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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로 훅 간다? 어설픈 합리주의를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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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로 훅 간다? 어설픈 합리주의를 쏴라!

[프레시안 books]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을 읽으면서 "안티프래질"이라는 낯선 신조어의 발단인 "프래질(fragile)"을 붙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방에 훅 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유행한 말일까? 검색해보니 2009년 9월 어느 신문의 '개콘 유행어에 담긴 시대의 표정'이라는 기사에 최근 인기를 끄는 경고성 유행어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후의 분위기를 반영한 유행어인 모양이다.

▲ <안티프래질>(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와이즈베리
'프래질'은 깨지기 쉽다는 뜻이다. 그리고 깨진다는 것은 고장이나 타락이나 침체 같은 다른 부정적 변화와 달리,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를 동반한다. 깨진 유리잔을 고치거나 개선할 길은 없다. 깨지면 끝장이다. 요컨대 '프래질하다'는 말은 쉽게 끝장난다는 뜻, 곧 '한방에 훅 간다'는 뜻이다. '한방에 훅 간다'는 경고는 상대방의 프래질한 성질(우리말 표현으로는 '위태로움' 정도가 적절하지 싶다)을 지적한다. 생략된 교훈은 '그러니 까불지 말고 조심하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검색 결과 중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최근에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검은 백조"와 "한방에 훅 간다"를 한 맥락에서 언급했다. 10월 10일 무슨 모임 참석 차 출국에 앞서 현 부총리는 직원들에게 "웬만한 변수는 다 파악했고,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확신하나 금융 위기 역사를 보면 '검은 백조'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 후 "요즘 유행어로 '한방에 훅 간다'"며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고맙게도 경고와 처방을 한꺼번에 명시해주셨다. 게다가 바탕에는 "충분한 컨트롤"이라는 패러다임이 깔려있다는 점까지 알려주셨다. "충분한 컨트롤"도 모자랄 수 있으니 팽팽하게 긴장하여 "더 컨트롤하자"는 메시지로 읽힌다.

"검은 백조"('블랙 스완'이라는 영어를 그대로 음차해서 쓰는 경우도 많다)는 발생 확률이 아주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사건을 상징한다. 유행어로 풀면 '한방에 훅 간다'에서 말하는 '한방'에 해당한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한방,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기에 경제 공무원들을 긴장시키는 한방, 들이닥치면 잘 나가던 개그맨을 졸지에 노숙자로 만들 수도 있는 한방. 이런 불확실하고 무시무시한 한방을 염두에 두고, 경제부총리는 팽팽한 긴장을 독려하며 개그맨 선배는 조심하라고 타이른다.

내가 '한방에 훅 간다'는 유행어를 곱씹는 것은 나심 탈레브를 유명인으로 만든 <블랙 스완>(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과 최신작 <안티프래질>을 쉽게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이 유행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은 무시무시하고 불확실한 한방, 곧 블랙 스완에 관한 책이며 핵심 메시지는 그런 한방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예측하려야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안티프래질>은 블랙 스완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관한 책이며, 핵심 메시지는 어설픈 합리주의를 버리고 옛 사람들과 자연을 본받아 블랙 스완과 함께 살자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일종의 체질 개선이 필요한데, 그 방법은 더욱 꼼꼼한 컨트롤이기는커녕 정반대로 인위적 질서와 어설픈 개입의 제거다.

합리적 예측과 이해했다는 착각과 안정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우리를 프래질하게(위태롭게) 만든다는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다. 이 세상이 한방에 훅 가는 위태로운 곳임을 절실히 느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신 바짝 차리고, 가드를 바싹 올리고, 한방이 날아오는지 쉬지 않고 살피고, 도저히 안 되겠으면 차라리 깨지기 전에 무릎을 꿇어야 할까?

▲ <블랙 스완>(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 ⓒ동녘사이언스
나심 탈레브의 조언은 명료하다. 긴장 풀고, 가드 내려라. 잔매가 너를 강하게 할 것이다. 오히려 너를 점점 더 위태롭게 만드는 어설픈 합리주의 패러다임과 자기네가 질 책임을 너에게 떠넘기는 기득권층을 주목하라. 누구나 각자 모험하고 승부의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만들어라. 한마디로 누가 '한방에 훅 간다'고 경고하면 '걱정 마, 난 더 강해져서 돌아올 거야'라고 대꾸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안티프래질>을 처음 잡을 때는 이런 도발적인 내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경제 경영 분야의 그저 그런 실용서 냄새를 물씬 풍기는 표지의 문구 "이 시대 가장 강렬하고 뜨거운 사상가, 나심 탈레브가 제시하는 혼란의 시대를 헤쳐 나갈 단 하나의 해독제!"를 보며 "사상가"로 부풀려진 저자가 내놓을 "해독제"를 어떻게 비판할까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적어도 문제의식의 크기와 깊이에서 저자는 확실히 사상가 급이고, 해독제는 대지진 급이다. 특정 효과를 겨냥한 인위적 조치가 아니라 판 자체를 뒤엎는 패러다임 전환이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트레이더로 잔뼈가 굵은 자칭 "회의주의적 경험주의자" 나심 탈레브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그리 도발적이고 전복적이기까지 할까?

