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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 한 명도 없었다…그래도 교사가 희망!"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내 기억에 한국은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하긴 혼란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역사를 보면, 침체적인 안정보다 역동적인 혼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나가는 모습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의 혼란은 그 혼란을 야기한 주체가 수구 세력이라는 면에서, 결코 진보적인 성격의 것이 못 된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사실조차도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정원을 비롯한 여러 국가 기관이 선거 시기에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에 대한 행정부 수장과 집권 여당의 반응이다. 그 반응은 "언제까지 그런 지난 일에 얽매일 것이냐? 지금 중요한 것은 '민생' 아니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백번 양보하여 그들 말처럼 민생을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면, 직장을 잃고 폭력에 노출되어 죽음으로 내몰려온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그리고 평생의 삶의 터전을 고압전선이 흐르는 철탑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도 '민생(民生)'이다. 그런데 왜 그들의 삶은 외면하는가? 가뜩이나 미흡한 역사교과서를 더 엉망으로 만들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도록 하여,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저들은 과연 학교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전교조의 법외 노조화?

이런 혼란 가운데 슬그머니 '전교조 법외 노조화'라는 사안이 등장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에는 현재 9명의 해직교사가 있다고 한다. 고용노동부는 이 9명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여 이들을 축출하면, 전교조를 합법 노조로 인정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외 노조'로 취급하겠다고 한다. '법외 노조'란 비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의미한다. 정부는 전교조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접하고 처음에 든 생각은 "왜 갑자기 전교조일까?"였다. 정부가 갑자기 전교조를 자극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정보력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전교조의 눈에 띄는 발언이나 행동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전교조의 진보성은 예전에 비해 훨씬 약해진 것 같다. 수구적 정권 입장에서는 가만히 둬도 문제될 것이 없는 전교조를 왜 건드린 것일까? 좀 심하게 말해서, 전교조는 이미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반 노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물론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그리고 일반적인 노조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교조는 노동조합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노조와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 것이다.

일반 노조와는 다른 이러한 성격을 전교조는 '참교육'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것 같다. 전교조는 학생들에게 참된 교육을 하겠다고 교사 노동자들이 만든 단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참교육'이라는 말을 듣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물론 참교육이 현실화되어, 더 이상 그 단어를 주장할 필요가 없게 된거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현실의 학교 교육은 참교육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는데, 오히려 참교육을 주장하는 교사는 눈에 띄게 줄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게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없다

사실 나는 교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내게는 존경하거나 지금도 뵙고 싶은 선생님이 없다. 참 불행한 일이다. 대학 친구가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은 안 했지만 그 친구가 부러웠다. 내겐 왜 만나고 싶은 선생님이 없을까? 생각해보니 만나고 싶은 '교사'는 몇 명 있기는 했다. 좋아서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예전에 그 교사에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갚아주고 싶기 때문에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교사들에 대한 그러한 내 감정은, 좀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교사'에 대한 이런 내 감정의 출발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육성회비'라는 일종의 등록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큰돈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모두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은 그나마도 제때 납부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담임교사에게 혼나곤 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안정적인 직장에서 맞벌이를 하시던 내 부모님은 학년 초에 1년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내셨다. 하루는 우리 반 담임교사가 1년치 육성회비를 다 낸 아이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나를 포함한 대여섯 아이가 호명되어 어리둥절하며 나갔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이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하나씩 업어주는 것이었다. 다달이 육성회비를 납부하기도 버거워하는 가난한 부모를 둔 덕분에 혼나는, 여덟 살의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이건 정말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내 어머니는 '촌지'나 선물을 들고 학교를 방문하곤 하셨고, 그때마다 담임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나를 괜스레 칭찬했다. 당시의 담임교사는 초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 이 세상의 치부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이러한 불신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서울의 서민층이 사는 동네에서 중학교를 다닌 나는 학교 교사들의 닳아서 반질반질해진 양복을 보며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저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학부모로부터 '약소한(寸)' '성의(志)'라도 받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연민조차도, '8학군'으로 상징되는 부유층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그곳의 교사들은 서민층이 사는 지역 학교의 교사들과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당시 급우들 사이에서 도는 말에 의하면, 교사들이 받는 '촌지'는 절대 '약소하지' 않았으며, 일부 교사는 당시에 금지되어 있던 과외수업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처럼 부유층 아이도 아니면서 공부도 그저 그런 학생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대학 시절에 접한 전교조의 탄생은 충격이었다. 교사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칭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참교육'을 하겠단다. 내가 겪어본 교사와는 다른 참된 선생님들이 이토록 많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보았다. 공식적으로는 한 명도 없었다. 전교조에 대한 의심이 신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만약 그 고등학교에 전교조 선생님이 있었는데도 교사들의 행태가 그랬다면, 전교조에 대한 나의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런 의심은, 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학교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자신들의 '참교육'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신뢰로 바뀌게 되었다.

