 빌리자면 최정운의 책은 '한국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연구한 거의 최초의 작업이다. 한국이 피사체가 아니라 주체가 된 정치학계의 보고서가 이 책이다.
1.
▲ <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최정운 지음,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
다만 정치학 전공자인 평자의 눈에 '문학 속에서 정치를 찾아내겠다'는 그의 최초의 발상(발견)이 놀랍다. 동시에 우회의 긴 경로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근현대 사상사에 접근함에 있어서, 이 책의 시도는 특이한 접근 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이런 식의 비정통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는 까닭은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가 정통적인 방법론으로는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런 방법론을 선택한 것은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은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28쪽)
이에 그는 한국인에게 낯익은 근대소설들을 섭렵한다. 이광수의 <무정>과 <유정>, 홍명희의 <임꺽정>,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과 <배따라기>, 또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 그리고 신소설인 <혈의 누>와 <은세계> 등을 호출한다. 단, 문학을 대하는 그의 눈길은 정치학자의 시각이다. 그의 "일차적 관심은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이야기의 내용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역사적 변화이며 이를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내용은 사실과 이상의 고민을 포함한 역사적인 해설이며 그러한 역사적 현실의 재구성이 이 책의 목표"라는 것.(27쪽)
2.
▲ <혈의 누>, <은세계>의 이인직의 초상. |
우리 '국학계'는 '친일파'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인종주의자들이었다. 친일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친일'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을 운명을 타고난 괴물로 취급되었고 독자들은 이런 난센스를 묵인해왔다.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인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73쪽)
한국인에게 <혈의 누>와 <은세계>는 불편한 작품들이지만, 그 "신소설에 나타난 자연 상태는 -선사시대가 아니라- 조선이 타락하고 붕괴되어 나타난 현실의 모습"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 한국인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곧 식민지 사람으로 전락할 한국인에게 가장 큰 이슈는 '정체성'의 확인과 '힘'의 갈구였다. 오로지 힘을 쫓아 제국(일본)에 자발적으로 복속하기를 주동한 일진회의 꿈이 한국인의 '힘' 추구의 원형이라면, 이에 대한 강력한 반발인 의병운동에서 한국인의 정체성, 곧 민족주의가 탄생한다. 이를 서술하고 해설하는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문학 작품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다.
최정운은 문학을 비평하지 않고, 도리어 문학 속에서 살고자 한다. 당대 조선인들과 호흡을 같이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에게 분노의 대상인 친일파의 문건에 대해서조차 그는 이렇게 대한다. 좀 길지만 인용한다.
1909년 12월 초 이용구는 전에 은밀히 기초했던 <한일합방서(韓日合邦書)>를 일진회 회원들 앞에서 공개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 이천만 명의 눈앞에 위급한 상황은 과연 어떠합니까?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강조는 저자) 노예처럼 희생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져버린 오늘에 처하여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찌 앞길이 막막하여 어침햇살이 희미해지는 듯한 근심이 없겠습니까? 이는 하늘이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옴을 느낀다.(167~168쪽)
자발적으로 한일합방을 책동하는 친일파의 글 속에서'조차' '그들 나름의' 고통을 읽어내고 "지금도 이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오는 저자의 동감 능력이 이 책의 핵심적 동력이다. 이 책이 문학에 대하여 쓴 정치학적 비평이 아니라, 문학 속에서 주인공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 정치적 삶을 복원하고 또 현대 한국의 기원을 찾아내려는 것임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기어츠의 말, "인류학자는 촌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촌락에서 연구한다"라는 말을 재차 비틀어 인용하자면 최정운은 '한국 문학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문학 속에서 연구한다'는 자세를 일관한다.
아, 오해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친일파 옹호론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기생충학자가 기생충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가 기생충을 위하는 사람이 아닌 것과 같다. 친일파를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를 '알려는 노력' 속에서야, 그 시대의 진정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든 해석이든 그것은 제대로 진단을 한 다음 작업이다. 외려 문제는 "우리에게 일진회는 우리 역사에서 그간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주제였"던 데 있다.