가장 먼저 어설픈 합리주의와 참된 지혜의 구분을 짚어야겠다. 저자가 보기에 경제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위태롭게 만드는 장본인은 어설픈 합리주의자들이다. 이들 "프래질리스타(fragilista)"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연스러운 가변성을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도리어 시스템을 위태롭게 만든다.

대표적인 프래질리스타는 제도권 학계에서 리스크 관리를 논하는 경제학자들이지만, 넓게 보면 이론, 하향식 질서, 뚜렷한 목적, 효율성을 숭상하는 "근대적인" 사람들 전반이 여기에 해당한다. 심지어 로고스에 목숨을 거는,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철학의 주류 전체가 프래질리스타에 가깝다. 프래질리스타는 무지를 배제하려 할 뿐, 끌어안지 않는다. 반면에 참된 지혜는 무지를 끌어안을 뿐더러 긍정적인 힘으로 바꾼다. 여기서 무지는 실패, 불확실성, 무질서, 다양성, 우연, 혼란, 가변성 따위로 변주할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색깔이 선명한 저자다. 그는 어설픈 합리주의자들을 맹공하고 고대인들과 자연의 참된 지혜를 열렬히 옹호한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연에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방식으로 타당성을 띤 것일 가능성이 많다."(541쪽) 한마디로, 잘 모르면 그냥 놔두라는 얘기다. "대자연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논리적으로 옳다. 인간과 과학이 하는 일은 맞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결함이 있다."(541쪽) 무죄 추정의 원칙을 연상시키는 오류 추정의 원칙쯤 되겠다.

"합리주의가 더욱 세련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553쪽)

무지(실패, 불확실성, 무질서, 가변성, "블랙 스완")가 영원한 동반자임을, 더 나아가 필수적인 협력자임을 깨달을 때 더 지혜로워진다는 말, 회의주의적 경험주의자 나심 탈레브가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다.

과연 서양 근대철학, 더 나아가 서양철학의 주류 전체가 정말로 프래질리스타의 혐의를 받을 만한가, 혹시 저자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살짝 들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저자의 눈은 일차적으로 지금 여기의 경제 시스템을 향해 있고, 그의 설득력은 주로 이 복잡하고 위태로운 시스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서 나온다. 적어도 현재 경제계의 권위자 상당수는 더 정교한 계산과 인위적인 안전장치와 선제적인 통제로 블랙 스완을 막아내고 안정을 실현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하려고 나선다는 점에서 확실히 프래질리스타가 맞는 것 같다.

그럼 이들 프래질리스타가 우리의 시스템에 들여놓은 "프래질(위태로움)"을 해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 짐작하겠지만, 기본 원칙은 무언가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다. 기술 과잉, 안다는 믿음의 과잉, 개입과 통제의 과잉이 문제를 부른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진단이다. 그러니 뺄 것을 빼서 자연에 본래 내장된 "안티프래질(실패를 이로운 것으로 삼는 성질)"을 되살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처방의 기본이다.

이것이 전부라면 실용적 지침을 기대한 독자에게 퍽 실망스러운 일일 텐데, 다행히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 역시나 통념을 뒤엎는 이야기다. 나심 탈레브는 이 이야기를 꽤나 조심스럽게 꺼내는데, 이는 그가 통제로 대표되는 적극적 처방에 기본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책 곳곳에 흩어져있는 그의 적극적 처방은 흔히 선진화로 불리는 규모 확대, 통합, 집중, 과학기술의 적용, 효율성 높이기의 정반대다. 우선 진단을 보자.

"무엇이 프래질한 것인가? 그것은 큰 것, 최적화된 것,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경험법칙이 아니라 이른바 과학적 방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514쪽)

따라서 처방은 이러하다.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가? 대체로 규모, 집중, 속도를 제한하기 위한 개입은 블랙 스완 현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187쪽)

▲ <행운에 속지마라>(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이건 옮김, 중앙books 펴냄). ⓒ중앙books
현재의 경제 시스템, 나아가 이 시대 전체의 특징으로 촘촘한 연결망을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규모와 집중과 속도의 수호천사쯤 되는 그런 연결망에 대한 언급으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 효과는 복잡성, 구성 요소 간의 상호의존성, 세계화, 그리고 (…) 효율성이라는 끔찍한 유혹 때문에 더욱 커지게 되어있다."(439쪽)고 지적한다.

그가 사실상 연결망의 해체를 촉구한다고 해석하면 지나칠까? 한방에 훅 가지 않으려면 헤쳐 놓으라는 얘기는 어찌 보면 지당하다. 권위자들에 대한 신뢰, 안정에 대한 사랑, 안락의 유혹이 우리의 눈을 가려 빤한 것을 못 보게 하고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예측에 의지하는, 즉 블랙 스완을 과소평가하는 가장 위태로운 시스템으로 만든다.

