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누군가에게는 술자리에 빠질 수 없는 안주거리가 된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개인적 욕망의 영역이 되기도 된다. 그런데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에 대한 경멸이 일상화 되고 있다.
정치가 이렇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정치가와 정치인들 스스로 초래한 일로 보인다. 태연히 거짓말을 하고, 선거에서나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교묘한 논리로 뒤집어 버리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위임해준 권력을 공익이 아니라 자신의 배만 채우는 추악한 비리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치와 정치인들은 숙명적으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위치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대의제 정치란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가진 다수를 대신하여 어떤 결정이나 행위를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다수를 만족 시킨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공적, 사적인 행동이 대중과 언론의 감시망 속에 있는 관계로 부정적 평가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치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간에 정치만큼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결과로 국가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변화를 집행한다. 경우에 따라 그 변화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폭발적이거나 때론 항구적인 제도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 고이즈미는 없는가?
▲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
"지금 나는 '원전 제로'로 가야 하며, 거기에 더해 정치권은 가급적 빨리 원전 제로 방침을 결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핵폐기물 최종 처분장을 찾지 못하는 일본에서 핵발전소를 하면 안 된다는 내가 무책임한가, 10년간 못 찾는 핵폐기물 처분장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하는 쪽이 무책임한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전부터 처리장을 만들지 못했다. 강한 지도자가 나오면 주민의 반대를 무시하고 10만 년 사용할 처리장을 만들 수 있겠는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무책임하다"
"겨우 수천 년 전 피라미드에서 나온 문자도 제대로 모르는데, 10만 년 뒤 후손들에게 '여긴 위험하니까 파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보수 정치인 고이즈미의 놀라운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이즈미는 "나도 총리 재임 시에는 핵발전소 추진론자였다. 그것(그러다가 생각을 바꾼 것)이 비판받고 있지만, 인간의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더 확인해보니 그의 변신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이즈미에게 이런 성찰이 가능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일차적으로 후쿠시마 사고의 충격이었지만, 실은 핵폐기물이 더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는 2013년 8월 핀란드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최종 처분장을 견학하고 돌아온 뒤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10만 년간 핵발전소 쓰레기를 묻어둘 만한 땅이 없다. 핵발전소는 쓰레기 처리 비용과 안전 비용을 고려하면 결코 싸지 않다."
그는 핀란드에서 플루토늄 반감기는 2만4000년이고, 생물에 해가 없어지려면 10만 년간 묻어둬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온칼로 처분장은 수도 헬싱키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을 날아간 뒤, 해안에서 배를 타고 다시 10~20분을 들어간 섬의 지하 400미터 아래에 있었다. 핀란드는 암반으로 된 나라지만 일본에서 400미터를 파면 온천이 나올 것이다"
"일본은 10만 년간 핵발전소 쓰레기를 묻어둘 만한 땅이 없다." "핵발전소는 쓰레기 처리 비용과 안전 비용을 고려하면 결코 싸지 않다." "정치인이 나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고이즈미의 변화가 놀라운 또 한 가지는 핵 발전의 대안으로 재생에너지를 들면서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큰 방향을 목표로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전 제로 방침에 찬성하는 지식인이나 전문가가 참석하는 간담회를 설치해 정책을 추진하면 폐로와 대체 에너지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발전시키고 고용도 창출할 수 있다,"
고이즈미는 보수 성향의 주류 언론 <요미우리신문>이 자신을 무책임한 정치인으로 비판하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논쟁도 불사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내가 탈핵 주장을 할 뿐 대안 제시가 없다고 비난했는데 핵발전소 문제는 넓고, 깊고, 복합한 문제라 한 개인이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그래서 국가가 탈핵으로 방침을 정하면 관료와 전문가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해결해 가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변신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주요 야당의 대표와 만나 '탈핵'을 위한 공동 대응을 추진하면서 자신이 발탁한 자민당과 아베 정권을 압박하고 나섰다.
