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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의 정치' 아세안, 지구 문명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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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의 정치' 아세안, 지구 문명의 미래

[동아시아를 묻다] 아세안 : 만달라의 환생

인도차이나와 아세안

베트남 신문의 국제 면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세계, 아시아에 이어 아세안이 별도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지역 감각이 퍽이나 도드라진다.

그러나 베트남이 처음부터 아세안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아세안이 출범한 것은 1967년이고, 베트남이 가입한 것은 1995년이다. 얼추 3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실은 아세안과 일합을 겨루는 최전선에 베트남이 자리했던 적도 있다. 1980년대 동남아의 '신냉전'이란 아세안과 인도차이나의 길항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세안의 탄생에는 베트남 전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미국은 베트남의 수렁에 빠졌고, 중국은 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세안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리콴유는 머지않아 동남아시아 전체가 중국의 자장 안에 들어갈 소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즉, 도래하는 중국의 굴기에 대비하여 동남아 국가들의 집합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선견지명이었다. 대국과 합을 맞추기 위한 소국 연합의 전략을 꾀한 것이다. 1972년 미중 화해와 미군의 베트남 철수로 리콴유의 예견은 적중되는 듯했다.

그러나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미국이 떠난 태평양에 소련이 남하해온 것이다. 주요 통로는 '인도차이나'였다. 1975년은 관건적인 해였다. 남부 베트남이 '해방'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었다. 라오스에서 왕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집단은 친베트남 세력이었다.

폴 포트의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척을 졌지만, 1978년 12월 베트남군이 직접 프놈펜을 점령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인도차이나 소비에트 연방'이 실현되려던 찰나였다. 소련은 인도차이나의 '동구화'를 적극 활용했다. 미군이 사용하던 캄란만 기지는 소련의 최대 해군 기지가 되었고, 바르샤바 조약과도 흡사한 아시아 집단 안보 기구의 창설도 도모했다.

인도차이나의 약진은 아세안의 분발을 자극했다. 1976년 발리에서 최초의 아세안 정상 회의가 열렸다. '붉은 인도차이나'가 실현된 바로 이듬해였다. 그럼에도 집단 안보 기구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사회 경제적 협력으로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추진한다는 취지를 더욱 드높였다.

그래서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의 후신이라는 오해도 불식시키고자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 동맹이 아니라 동남아 국가들이 중지를 모으는 역내 기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상호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무력 개입 반대의 원칙을 천명했다. 다분히 캄보디아를 복속하고 있던 베트남을 겨냥한 언사이다. 베트남 공산당(1976년)은 베트남 노동당(1951년)의 후예라기보다는 인도차이나 공산당(1930년)의 재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특정 국가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베트남이 패권을 행사하는 인도차이나와 더욱 각을 세웠다.

인도차이나와의 길항은 아세안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아세안은 베트남이 이식한 캄보디아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엔에서 외교적, 경제적으로 베트남을 봉쇄하는 데 선봉대 구실을 했다. 1991년 결실을 맺은 캄보디아 평화 협상 또한 아세안이 주도한 것이다. 인도차이나를 전장이 아니라 시장으로 전환시켜 아세안의 교역과 투자 연결망에 접속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1986년의 도이모이 선언 또한 베트남의 정체성이 동유럽에서 동남아로 반전하는 변곡점으로 접수하는 편이 온당하겠다.

인도차이나 분쟁을 아세안이 주도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역내 문제의 주체적 해결 능력을 과시했음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베트남의 캄란만에서, 미국은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물러났다. 유럽에 이은 미소의 퇴장으로 마침내 동남아의 '전국 시대'도 종언을 고한 것이다.

