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 동안 유럽 철학자들 사이에서 바울을 필두로 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과 북미를 가로지르는 서구의 인문학계 전반에서 이른바 '신학적 전회'(theological turn)에 관한 논의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그러한 흐름이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유럽 철학자들의 신학적 탐구가 전 세계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진지한 관심과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지만, 정작 이런 트렌드의 출현을 야기했던 그 저명한 철학자들이 동시대의 신학적 연구 성과들과 직접 대결하면서 자신들의 논지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 슬라보예 지젝·존 밀뱅크 지음, 박치현·배성민 옮김, 마티 펴냄. ⓒ마티 |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저자 간의 논쟁을 둘러싼 사상사적 배경을 구체화하고, 실질적으로는 그 둘이 각자의 관점에서 '헤겔'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요약함으로써 핵심적인 쟁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크레스턴 데이비스의 서설('성(聖)토요일 혹은 부활의 일요일?'), 제목 그대로 기독교에 대한 특유의 헤겔식 독해의 진수를 보여주는 지젝의 첫 번째 글('세 마디가 무섭다: 헤겔식 기독교 독해로의 초대'), 그 글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라기보다는 지젝의 신학적 작업 전반에 대한 '느슨한' 논평 차원의 밀뱅크의 글('이중의 영광, 또는 패러독스 대 변증법'), 마지막으로 밀뱅크에 대한 재반론 및 지젝 신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글('변증법의 확실성 대 패러독스의 모호한 변덕')까지. 미리 밝혀 두지만, 이 서평은 지젝과 밀뱅크의 주장을 '공정하게' 또는 '균형 있게' 서술하진 않을 것이다. 두 배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글의 분량을 단순히 비교해볼 때도 그렇고, 글의 내용적 완성도나 제출하고 있는 신학적 논점의 급진성에 비추어 볼 때도, 역시나 지젝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눈길이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각각 100쪽이 훨씬 넘는 지젝의 두 글을 어떤 방식으로 요약하고 비평해야 할까? 다행히도 이 책에는 지젝이 펼쳐 놓은 방대한 이야기를 지젝 스스로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 대목이 있다(영어판 원서에는 없다!).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설교를 연상케 하는 한국어판 서문('생존하기 위해 삶을 버릴 것인가?') 가운데서 지젝은 오늘날 급진적 좌파가 필요로 하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온전하게 "인간이 된" 신―우리들 중 하나인 동지, 이중의 사회적 추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신―, 그리고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신.(9쪽)
지젝이 제창하는 유물론적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개념들, 예컨대 '신의 죽음', '이중적 케노시스', '그리스도의 괴물성'이 저 한 문장 속에 모두 담겨 있다.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자.
"신은 죽었다. 큰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젝이 선보이고 있는 '헤겔식 기독교 독해'의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의 '자기-비움'(kenosis), 즉 초월적이고 비물질적 존재인 신(神)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자신을 육화(肉化)시켜 이 땅에 출현한 사건이야말로 역사에서 이미 완결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신의 죽음'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또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기독교 신학은 초월적 신으로부터 내재적인 신으로의 급진적 변화를 실현했다. 지젝은 성육신의 요점이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신이 저 너머의 초월성에 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58쪽)
라캉주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큰타자(big Other)의 죽음'을 상징한다. "무의식은 큰타자의 담론이다"라든가 "인간의 욕망은 큰타자의 욕망이다"와 같은 라캉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큰타자는 상징적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진정한 '타자성'이다. '신의 죽음'은 바로 그렇게 상징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큰타자가 '죽었음'을 현시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신론은 "나는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는 나를 대신해 믿어주는 큰타자에 더는 의지할 필요가 없다"로 정식화될 수 있다. 즉, "큰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진정한 무신론 공식인 것이다.(455쪽) 그런데 기독교의 성육신야말로 신 자신이 어떤 '큰타자'로 버려진 유기물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 또한 "큰타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지젝에게 진정한 윤리적 주체의 탄생은 큰타자의 부재의 결과를 떠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죽은 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와 같은 큰타자의 부재를 사고할 공간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독교 신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441쪽)