"총리의 권력은 강하다. 그러나 총리의 권력이 아무리 세더라도 쓸 수 있는 곳이 있고, 쓰더라도 실현되지 않는 분야가 있다. 지금 총리가 결단만 하면 실현 가능한 것은 원전 제로의 결단이다. 야당도 모두 원전 제로에 찬성이고, 반대는 (아베 총리가 총재인) 자민당뿐 아니냐. 사실 자민당 의원들에게 진짜 속마음을 물어보면 반대와 찬성이 반반일 것이다." "총리에게 (권력을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다. 총리가 결단을 하면 (원전 제로) 반대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반대하는 언론들도 바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고 언행이다. 보수 개혁적 색채가 강하고 개인적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새삼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고이즈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본 국민의 55%(<마이니치신문> 11월 10일자), 60%(<요미우리신문> 11월 9일자), 급기야 63.8%(<산케이신문> 11월 14일자)가 지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까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 조사에서 탈핵은 대체로 과반을 약간 넘는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난 9월 이후 고이즈미의 발언과 행동들이 나오면서 여론은 큰 폭으로 탈핵을 향해 상승하고 있다.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의 정치인이 가져온 변화가 현실에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는 것을 현실에서 목격하게 된다.
앞으로 일본의 핵발전 정책은 중대한 갈림길에 들어 설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의 정책 향배는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우리 정치인 중에서 특히, 영향력 있는 보수 정치인 중에는 고이즈미와 같은 사람이 왜 없을까?
방사성 폐기물-화장실 없는 맨션
우리나라에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2004년 노무현 정부 때부터 논의를 시작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른바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장이 시급하여 제대로 논의 되지 못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공론화 위원회' 출범 일정을 잡고 위원장까지 내정했지만 출범 직전에 전격 취소하였다. 다음 정부에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지만, 정권 차원에서 이것이 얼마나 뜨거운 사안인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재는 전국 23기 핵발전소에서 매년 700톤 이상 배출되는 사용 후 핵연료를 각 핵발전소의 임시 저장 시설에 보관하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2016년부터 차례로 임시 저장 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말 그대로 임시 방편인 임시 저장 시설을 확충한다하더라도 2024년에는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설명이다.
뜨거운 감자, 고준위 핵폐기물의 처리에 대해 정부는 지난 10월 30일,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 위원회'라는 명칭의 기구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출발부터 뭔가 이상하다. '부지 선정' 의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리 방식'을 먼저 다루고 부지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사용 후 핵연료 처리에는 △사용 후 핵연료 속에 있는 플루토늄 등의 물질을 재처리하는 방식 △지하 깊은 곳에 묻는 '영구 처분' 방식 △영구 처분 전까지 지상에 보관하는 '중간 저장' 방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재처리 방식은 한미 원자력 협정 조항에 묶여 사실상 불가능하고 영구 처분의 경우 기술적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예상돼 결국 중간 저장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논의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출범하는 위원회는 '중간 저장 시설'로 처리 방식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된다. 이미 짜인 각본대로 진행하는 공론화라면 이 위원회가 가지는 신뢰도와 권위는 이미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에너지 정책에 대한 기본적 합의 없이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방식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핵 발전을 지속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구 처분이든 중간 저장 시설이든 간에 그 부지를 내놓을 지역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동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한다
'사용 후 핵연료' 처리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를 하지 말자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에너지 기본 정책에 대한 공론화와 동시에 진행하되 에너지 기본 정책의 결정에 따라 처리 방식 그리고 부지까지 단계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결정 과정이라는 것이다. 재처리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중간 저장이든 영구 처분이든 이 땅 어딘가에 부지를 마련해야한다는 말이 된다.
정부는 제2차 에너지 기본 계획 방향을 발표하면서 핵발전소 비중을 29%로 유지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미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단 한곳도 해체하지 않고, 새롭게 건설하려는 핵발전소 또한 모두 건설해야 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이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나아가 에너지 총수요도 상당한 폭의 확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도가 분명한 사용 후 핵연료 처분 방식을 논의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약한 암반과 대수층 물속에 건설되고 있는 경주의 '중·저준위 처분장'을 보라. 또 선진국에서는 고준위 폐기물로 분류되는 것을 중준위 폐기물이라고 우기는 정부의 형태를 보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이다'라는 생각이 필요한 지금이다. 한국의 고이즈미가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를 경험해서도 안 된다.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 위원회의 출범을 보면서 머리가 무거워진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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