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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박정희는 똑같은 '기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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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박정희는 똑같은 '기회주의자'!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나폴레옹 이야기 ③

이용재는 <나폴레옹 평전>(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나은주·이용재 옮김, 열대림 펴냄) 역자 서문에서 나폴레옹에 관한 책이 지금까지 8만여 권이 나와 있다고 했다. 나폴레옹 당대부터 지금까지 평균 매일 한 권 이상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

그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명쾌하게 파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책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의 하나겠지.) 꽤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그 제국이 진보적 현상인가, 반동적 현상인가를 놓고서부터 의견이 첨예하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너무나 많다.

"주권자로서 나는 공화국의 정신을 고수했다."

위 책 538쪽에 인용된 나폴레옹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대혁명의 계승자였다. 전쟁광이 이끄는 군사 독재 제국이 민주주의 발전의 상징적 사건인 대혁명의 계승자라니! 이 주장을 지지하는 보르도노브의 관점은 이렇다.

나폴레옹에게서 우리는 장군의 모습과 동시에 행정가이며 입법가의 모습도 보아야 한다.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 그는 황제, 즉 민간인 장군이자 창건자, 건설자, 조직가였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1789년 프랑스 군중을 봉기시켰던 대원칙들은 라인 강을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며 그 영향력도 곧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다른 왕들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폴레옹이 다른 왕들의 '대오'에 들어갈 수 없었던 요소이자 다른 왕들에게 불안함을 주었던 요인은 민법이 내포하고 있는 원칙, 그 중에서도 특히 평등의 원칙이었다. (548쪽)

나폴레옹의 진보적 역할을 보르도노브는 행정가와 입법가의 모습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성과를 라인 강 동쪽에 혁명의 '대원칙'을 이식시킨 데서 찾는다. 나폴레옹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입장에서도 여기가 한계일 것이다. 대혁명이 빚어 놓은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쥔 나폴레옹은 혁명 정신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어도 대혁명의 성과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제국의 힘을 키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널리 전파하게 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용한 대혁명의 성과 중 중요한 것 하나가 '국민' 동원력이었다. 혁명의 이념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가 '국민 주권'이었다. 지배 대상이던 서민 대중이 국가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근대 국민 국가는 방대한 국민을 조직함으로써 국력을 키울 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이념을 군대 조직에 활용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이룩했다.

체계적 징집은 나폴레옹이 아직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던 1793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의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이 두각을 나타내 출세가도에 오르게 되었다.) 1792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등 인접국과의 교전이 시작될 때 프랑스군의 전투력은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크게 퇴화해 있었다. 1793년 2월 국민의회가 30만 명의 징집령을 발했지만 잘 시행되지 못했다. 반년 후인 1793년 8월의 국민총동원령에서부터 체계적 징집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병력은 그 후 1년 동안 64만5000명에서 150만 명으로 늘어났다.

병력의 징집만으로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구의 10%를 군대에 갑자기 모아놓았을 때 그 보급과 훈련에서부터 국가 경제 운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다. 이 난관을 돌파하는 과업을 수행한 것이 당대 일류 수학자이기도 했던 라사르 카르노(1753~1825년)였고, 그에게는 '승리의 조직자'란 별명이 붙었다. 제1공화국에서 국방장관 등 요직을 맡았던 카르노는 1802년 나폴레옹의 종신 통령 취임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우대를 계속 받았다. 카르노가 조직한 '국민군'을 잘 물려받은 것이 나폴레옹의 군사적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였다고 전쟁사가들은 본다.

▲ 나폴레옹 1세. ⓒwikipedia.org
나폴레옹의 정복 사업에서 '나폴레옹 법전'의 의미가 주목된다. 절대 왕정을 벗어나 법치의 원리를 바라는 정복 지역의 민심에 부합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복 사업을 쉽게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전파'라는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도 국민군과 함께 대혁명의 성과를 나폴레옹이 활용한 사례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념을 키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혁명의 성과를 활용하는 데는 훌륭한 실적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르도노브는 나폴레옹 성공의 큰 원인을 그의 유연성에서 찾으며 아래와 같은 말을 인용한다.