따라서 성육신 및 십자가 사건은 우리 행동의 행복한 결과를 근거지어주고, 역사의 목적을 보증해주던 초월적 배려자로서의 신 개념을 즉각적으로 해체한다. 나아가 신의 죽음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파국의 잔인한 현실을 둘러싸고 모종의 "심층적 의미"를 찾던 기왕의 모든 해석학적 유희마저도 일거에 무너뜨린다. 이를테면 "홀로코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죄과이다"와 같은 식의 비합리적인 인과관계의 답변이 더 이상 들어설 여지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파국이 일어난 데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혹은 인간사의 불가해한 비극 앞엔 그 어떤 초월적·외부적 원인도 없다는 것. 오히려 그 '이유 없음', 그 '무의미함'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실재'(the Real)일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 사건은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지젝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마침내 "영원히 중대한 질문에 대한 유일하게 일관된 기독교적 답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아우슈비츠에 계셨는가? 어떻게 그러한 무참한 고통이 있을 수 있는가? 왜 신은 개입하여 그 사건을 막지 못하셨는가?"에 대한 대답은, 지구상의 희생자들로부터 물러나 우리의 불행 너머에 거하는 신의 축복과 평화에 동일시하며 우리 인간사의 궁극적 공허(무상함)를 깨닫는 것도 아니고(표준적인 이교적 답변), 신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고 언젠가는 우리의 고통을 보상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죄지은 자들을 벌할 것이라는 대답도 아니다(표준적인 신학적 대답). 그리스도는 이제 예전보다 더 이곳에 현존하신다. 그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95쪽)
한편, 마지막 글에서 지젝은 밀뱅크가 옹호하는 중세 가톨릭적 세계관을 '적대'(antagonism)가 부재하는 유기적 위계질서의 전체론적 세계관으로 규정한다. 지젝이 보기에 이것이 그와 밀뱅크 사이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데, 지젝은 만일 밀뱅크처럼 신과 피조물이 균형을 이루려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결국 신의 중심에 이미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성육신 사건에 내재하는 충격적 외상은 은폐되고 만다고 비판한다.(389쪽) 밀뱅크의 관점은 "신이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빚어낸 효과를 온전히 담아낼 장소가 부재하는 나이브한 관점으로서, 이는 필연적으로 성육신을 단순히 "무한과 유한의 일치"로 축소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밀뱅크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견지하는 중세 가톨릭적 전체론의 세계관에서는 피조물이 조화롭게 지내듯이 신과 피조물도 조화롭게 지내는데, 이런 조화는 결국 유기적 위계질서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싶다. 따라서 지젝이 "존재의 조화는 실재하며 직접적"이라는 밀뱅크의 관점이 '신의 죽음'과 같은 근본적 부정성이 생겨날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대목은 충분히 타당해 보인다.(381쪽)
▲ 슬라보예 지젝. ⓒwww.erstestiftung.org |
"이중적 소외가 '괴물'을 낳았다."
지젝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십자가 사건을 '신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서적 개념인 '케노시스'(자기-비움)를 헤겔 철학의 '소외'(alienation) 개념과 자유롭게 호환한다. 그는 신의 세계로의 낮아짐을 보여준 성육신 및 십자가 사건을 보편적 실체인 신이 자신을 '비우고', 자신이 만든 세계로 하강해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비참한 인간 개인으로 나타나 최후의 순간까지 신에게 버림받은 사건으로 풀이한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주체성이 인간 동물의 실체적 인격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주체가 텅 빈 단독성이라는 자기관계적 부정성으로서 실체적 인격과의 연계를 끊고 스스로를 실체적 내용을 제거한 나로 정립해야만 한다. 그런데 신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로 신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해야만 비로소 신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흥미롭게도 지젝은 여기서 "신으로부터 '신 자신'이 당한 소외"를 "신으로부터 인간이 당한 소외"와 겹쳐 놓는다.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성육신)과 그 신이 인간으로서 죽임을 당한 사건(십자가 수난)을 통해 신의 자기소외(신의 죽음)가 발생한 것과 동시에, 예수로 대표되는 인간 개인이 신 없는 세계에서 신에게 버려진 채 홀로 있는 자신을 경험하게 되는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가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신의 고통과 인간 주체성의 고통이 한 사건 안에서 이중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바, 지젝은 이를 '이중적 소외' 혹은 '이중적 케노시스'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리스도의 '괴물성'(monstrosity)이라는 문제적 개념을 추출해낸다. 초월적이고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신이 한 축에 있었고, 내재적이고 구체적이며 특수한 인간이 반대 축에 있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의 명확한 구별이 철폐되고 두 범주가 하나로 겹쳐지는 '신-인간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에서 일어났다. 하여 이제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 또는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두 죽음'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괴물'(monster)이 탄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보편성과 인간적 구체성을 모두 겸비한 '구체적 보편성'의 화신, 어느 하나로 환원 불가능한 잡종성, 아니 흡사 '괴물'과도 같은 그런 주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서 '괴물'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한 인간의 구체적 정체성과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월적·보편적 정체성이―그 간극과 대립은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모호하게 뒤섞여 있는 그런 존재를 지칭한다.
