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느 새 그 기자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되었다. 10년째 과학, 환경 담당 기자를 하면서 적지 않은 동료 기자들과 협업을 했는데 하나같이 다른 분야로 관심을 바꾸거나, 아예 퇴사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혹시 네가 문제 아냐?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음…, 그건 아니다!(라고 우겨본다))
▲ <초록발광>(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엮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뜬금없이 업계의 뒷얘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최근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엮은 <초록발광>(이매진 펴냄)을 읽으면서, '신참 환경 담당 기자의 교재로 쓰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초록' 혹은 '녹색'을 둘러싼 구도가 얼마나 복잡한지 최소한 감은 잡을 수 있다.
환경은 정치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책깨나 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지구 온난화가 꼭 화제로 오른다. 한쪽에서 "그거 사기야!"라고 말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주장이야말로 석유 기업으로부터 뒷돈을 받은 일부 과학자의 사기야!"라고 반박한다. 이렇게 설전을 나누다 환경 담당 기자에게 '판결'을 요청하면 정말로 난감하다. 사정이 그렇게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한재각도 지적하듯이, 기후 변화를 다룬 과학 논문이나 보고서에는 '~이다'라는 확신한 진술보다는 '~할 수 있다(might)'라는 불확실한 추측을 나타내는 표현이 가득하다. 심지어 불확실성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를 놓고서, 과학자 사이의 혼란을 피하고자 표까지 정리해 두었다.
첨언하자면, 과학자 사이에서 지구의 기온 상승 즉 지구 온난화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니 지구 온난화 자체를 놓고서 '사기'라고 우기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들의 연구비 출처부터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의 효과로 나타나는 기후 변화의 양상은 정말로 불확실하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는 석유 기업의 뒷돈을 받는 이른바 '회의주의자'의 주장처럼 '대담한 사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헌신적인 환경운동가가 애타서 목소리를 높이듯이 '치명적 운명'도 아니다. 앞으로 100년 뒤에 지구 온난화가 일으킬 기후 변화가 지구 환경 또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우리는 모른다.
그렇다면, 어차피 어떻게 될지 모르니 손 놓고 있는 게 맞을까? 바로 그 대목에서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아니, 기후 변화를 둘러싼 수많은 과학 연구가 이런 정치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니, 그것은 애초부터 정치의 영역에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옳으리라.
실제로 기후 변화를 둘러싼 현실적 쟁점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한정된 자원으로 이 문제에 대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걱정거리를 안겨준 미국, 유럽연합(EU)과 같은 선진국은 어떻게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기후 변화에 대응할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혹시 세금을 걷는다면 어떻게 어디서 거둘 것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계속된다.
<초록발광>은 바로 이런 정치적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대답이 그간 환경 운동이 읊어왔던 답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또 다른 책 읽는 즐거움이다. 하나의 입장만 있는 줄 알았던 환경 운동 내부에 같은 문제를 놓고서 다양한 시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토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환경 문제가 놓인 복잡한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노동 운동을 넘어서
<초록발광>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이 책은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노동 운동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간 환경 운동이 노동 운동을 세상을 바꿀 파트너라기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둔감한 '지진아' 취급을 해온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례적인 일이다. 환경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한진중공업의 구조 조정에 맞서 '희망 버스'가 한창일 때, 노동 운동은 "정리 해고 철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세계 경제 변동에 민감한 조선업의 특징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식의 조선업 구조 조정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리 해고 철회"가 아닌 다른 근본적인 해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초록발광>은 독일의 철강 기업 티센크루프가 컨테이너 선박을 제조하던 공장을 풍력 발전기 부품 제조 공장으로 전환한 사례를 언급한다. 이런 전환 과정에서 공장 노동자는 단 한 명도 해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장은 4000만 유로의 신규 투자까지 이끌어냈다. (이런 것이 바로 적색과 녹색의 만남이다!)
이런 사례는 노동 운동이 마냥 "정리 해고 철회"만 외칠 것이 아니라, 선도적으로 다른 방식의 (산업) 구조 조정을 주장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준다. 티센크루프처럼 조선업이 풍력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 운동이 선택해야 할 좀 더 그럴듯한 대안이 아닐까? 이 책 곳곳에 이런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더 많은 초록 發光을 위해서
▲ <기후정의>(이안 앵거스 엮음, 김현우·이정필·이진우 옮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기획, 이매진 펴냄). ⓒ이매진 |
최근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환경 운동은 갈수록 왜소화되고 있다. 더 많은 환경운동가들이 준전문가가 되어 공무원, 과학자, 정치인과의 논쟁에 몰두하면서, 환경 운동은 기존 정치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애초 환경 운동이 꿈꿨던 세상은 철없는 근본주의자의 몽상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반면에 이 책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꿈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까지 제시했다. 책 제목으로 '초록發光'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유다.
읽을거리 <초록발광>을 펴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환경 문제를 둘러싼 사회 변동 과정에서 자칫 희생양이 되기 쉬운 노동자, 농민 또 제3세계 민중의 시각까지 염두에 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내세우며 지난 5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초록발광> 이전에도 몇 권의 책을 기획해서 내놓았다. 이 책을 읽고서 '정의로운 전환'을 더 알고 싶은 이라면 <기후 정의>(이매진 펴냄), <밥상의 전환>(한티재 펴냄), <나쁜 에너지 기행>(이매진 펴냄), <탈핵>(이매진 펴냄) 순으로 책을 펼치길 바란다. 화석 연료와 핵에너지의 시대(아톰의 시대)가 가고, 햇빛과 바람 에너지의 시대(코난의 시대)가 오는 상황을 어떻게 맞이할지 상상력을 충전하는 기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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