ⓒkorea.kr

ASEAN Way

8월 8일은 아세안의 날이다. 2005년부터 10개국이 공동으로 기념한다. 2007년에는 아세안 헌장이 채택되었고, 2008년에는 모든 나라들이 조인했다. 국가 연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인 개념으로 승격된 것이다. 2015년에는 아세안 공동체의 출범이 예정되어 있다. 각개약진하며 '독립 국가'를 추구했던 20세기를 뒤로하고, 서로 기대고 보태는 지역 공동체의 성격을 또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세안이 인도차이나와의 지역 모델 경합에서 승리한 기저에는 문명적 유산이 자리한다. 아세안은 이념 신앙은 배척하되 외부 세력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이슬람 간 가교 역할을 했던 오래된 습속의 흔적이다. 시장을 중심으로 한 내부 연결망을 복원하고, 외부 세계와도 지역 차원에서 관계를 맺는 새로운 형식을 제도화했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아시아 네트워크를 재가동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럽과 태평양까지 아우르는 세계적 연결망의 허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역내 연결망 또한 초국가적이다. 싱가포르-조호(Johor)-리아우(Riau)를 꼭짓점으로 삼는 삼각형은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국가 협력이 아니다. 지방과 지방의 횡단적 연결망이다. 말레이시아의 사바(Sabah), 사라와크(Sarawak), 라부안(Labuan)과 인도네시아의 북부 술라와시(Sulawesi), 동부 칼리만탄(Kalimantan)을 필리핀의 민다나오(Mindanao)와 접속하는 삼각 꼴 또한 국경을 사뿐히 넘나든다.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면 중국의 운남성과 북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동부를 잇는 인프라 건설도 인상적이다. 즉, 얼핏 국가 연합으로 보이는 아세안의 속살은 식민화로 내상을 입은 역내 연결망을 복원하고 치유하는 재활 과정에 가깝다.

하부 구조가 이럴진대 상부 구조 또한 색다르지 않을 수 없다. 아세안의 조직 운영 방식은 국가 단위의 '국제 정치'와는 사뭇 다르다. 공식 기구의 법적, 행정적 절차보다는 협의(musyawarah)와 합의(mufakat)를 중시하는 문화가 뚜렷하다. 자국의 국익을 위한 적대적 협상보다는 친구와 형제 간의 의사 소통 방식에 가깝다. 즉, 독립 국가 간 외교보다는 유기적 문명 공동체의 대화에 근접한다. 그래서 20세기형 국제 관계 문법만으로는 아세안의 성취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아세안의 관료 기구 또한 유럽연합(EU)에 견주면 매우 날렵한 편이다. 매년 300회에 달하는 각종 회의와 회합이 열림에도 브뤼셀과 같은 단일 중심이 없다. 국가 위에 또 다른 관료 기구를 설립한 EU와는 달리 아세안은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 방불하다. 의장국의 트로이카 시스템도 흥미롭다. 한 국가가 단독으로 의장국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해와 이듬해 의장국이 올해의 의장국과 함께 업무를 추진한다. 전임-현임-후임의 협력 체제 구축으로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만큼 유동적인, 중심이 분산된 형태이다.

요체는 아세안의 탈중심적이고 다중심적인 모습이 매우 익숙한 문화의 재림이라는 것이다. 느슨한 영토성에 기초하여 위계적 정치체들이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었던 동남아 특유의 지역 질서가 복구되고 있는 것이다. 즉, 국민 국가가 외발형이라면, 아세안은 내발형에 가깝다.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 이전에 약동했던 만달라 간 질서(Inter-Mandala Order)야말로 아세안이 구현하고 있는 '부드러운 지역주의'의 뿌리이다.

만달라(mandala)의 환생

애당초 동남아는 국가 형성부터 달랐다. 사회 구성체가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모순에 따라 조형된 것이 아니다. 생산보다는 교역과 유통이 중요했다. 즉, 바닷길의 해상 무역 네트워크의 거점 항구를 중심으로 정치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도시 국가의 발전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차라리 지중해와 유사한 측면마저 있다. 교역 국가, 네트워크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농업과 관개 사업에 기반을 둔 동북아형 중앙 집권 국가와 관료제도 발달하지 않았다. 혈연 중심의 계보 관념도 미약했다. 특정 가계의 세습이라는 왕조 개념이 사실상 부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적 연속성이나 영토적 감각에서도 '국가(state)'와는 확연히 다른 공속감이 배양되었다. 이를 '만달라(mandala)'라고 부른다. 동심원을 일컫는 불교-힌두교의 용어에 빗대 동남아형 국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아시아적 생산 양식도 아니고, 동양적 전제도 아니며, 봉건제는 더더욱 아닌 동남아 특유의 사회 구성체이다.

만달라의 영향권은 중심부에 그친다. 주변과 변경은 고도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누린다. 중심부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 또한 대저 종교적 의례나 종교 건축 등 상징적 권위의 행사에서 구할 따름이다. 혹자가 '극장 국가'라는 탁월한 명명을 부여했던 까닭이다. 즉, 만달라의 핵심은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권력 침투가 아니다. 그래서 장소에 따라서는 복수의 만달라가 겹치고 포개지기도 하는 것이다. '주권'의 개념을 빌자면, 주권이 공유(共有)되고 분유(分有)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남아 특유의 국가 의식으로 명료한 국경 없이 느슨하게 연계되는 지역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상업을 통한 번영, 세계주의 문화, 분산형 권력 구조가 만달라의 핵심적 특징이다. 일찍이 중국형 국가 모델을 채택한 베트남만이 남달랐을 뿐이다.