지젝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조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타 인간 개인과 전혀 구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굳이 신을 닮을 필요도 "신처럼" 되고자 애쓸 필요도 없는, 직접적인 신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성과 신성을 (모순적이지만 분열 없이) 동시에 체현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예수를 바라볼 때 신적인 그리스도를 함께 보게 되며, 신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396쪽)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신의 왜상(歪像)이자, 인간의 왜상인 것이다. 지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토대가 그리스도의 괴물성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면서 우리 자신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이 신에게 버림받았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신이 신 자신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듯이,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와 신의 자기소외는 동일한 사건의 양극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된 신으로부터 우리의 처지에 대한 깊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공감'이라는 구원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과연 이런 식의 공감이 정말로 인간을 윤리적·정치적 주체로 만들 수 있을까? 지젝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우리가 버림받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 가능한 얘기이다. 그러나 우리를 버린 신이 끝내는 자신도 버렸다는, 그런 감동적인 신의 인간에 대한 '동일시'를 보고 우리가 충격과 감동을 받게 된다 해서, 인간이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신이 자신마저도 버림으로써 우리와 스스로 동일시되었지만, 그런 신의 '자기-비움'이라고 하는 진실 앞에서 정작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신앙과 감사일 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어떤 적극적인 윤리적 판단과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촉발시키진 않는다. 윤리적 주체가 탄생하는 시점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한 인간에 대한 살해가 사회적 살해로서,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구성원들이 정치적 책임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구조적 부정의(不正義)'의 문제로 우리 앞에 주어질 때이다. 나아가 그것이 결국 신에 대한 살해라는 것, 그래서 그 이중적인 살해에 인간이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윤리적·정치적 주체화의 동기나 필요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젝이여, 그러나 아직 불충분합니다."
지젝은 "신학"을 가리켜, 혁명적 주체 속에서 개별 인간의 단순한 집합을 넘어서는 단체 행동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446쪽) 하지만 정작 그가 말한 '이중적 소외'에선 혁명적 주체화와 연결되는 인간의 단체 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신학의 고유한 윤리적·정치적 모티브를 찾기 어렵다. 지젝의 이중적 소외 개념에서 자신과 타자를 소외시킨 주체는 언제나 신이며 인간은 그 소외적 부정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이 신의 자기 소외와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 오직 그 두 측면의 소외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은 (지젝이 정확히 포착했듯이) 신으로부터 신 자신의 소외와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일 뿐만 아니라, (지젝이 충분히 말하지 않은) 인간으로부터 신의 소외와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의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신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신 자신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신으로서 인간에게서도 버림받았다. 즉, 인간으로부터 신이 소외를 당한 것이다. 한편 인간으로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동료 인간들에게도 버림을 받은 인간이다. 만일 우리가 지젝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완벽한 신인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었던 괴물적 존재의 '이중적 소외', 즉 "'신-인간'의 죽음"으로 이해한다면, "신으로서 그가 신 자신에게 당한 소외"는 다시 "신으로서 그가 인간에게 당한 소외"와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그가 신에게 당한 소외"는 "인간으로서 그가 다른 인간들에게 당한 소외"와 함께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지젝이 충분히 말하지 않은 나머지 두 측면의 소외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중적 소외', 즉 "인간으로부터 '신'의 소외"와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신과 이웃들에 대한 인간 자신의 윤리적·정치적 책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젝이 말한 바와 같은 그런 이중적 소외, 즉 "신으로부터 '신 자신'의 소외"와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에서는 인간에게 윤리적·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인가? 우선 "신으로부터 '신 자신'의 소외"는 강렬한 신앙적 감동은 줄 수 있어도,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신적 특수성의 차원에 속한 사건일 뿐이다. 아울러 "신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함께 경험하는 소외이자, 신으로부터 인간이 일방적으로 당한 소외이며, 나아가 이미 결과를 되돌릴 수도 없는 결정적인 소외이다. 절대적인 벽처럼 놓여 있는 이 소외로부터 인간 주체의 윤리적·정치적 행위가 출현할 여지는 없다. 단지 인간의 비참한 실존을 느끼는 가운데, 황송하게도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한 신에게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 그런 반응은 신앙적 경건일 수는 있어도 지젝이 원하는 혁명적 행동은 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지젝식의 이중적 소외, 즉 "신으로부터 ~의"라고 하는 소외의 진실 앞에서 그저 인간은 이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는 '신앙의 주체'로만 남게 된다.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윤리적·정치적인 주체를 탄생시키는 지점은 그 후자의 이중적 소외를 강조할 때가 아닐까? 요컨대, 지젝은 나머지 두 측면의 소외, 즉 "인간으로부터 ~의 소외"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탐구하지 않은 것이다.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본인이 자신하는 만큼의 그런 윤리적·정치적 책임성을 우리에게 작동시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지젝은 밀뱅크가 기독교적 체험의 '외상적 걸림돌'(traumatic skandalon)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 내가 보기엔 지젝 역시 그 트라우마적 체험의 전체적인 내용을 세밀히 포착하는 데 실패한 것 같다.