엉망이 된 학교 교육

▲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엄기호 지음, 따비 펴냄). ⓒ따비
그런데 어쩌다가 참된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을까? 그리고 전교조의 근거지이며 전교조 선생님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학교는 왜 이처럼 엉망이 되어버렸을까? 어쩌다가 엄기호의 책 제목(<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펴냄)처럼 교사조차도 학교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현재 나는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다. 10년 넘게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해마다 바뀌는 학생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인류는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에 변화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가는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최근 내가 학생들에게 느낀 변화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향해 있다. 특히 학생들의 개인주의화는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대단히 민감하다. 그런 한편 자신이 속한 집단이 부당한 처분을 받아서 결국은 그 집단에 속한 자신도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뻔한데도, 당장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으면 외면한다. 학점에는 목을 매면서도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해야 할 행위에는 등한하다. 예컨대, 자신의 견해만을 써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해도, 많은 학생이 인터넷을 그대로 베껴서 과제물을 제출한다. 그것을 적발하여 0점 처리하면,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긍했는데, 요즘은 '나만 베낀 게 아닌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대드는 학생이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과 함께 베낀 동료 학생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베낀 동료 학생의 이름을 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서 솔직히 두렵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를 팔아먹는 꼴까지 보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엄기호의 책에서 사례로 제시한 초중고등학생들의 모습에서 변화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대학 강의실도 차츰 초중고등학교의 붕괴되는 교실을 닮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역시 초중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에게 어떤 의미도 제공하지 못하는 공간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 책은, 학교 문제만 불거지면 교사 권위의 실추가 원인이라는 둥,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현실이 문제라는 둥 같은 말만 되뇌는 전문가들의 섣부른 일반화나 규정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 현장의 이야기'라는 부제에 걸맞게 학교 현실을 몸으로 겪으며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의 체험이 잘 드러나 있다. 물론 교사의 권위 실추,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도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런데 학교 문제는 그리 단순할 수가 없다. 학교는 기본 구성원인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 그리고 학생들 사이의 관계, 교사들 사이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여기에 학교 운영자, 교육당국, 학부모 등과 학교 기본 구성원의 관계가 얽혀 있다. 학교 문제의 구조 자체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학교의 기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나면 학교와 학교 교육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노력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일 게다. 이 책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 현실에 대한 저자의 냉철한 분석과 비판도 참고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선생님이 학교를 살린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끔찍했던 부분은 "내가 공부할 때 내 공부를 방해하던 저것들이 이제 내가 수업을 할 때가 되니 내 수업을 방해하는구나."(272쪽)라는 말이었다. 학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는 한 선생님이 교사 연수에 가서 들은 한 젊은 교사의 말이다. 젊은 교사는 공부 안 하고 수업 시간에 떠드는 '꼴통' 학생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꼴통' 학생은 과거에 자신의 공부를 방해했고 지금 자기가 진행하는 수업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그 교사에게 이런 학생은 자기 인생에서의 방해물일 뿐이다. 이 말을 전한 선생님의 분석도 한 번 들어볼 만하다.

"우리 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착한' 아이들이었어요. 공부를 잘하는데 '독한' 아이들이 아니라. 독하게 공부한 아이들은 사대 안 가고 법대나 상경대를 갔고, 선생 되겠다고 사대 가는 애들은 공부를 잘하는 '착한' 아이들이었거든. 근데 지금 내가 가르치는 고3에서 교대, 사대를 가는 아이들은 내신이 전 과목 1등급인 아이들이에요. 1등급을 찍으려면, 엄청난 긴장 속에서 매시간 초 단위로 인생을 살아야 돼요. 그런데 뒤에서 떠들고 이러면 얼마나 짜증나겠어.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거든. 우리 학교에서 서울교대 간 아이들을 떠올리면 독한 아이들이 간단 말이야. 그러니까 (새삼 깨달았다는 듯) 그런 아이들이 가지. 저 아이가 교사가 되면 행복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아이가 교대를 가고 그래요. 그런데 그 경쟁이 대학에 가서도 끊이지가 않는 거잖아요. 지금은 교대도 임용고사 경쟁률이 높고. 그렇게 교사가 됐으면 그런 생각을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274쪽)

IMF 외환위기 이후에 불안해진 고용과 김대중 정권 이후 나아지고 있는 교사에 대한 처우가 학생을 방해물로 여기는 교사의 양산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교사로서 학생을 방해물로 치부하는 말을 하는데도, 그에 대해서 이처럼 차분히 분석해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이 선생님의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가진 이런 선생님들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이 우리의 학교와 교육을 바로 세울 발판이 아닐까 싶다. 학교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물론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당국 역시 바뀌어야 하고,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도 바뀌어야 하며, 내 자식만을 생각하는 학부모의 사고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모두 쉽지 않은 것들이다.

이처럼 어려운 현실이지만, 학교 교육을 바꿀 주체는 누구보다도 선생님일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교육 주체로서 자리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움직임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현실의 많은 교사들이 교직을 밥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한다고 해도, 소수의 이러한 선생님들이 있는 한, 아직은 교사 집단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라는 전쟁의 시기에 짐승처럼 살아가는 당시의 인간들을 보면서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한 맹자(孟子)도 있지 않았던가. 학교와 학생을 사랑하는 일부 선생님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힘들 실어준다면, 많은 교사들이 학생을 사랑하는 교사 본연의 심성을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전교조가 희망이다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법외 노조화라는 압박 정책을 펴자 전교조 회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참교육을 꿈꾸며 숨죽이고 있던 많은 선생님들이 앞으로 등장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 그들이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붕괴된 학교를 바로잡고, 참교육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참교육을 통해서 병든 우리 사회를 치유할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에 맞서 싸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욕되게 하는 역사교과서가 고등학교에서 병든 시민을 기를 준비를 하고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불의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 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함을 가르쳐서 이런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

일부 수구 세력들이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저들이 결국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뽑아버리고자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쳐서 비틀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개발의 논리, 자본의 논리, 경쟁의 논리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는 저런 논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협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있으며, 이것이 더욱 본질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참교육'을 외치는,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외치는, '선생님'들이 필요한 시기다.

▲ 2008년 '초·중등학교 일제고사'에 반대해 학부모의 체험 학습권을 인정한 전교조 교사 7명이 파면, 해임 등 중징계를 받았던 당시, 중징계 통보를 받은 교사가 학생애게 받은 문자 메시지.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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