만달라의 성격이 판이했기에, 만달라 간의 관계도 독특했다. 주변과 변경으로 갈수록 주권의 영향력이 희미했기에, 이웃 만달라와의 포개짐은 상시적인 현상이었다. 내정과 외교가 뚜렷하게 구별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즉, 미약한 영토성과 느슨한 중앙의 권위가 탈중심적이고 다중심적인 지역 구조를 형성했다. 덕분에 소규모 지역의 정체성이 발현될 수도 있었고, 서로 다른 만달라의 내부에서도 지방 간, 지역 간 소통과 교류가 활발했던 것이다.

만달라 간 네트워크로 형성된 동남아의 지역성은 유럽의 식민주의와 함께 굴절되었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아라비아를 잇던 아시아 교역 네트워크는 유럽 식민 모국과의 수직적 분업 체제로 재편되었다. 게다가 그 유럽 국가들은 상호 극심한 경쟁을 제도화한 '국가 간 체제'를 주입했고, 동남아에서는 매우 낯선 '민족주의'라는 개념도 전파했다.

그 민족주의 또한 사회적 저변과는 어긋남이 심했다. 식민 모국의 지정학에 따라 인위적인 국경이 설정되었기에 민족적 분포와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이 합치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에 다인종, 다민족이 잡거하기도 하고, 같은 민족이 여러 국가에 흩어져 편재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말 그대로 '상상의 공동체'를 주조해낸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괜히 인도네시아를 연구한 것이 아니다. (다만 동남아와 전혀 다른 국가 모델을 1000년간 경험했던 동북아에 '상상의 공동체'론을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심대한 착오이다.)

그럼에도 100년의 프로젝트는 1000년의 유산에 비할 바 못 된다. 100년을 거슬러 아세안이 (재)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세안은 만달라 질서의 재림이자 환생에 가깝다. 고체화되고 경성화되었던 20세기를 뒤로하고 액체화되고 유동화하는 21세기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50년의 아세안은 1950년(냉전)과 1850년(식민)보다는 1750년의 동남아과 더욱 닮아 있을 법하다.

대승(大乘)적 뉴에이지(New Age)

불교적 지정학이라고 할 수 있는 만달라는 동남아의 고유한 은하계를 형성했다. 유교적 지정학인 '천하'와도 다를 뿐더러, 유럽발 세계 체제와도 확연히 다르다. 동남아는 그 만달라 질서를 통해서 중국, 인도, 이슬람이라는 3대 기축 문명을 흡수하고 토착화할 수 있었다. 지난 200년을 거치며 서구 문명 또한 소화하여 복합 문명의 양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세계 문명의 원천을 강변하지 않으면서 여러 문명이 복합계를 이루는 독자적 문화 생태계를 일군 것이다.

그만큼 가치 체계의 토착화도 도드라진다. 돌아보니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선도한 리콴유와 마하티르가 괜히 아세안 출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구형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만큼이나, 서구형 민주주의도 맹종하지 않았다. 20세기의 양대 신학에 일선을 그으며 독자적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도 있겠다. 다만 동/서구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이 독특한 균형 감각의 기저에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 문명에 흡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했던 1000년의 유산이 자리함을 확인해둘 일이다. 불교 국가, 이슬람 국가, 천주교 국가에 사회주의 국가까지 어울리는 아세안의 실험이야말로 지구 문명의 건강한 생태계를 회복하는 대사업일지 모른다.

아세안의 오묘함을 살필수록 불교 공부를 화두로 삼게 된다. 68 혁명을 기폭제로 불교 열풍이 한 차례 일었다. 그러나 대저 채식과 요가 등 히피와 여피의 라이프스타일 개선에 그쳤다. 소승적 뉴에이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만달라에 각인된 불교 정치학, 불교 지정학이 간단치가 않다. 중생을 구제하고 삼라만상을 재건하는 대승적 뉴에이지의 도래를 예감케 되는 것이다. 동북아의 신천하와 동남아의 뉴 만달라가 합장하고 합심한다면, 20세기의 아수라장(阿修羅場)과는 판이한 법계(法界)에 당도할 법도 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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