덧붙여, 지젝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신자들의 공동체로 성령이 강림한 사건을 신의 또 다른 '자기-비움'으로 해석한다. 아들에서 성령으로의 운동 속에서 지양되는 것은 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초월적인 실체적 실재로부터 가상적·이념적 실재로 이행했고(성육신), 단지 행동하는 개인들의 '전제' 혹은 이념적 '대의'로서만 존재한다(성령의 내주). 따라서 기독교에서 '지양'(止揚)되는 것은 신적 실체 자체(물자체로서의 신)이며, 십자가에서 초월적 신이라는 실체적 형상이 죽음으로써, 신은 부정되지만 동시에 성령이라는 변환된 실체의 형태로 신자공동체 속에서 영원히 보존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러한 성령의 도래와 더불어 이제 인간에게는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을 횡단한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결합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화된다. 물론 십자가에서 초월적 신이라는 실체적 형상이 부정되지만 동시에 성령이라는 변환된 실체의 형태로 신자공동체 속에 여전히 신이 보존된다고 지젝이 말한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하지만 지젝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후에도 추종자들의 삶 가운데서 다양한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로, 수난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현존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은 자연스럽게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의 도래 사이에는 지젝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이 감추어져 있다. 이미 예수가 체포될 당시부터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열두 남성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현장을 지켜보고, 또한 그의 무덤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부활을 믿지 못하고 도망쳤던 여성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살리기 위해 빌라도를 찾아갔지만, 결국 대제사장들의 선동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 광기어린 무리들(오클로스)까지. 이 모든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탄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이 사건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 즉 외상(trauma)으로 남았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그들 내부의 '외상적 걸림돌'이 성령이라는 실체로 변환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현존, 그 '억압된 것의 귀환'을 가능하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예수의 제자 및 추종자들은 예수를 배신한 원초적 사건에 관한 외상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후적인 2차 사건들, 예컨대 예수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민중적 메시아운동들, 유대-로마 전쟁, 유대교 회당 사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축출 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고난의 반복이 예수가 당한 고통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활성화시켰다. 역설적이지만 외상적 기억의 활성화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과 부활의 경험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민중신학 연구자로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 소외' 및 그의 '괴물성'을 그렇게 이해한다. 비록 이런 측면이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에는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룩한 신학적 사유의 성과는 결코 평가절하 될 수 없다. 단언컨대, 동시대의 모든 정치신학은 더 이상 지젝이 제기한 쟁점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괴물들과 마주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조건 짓는 포섭과 배제의 이중성을 삶으로 체현하고 있는 이들, 체제의 내부와 경계를 협상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실천을 벌이면서 때론 체제의 '빈 틈'을 열어나가고, 또 때론 그 체제의 '빈 틈'을 채워 주고 있는 이들, 그래서 특정한 사회적 삶의 세계 속에서 온갖 부조리한 억압과 제약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보편적인 해방의 잠재력을 시위하고 있는 그런 모순적인 존재들이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당연히 그 괴물은 우리들 자신이 정립한 우리의 '부정성'이며, 결국 우리들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 괴물성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놀랍게도 지젝은 괴물이 되어 괴물과 마주하라고 말한다.
결론부에서 그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비밀노트>(<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권, 용경식 옮김, 까치글방 펴냄)라는 소설을 전거로, "감정이입 없는" 윤리적 괴물의 윤리학, 즉 "맹목적 자발성과 성찰적 거리두기의 기묘한 일치 속에서 해야 할 것을 수행하면서, 구역질나는 근접성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돕는" 그런 윤리학을 제시한다.(465쪽) 이 명쾌한 윤리적 준칙은 우리에게 '괴물'이 되어, '괴물' 앞에 설 것을 명령한다. 괴물이 되어 괴물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는 윤리적 주체화의 도정(道程)에 설 수 있다. 그때 그곳에 신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괴물과 마주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만 하고, 괴물이 되기 위해 괴물과 마주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다. 이 아포리아가 새로운 '유물론적 신학', 새로운 '정치신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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