3.
황량한 구한말의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신소설 작가들이 갈구했던 힘은 이광수에게 이르러 '지식'으로 전환된다.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우리 민족이 쇠락한 원인이 무지(無知)에 있음을 절감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고자 한다. 저자는 오늘날까지 면면한 한국인의 한 기원을 이형식의 자세에서 발견한다.
그들이 젊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지식이란 외국에서 어떤 식으로 배워온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지식인, 선생들은 지식의 수입업자 혹은 중개상에 불과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선생'으로 충분한 것이며 '학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이 외국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지식은 학위의 포장을 덮어쓴 것이어야만 했다.(이를테면, 이승만 '박사'!) 그럼에도 외국에서 가져온 지식의 속살은 따져보지도,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힘으로 통용되었다. 이것이 오늘날도 횡행하는 지식 속물주의의 기원이 된다. (저자는 '반지성주의'라고 명명한다.) 오늘날 이 지식 속물주의는 "교육 만능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이 짝은 우리나라를 '교육 지옥', 수많은 청소년들을 학살하고 해외로 팔아넘기는 그런 무시무시한 지옥으로 만들어 왔다."
▲ 벽초 홍명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글에 기대어 사는 지식인이란 사악한 종자라는 생각은 벽초와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제는 하늘에서 떨어지듯 사회 밑바닥의 민중들이 솟아올라 치욕과 고통의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453쪽)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도 여기서 발화된 문제점과 관련이 깊다. 저자는 현대 한국의 가장 큰 문제를 그때 발아한 반지성주의의 퇴적물로 지목하고 분노에 차서 성토한다.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온갖 희생을 치르고 부모들은 가산을 탕진하며 자녀들을 지원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오면 무엇을 배우는지, 무엇을 배울 것인지, 그 대학이란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는 학생들, 학부모들 그리고 언론 등 사회 전반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10쪽)
이에 "이 책에서 결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이러한 현실과 그 과거로부터의 뿌리를 파헤침으로서 우리 사회를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생각을 같이 펼쳐보자는 제안이다." 현대 한국인이 직면한 문제이면서도 낯익기에 그냥 심드렁하게 넘어가는 문제의 정체를, 낯설게 파헤쳐 그 기원을 까발려 제시하는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는 것. 이 점에서 <한국인의 탄생>은 하나의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4.
근대란 주체성 있고 힘을 갖춘 개인의 시대다. 그러나 조선은 식민지였고, 식민지인으로 살아야하는 조선인들은 이중의 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힘을 욕망하지만 내부에는 부재했고, 정치적으로도 나를 주체로 세울 수 없었다. 일본은 내지(內地)였고 서울은 외부였던 것이다. 식민지 사람들은 '자살이냐 광기냐'의 절망에 시달리고 내내 우울해 하였으리라.
그런데 저자는 말한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단순히 식민제국의 반사체만은 아니었다고. 도리어 주체를 세우고 내부를 찾고, 또 힘을 가지려고 그들은 분투했고 또 성공하기도 하였노라고 주장한다. 그의 도발적인 작품 해설이 자리하는 대목도 여기다. 그 대상은 이광수의 <유정>과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최정운은 <유정>을 두고 이렇게 평한다. "이광수는 강한 조선인 만들기에 성공했다. 3.1운동이 종료되고 허무감을 느끼며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좌우로 갈라져 다투던 시절, 춘원은 그간에 서구문학에서 도입하여 오랫동안 집착했던 '사랑'이라는 주제를 더욱 심화시켜 김동인이 성공하지 못했던 계획 즉 근대인의 모델을 가지고 강한 조선인 만들기에 성공했다.
