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결핍이 없는 평화와 풍요가 넘치는 땅에 관한 인류의 갈망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존재했다. 중국의 무릉도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제임스 힐튼의 샹그릴라까지 다양한 '낙원'이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는 상상에 그친다. 온전한 정신이라면 이것이 실재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찾아나서는 이는 더더욱 드물다.
▲ <에덴 추적자들>(브룩 윌렌스키 랜포드 지음, 김소정 옮김, 푸른지식 펴냄). ⓒ푸른지식 |
기독교의 발상지인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페르시아 만 바다 밑, 북극, 몽골의 사막, 미국 오하이오 주까지 거론되는 후보지들은 지금,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다. 고고학이며 언어학 등 '과학'의 도움을 받았다는데도 그렇다. 그러니 이 책을 읽자면 지적 호기심 말고도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는 느긋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 첫 째 강줄기의 이름은 비손이라 하는데, 은과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그 땅은 좋은 금뿐 아니라 브롤라라는 향료와 홍옥수 같은 보석이 나는 곳이었다. 둘째 강줄기는 기혼이라 하는데 구스 온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티그리스라 하는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넷째 강줄기의 이름은 유프라테스라고 했다." (공동번역성서 <창세기> 2장 10~14절)
이 몇 줄을 근거로 에덴동산의 위치를 비정(批正)한 이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역사'로 믿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목적이 달랐다는 점에서는 서로 구별된다.
모든 인류는 하나였으며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바르게 살아가는 이상향으로 에덴을 꿈꿨던 에드먼드 랜던 웨스트는 미국 원주민의 유적지를 에덴동산이라 보았다. 독일침례교형제단의 목사였던 웨스트의 고향인 북미 대륙 오하이오 주 애덤스 카운티에는 고대인이 만든 뱀 모양의 흙 둔덕이 있었다. 강가 절벽 위에 길이 37미터, 너비 20미터인 이 '서펀트 마운드'가 노아의 홍수를 견디고 남은 '에덴의 표지'라고 주장했다. 1901년 일이다. 웨스트 목사는 노아의 방주가 다섯 달 만에 멕시코 만에서 방주가 멈췄다는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까지 1만2000킬로미터를 갔다고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기까지 했다.
"성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확실하다"고 믿은 목사의 주장이니 이건 넘긴다 치자. 하지만 독일 베를린대학교 앗시리아학과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델리치는 위험한 지경까지 주장을 밀고 나갔다.
신생학문인 앗시리아학을 알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방대한 고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델리치 교수는 1903년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에 에덴동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바빌로니아에서 발굴된 원통 진흙인장에 아담과 이브, 선악과, 뱀을 의미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이 주 논거였다. 하지만 초기 성서 사본보다 2000년 정도 앞서 창세기 내용이 담긴 고고학 유적이 성서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논리로 이어지면서 빌헬름 황제의 미움을 사게 되자 델리치는 '고고학'을 독일인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이라는 주장을 펴는 데 이용하기 이르렀다. 바빌로니아 인장에서 '금발머리의 아리아계 왕자임이 분명한' 인물 그림을 찾아내고,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인을 조상으로 둔 아리아인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정도는 약과다. 중국의 민족주의자며 혁명가인 사찬태(謝纘泰)는 1914년 자신도 한 번 가보지 않은 몽골 사막의 오아시스가 에덴동산이었다는 내용의 <창조, 에덴의 실제 장소, 중국의 기원>이란 책을 썼다. 지질학, 반다윈주의, 성서 이야기, 중국 신화를 버무려 중국이 세상의 기원이라는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를 펼쳤다.
문제는 저마다의 목적을 위한 이런 주장들이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보스턴대학교 학장이던 윌리엄 페어필드 워런은 1885년 에덴동산이 북극에 있었다는 주장을 담은 <낙원을 찾다!>를 냈는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이 상세한 서평을 실었고, 책은 그 해에만 8쇄를 찍었단다.
이 흥미진진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책은 이야기로서의 재미에 더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우선은 무류성(無謬性)의 신화, 즉 전문가든 선각자든 오류가 없는 이는 지극히 드물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다. 책의 본류와는 상관없지만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웃은 일화를 접하며 든 생각이다. 루터는 "그 바보는 천문학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성서에도 나와 있듯이, 여호수아가 서라고 한 것은 태양이다. 지구가 아니라"라고 했단다. 환경이며 에너지며 우리 주변의 온갖 사회 이슈에 들고 일어나는, '선의의 문외한'들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지, 그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에피소드 아닐까.
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에덴동산의 실재가 입증될지 모른다는 여유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이 책에 나오는 당대를 풍미한 주장들처럼, 시간을 이기는 '절대 진리' 역시 극히 드물기에 역사와 신화, 종교와 과학의 행복한 화해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슐리만의 트로이 유적 발굴이 호머의 일리아드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으니 영 터무니없는 예측이 아닐지 모른다.
아, 에덴은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평원'을 뜻하는 '에디누'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고, 히브리어로는 '기쁨'을 뜻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대 바빌로니아 시절 페르시아만 입구의 습지대 남쪽 끝에는 좋음이란 뜻의 '에리두'란 도시가 있었고 근처에 과일나무가 무성한 동산이 있었단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 16세기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소장. ⓒ출처 : ko.wikip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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