그러나 나심 탈레브의 도발성 혹은 전복성이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곳은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의 윤리'를 다루는 마지막 7권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는 "사기꾼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사기꾼이다"(34쪽)라는 섬뜩한 말을 던져놓았다. 그리고 7권, 특히 '승부의 책임'을 다루는 23장에서 마침내 이 말에 살을 붙이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앞에서도 전직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 그의 후임 벤 버냉키, 전직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 등을 대표적인 프래질리스타로 꼽으며 만만치 않은 전투의지를 내비친 나심 탈레브는 이제 <세계는 평평하다>(이건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로 유명한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금융인 로버트 루빈 같은 거물들의 윤리를 대놓고 비판하더니 급기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부의장을 지낸 현직 프린스턴 대학 교수 앨런 블라인더를 사기꾼으로 지목하기에 이른다.

뒷감당을 위한 발 빼기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다. 오호, 이것은 흡사 선봉에 서서 돌격하던 한니발의 위용, 전장을 휘젓던 나폴레옹의 기세, 거사에 나서는 안중근의 서늘한 결기가 아닌가! 나심 탈레브의 사상이 어떤 가치를 지녔든 간에, 기득권층이 그를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점만큼은 능히 짐작이 간다.

흥미로운 점은 위험을 무릅쓴 실명비판이 그가 그 비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윤리를 충실히 이행하는 행동이라는 점이다. 무슨 원칙일까? 한마디로 자신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는 책임 지지 않는 사람들, "승부의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누구나 기꺼이 각자의 위험을 감수할 것을 촉구하는데, 잘 보면 그의 비판 자체가 위험 감수 행동의 모범이다.

그는 누구나 모험하고 "승부의 책임"을 지는 세상을 원한다. 일부 구성원이 자신의 책임을 타인들에게 떠넘기는 일이 만연할 때, 사회는 위태로워진다. 누가 그런 특권을 누릴까? 나심 탈레브는 우선 은행업자, 대기업 임원, 정치인을 꼽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정리해놓은 표(582쪽)를 보면, 관료, 컨설턴트, 이론가, 데이터 마이너(miner), 통계 분석자, 중앙정부, 편집자, 저널리스트, 프래질리스타 조지프 스타글리츠가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권리는 행사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묘한 옵션을 소유한 덕에 한방이 아니라 두 방, 세 방, 네 방에도 끄떡없는데(도리어 위기가 거듭될수록 더 번창하는데),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 책임을 떠맡은 사람들은 정말로 한방에 훅 간다.

이런 사회의 위태로움을 경감시키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수단은 "승부의 책임"을 공정하게 지우는 것이라는 나심 탈레브의 말에 백번 공감하는 것은 나뿐일까?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여론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제공한 정보나 의견을 따르던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승부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589쪽)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승부의 책임은 아랑곳없이 다시금 '한방에 훅 간다'는 말로 우리를 겁주는 여론 주도층이 더 많은 것이 아닐까?

정정당당하자면서 정정당당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나심 탈레브의 말을 딱 두 마디만 더 들어보자. "승부의 책임이 없는 예측은 기술자가 근무하지 않는 무인 원자력발전소만큼이나 위험하다."(590쪽) "사회에 피해를 주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에게 처벌이 가해지고 있지 않다. 이는 아주 나쁜 관행이다."(595쪽) 나는 보탤 말이 없다.

제도권 학문과 "같잖은 지식산업"(593쪽)을 맹비난하고 대기업과 교육기관의 몰락을 예견하는 나심 탈레브를 돈키호테처럼 볼 독자도 꽤 있으리라 예상한다. 실제로 그는 "삶은 무작위성을 띠는 자극으로 이루어지며 좋든 싫든 간에 과업으로 여겨야 할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103쪽)고 믿는다. 그가 바라고 권하는 이상은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산책자다. 그런 산책자는 예상치 못한 한방에 훅 가기는커녕 도리어 그 한방을 반기고 즐긴다. 그런 한방이 없으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이런 산책자의 마음가짐이, 아이부터 어른까지 너나 할 것 없이 '한방에 훅 간다'는 말과 함께 불안을 나눠 증폭하는 여기 이 극도로 위태로운 사회에서 해독제로 얼마나 유효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나 사상가 나심 탈레브가 결코 외톨이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그는 니체와 세네카 정도를 자기편으로 언급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서양철학의 주류 곁에서 그에 못지않게 굵은 맥을 형성한 (또한 주류와 끊임없이 교류한) 또 하나의 전통이 그의 편이다. 그 전통은 회의주의, 신비주의 등으로 불리지만, 실은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부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에 갇히지 말라는 당부가 그 전통의 가장 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심 탈레브가 꽤 많이 거론한 철학자 세네카의 문장을 인용하려 한다. 나는 이 문장이 <안티프래질>을 요약한다고 본다. 에드거 앨런 포가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서두에 따다 붙인 문장이기도 하다.

"지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지나친 영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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