한편 동시대의 홍명희는 임꺽정이라는 "영웅에게 내적인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해 파우스트 모델을 활용하여 변심을 거듭해가며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 나아가는 진취적인 '민중 영웅'을 창조하였다. 단재 신채호가 전개한 아나키스트적 민중과 민중의 직접혁명의 논리와 언어에 벽초는 뼈와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하여 살아있는 영웅으로 창조하여 우리에게 보낸 것이다."(532~533쪽)
즉 식민지 시대는 서구와 식민제국의 파도에 '피사체'로서 그 영향만 입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고 서양과 제국을 갈망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면이 있는 근대인의 주체를 세우고, 또 힘찬 영웅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매우 '건설적' 시대였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일제 강점기는 일부에서 말하듯 우리 민족과 수많은 지식인이 일제에 협력하고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찾아 헤매고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며 그려가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강한 한국인의 모델을 발명하였다. 춘원은 우파의 입장에서 벽초는 좌파의 입장에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물을 창시하였고 이 두 전사, 영웅의 모델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지식인은 투쟁을 멈춘 일이 없었다. 일제 시대 또한 우리에게 치욕의 시대라 할 수는 없다. 그간에 우리 민족은 자랐고 일제의 잔인한 탄압의 와중에도 우리는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이제 싸운다는 일에는 거침이 없다. 다만 스스로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것은 반지성주의였다. 힘을 기른 대가였고, 그 대가를 우리는 지금 치르고 있다.(538~539. 요약)
5.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지음, 현암사 펴냄). ⓒ현암사 |
"요즘 한국의 학문풍토는 다 가짜 같아요. 그들은 누가 더 정확한 '반사체'인가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소화가 제대로 안 되면 먹은 것이 그대로 나옵니다. 먹은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정확한 반사체와 비슷한데, 그것이 병인지 모르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사람이란 처음에야 딴 사람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라 하더라도 좀 지나면 씹고 걸러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반사체는 아무리 커 봤자 생명이 없고 열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린 비록 작고 작을지라도 '발광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우익,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 펴냄) 86쪽)
이 책은 전우익의 말로 하자면, "비록 작고 작을지라도 '발광체'다." 아직도 누가 더 정확한 '반사체'인가를 다투는 과학주의, 방법론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사회과학계에 성찰을 촉구한다. 여태껏 걸어왔음에도 우리가 보지 못한 길을 발견하고, 또 오랜 시간 풀숲을 헤치며 공을 들여 길을 낸 저자의 노고에 큰 치하를 보낸다. 이제야 한국 정치학은 '한국'의 정치학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끝으로 몇 가지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 소설이란 어차피 근대적 정신을 담을 수밖에 없는 그릇이다. 그러나 삶이란 근대와 전근대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삶의 분비물이자 그 바탕인 사상과 문화도 연속적이다. 저자는 신소설의 토양을 홉스적 자연 상태에 견주고, 또 비숍 등 외부관찰자의 시각을 통해 지리멸렬했던 구한말 서울 풍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포치 자체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단절을 전제한다. 이 책은 시대적 단절을 토대로 현대 한국인의 기원(탄생)을 신소설로부터 발전론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책 서두에 <홍길동전>과 <춘향전> 분석이 있다고 하여 전통과 연속되는 것은 아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분석은 도리어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여겨진다.)