"계획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문제에서는 전혀 내 자유가 아니었소. 내가 나름대로 조정을 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지요. 내 조정 능력보다 훨씬 더 힘이 센 수많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생겼으니까. 그럴 때마다 고집스럽게 저항하면서 암울해지기보다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혜를 택했소.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의 지배자가 아니었고 항상 지배를 받았소. 통령 정부 시절 내가 상승 기로에 오르던 초기에 내 진정한 친구들, 열정적인 투사들이었던 그들은 아주 순수한 선의에서 내게 묻곤 했소,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나는 항상 나도 모른다고 대답했소. 그들은 놀랐고 아마 내심 불만스러웠을지도 모르지." (555쪽)

유연한 신념은 기회주의자의 특성이다. '기회주의자'란 말이 욕으로 많이 쓰이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혁명의 혼란을 나폴레옹이 어느 정도 수습하고 혁명의 성과를 꽤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혁명을 반대하는 신념도, 혁명을 받드는 신념도 없었기 때문에 혁명의 성과 중 자신의 출세와 집권에 활용할 만한 것을 활용함으로써 '혁명의 현실화'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한 것도 남로당에 관여한 것도 생존과 출세를 위한 것일 뿐,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도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권과 권력 강화에 활용할 만한 조건들을 거침없이 활용했기 때문에 당시 이 나라가 필요로 하던 과제를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시점의 특정한 문제 해결에는 기회주의자의 유연성이 유용한 몫을 맡을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가 너무 강고한 권력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으면 사회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그것이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와 박정희 시대 한국의 비극이었다.

더구나 과거의 기회주의자가 거두었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성공이 후세에 신화화하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면서 나폴레옹3세의 집권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던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반복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웃음거리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시대착오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이 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말한 웃음거리는 실제로 역사에 종종 나타난다. 문제점과 한계가 드러났던 상황이 쉽게 되풀이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 한국에서도 '웃음거리 되풀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나폴레옹3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상황을 살펴본다.

볼프강 몸젠은 <원치 않은 혁명, 1848>의 제4장('혁명 전야의 정치 노선들')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와 공화제를 지향하는 급진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보수주의를 거론했다. 2월 혁명 당시에는 루이 필립 치세의 주류였던 자유주의가 공화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가 대두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보수주의가 강화되었다. 4월 이후 보수파 중심의 질서당이 국민의회를 주도하고 6월 봉기를 진압하면서 제2공화국에서는 혁명 이념이 빛을 잃고 있었다.

나폴레옹1세와 3세가 모두 혁명을 타락시킨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반혁명적 집단이 권력을 쥐고 인민 대중을 지배하면서 대중에 영합하기 위해 일부 개혁 조치를 선별적으로 시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이 큰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계급도 투쟁 노선을 명확히 세우지 못하고 교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투쟁으로부터 초연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투쟁 양상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권력이 바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1848년 프랑스에서 펼쳐진 상황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설명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복고된 왕정의 파탄 때문에 공화파 혁명을 자유주의파가 지지하게 되었지만 공화정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주장은 6월 봉기의 파국을 몰고 옴으로써 공화파의 신뢰를 잃었다.

여러 정파의 합종연횡이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뭔가 줄 게 있는 후보"를 자임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후보가 대통령 선거를 휩쓸었다. 입헌제와 공화제 등 혁명의 핵심 내용에 비켜 서 있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내세운 기회주의 세력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움켜쥔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광'을 전쟁을 통해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나폴레옹의 책임이 아니었다. '혁명 프랑스'에 대한 주변 군주제 국가들의 의구심이 전쟁을 몰고 왔고, 오랜 전쟁 상태가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권좌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전쟁을 너무나 좋아하고 아무런 정치적 이념을 갖지 않은 그가 권력을 쥐고 보니 져서 쫓겨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만 하게 되었다.

길고 참혹한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런데도 1848년의 프랑스 대중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프랑스의 영광'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 나폴레옹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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