즉 근대의 그릇인 소설을 정치사상의 대상으로 삼다보면 자연히 '전근대'와 절연하게 되어있고 또 당연히 전통, 한국식으로는 '유교 전통'의 힘은 소외되거나 부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이 "국민교육으로써 자연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독립협회를 이끌었다."(157쪽)고 했을 때의 그 국민교육에서 길을 찾는 선택이나, "이들의 생각을 개화민족주의로 환성시킨 장본인인 안창호의 신민회(新民會)"가 선택한 계몽의 길이나 (新民이란 말 자체가 유교경전 <대학>에서 기원한다는 점은 차치하고), 또 당시 세계사조인 개조론을 수용하는 선택으로 나타나는 경로 밑에 유교적 가치관(교육, 학교, 계몽을 통한 개혁)이 서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하의 소설이 근대를 갈망하는 스토리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특성상, 작가들에게 (유교 사상에 몸이 익은 홍명희조차도) 전통과 유교는 언제나 전근대의 인습이자 야만의 유습으로, 또 조선시대 정치는 언제나 부패해있고, 그 관리들은 탐관오리 일색인 어두운 풍경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둘째, 근대에서야 탄생한다는 '사랑'과 '내면'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소설은 근대 서구의 소산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소설의 양식이 아닌 시나 다른 장르를 통해 표출되는 남녀 간의 사랑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도 예로부터 표현되어왔다. 동아시아 고대 노래집인 <시경>이 남녀 간 사랑의 노래로 시작됨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딱딱한 예교의 상징인 공자도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남긴 바 있는 터다.
"아가위꽃이여! 꽃잎이 펄럭이네. 어찌 그대가 생각나지 않겠나마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구료!" 공자가 이 노랫말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되, 사랑한다면 거리가 먼 게 무슨 문제가 될까?"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논어, 9:30)
<시경> 편집자 공자로서는 이 노래가 진솔한 사랑이 아니라고 여겨 앤솔로지에 넣지 않았던 듯하다. 이를테면,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애인과 거닐며 보았던 아가위 꽃송이를, 서울 남산에서 다시금 휘날리는 것을 본 연인의 심정이 담긴 연시가 "아가위꽃이여! 펄럭이네. 어찌 그대가 생각나지 않겠냐마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구료!"라는 것이고, 이 노래를 두고 한 공자의 비평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사랑을 한다면 거리가 먼 것이 무슨 장애가 된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정녕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면 국경도, 나이도 장애가 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거리 따위의 장애는 사랑을 북돋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식어버린 사랑을 먼 길 탓으로 돌리는 가짜 사랑타령에 대한 공자의 날카로운 비평에 깃든 통찰은, 사랑이 그저 서구 근대의 소설양식 속에서 발화한다고 보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개연성을 획득한다. 특별히 이광수의 <유정>을 두고 현대 한국인의 내면의 힘을 장착하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읽는 저자의 관점이 불편했던 이유다.
또 '내면'의 발견을 근대 소설의 특징으로 보는 관점에도 한계를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욕망(특히 육욕)과 이성 사이에 갈등하는 내면은 서구 소설의 한 특징이라는 점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갈등하는 내면은 세계 보편적으로 존재할뿐더러, 또 그 표현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효심(孝心)을 두고 한 지적이긴 하지만, 공자는 두려움(懼)과 기쁨(喜)의 역설적 동거(갈등구조)로서 마음을 설명한 바 있고, 맹자도 효심을 원한(怨)과 사모(慕)의 쌍곡선으로 해석한 바 있다. 더욱이 성리학에서도 마음은 사단/칠정의 치열한 전투장으로 묘사한 바가 있다. 특수한 사례만으로 '내면의 발견'을 근대소설의 것으로 전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쳐보인다. 도리어 전통적 내면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정도라야 옳은 평가가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바흐친이 지적한 다성성(多聲性)을 염두에 둘 때, 전통적 문화의 연속성(강한 내구력)과 또 재난 속에서 이식된 서구의 정치 인식이 함께 전관(全觀)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덧붙여 독자들에게 <한국인의 탄생>과 함께 읽을 만한 책들을 게시한다.
(2) 사회학자 김상준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펴냄). 이 책은 동학운동을 위시하여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사회를 조형한 변혁 운동들 밑에 연면한 유교적 전통을 지목하고 해석하고 있다. (3) 존 프랑클의 <한국 문학에 나타난 외국의 의미>(소명출판 펴냄)도 일독을 권한다. 최정운의 책과 겹치는 근대 소설들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시각을 달리하는 점들이 있어 참고가 된다. 천주교와 기독교 등 서구 종교의 수용 과정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미, 그리고 유교의 끈질긴 저항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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