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들의 이론적이고 이념적인 주장들은 중국의 진실된 경험과 현실, 그중에서도 농촌의 기층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원톄쥔(溫鐵軍)의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의 출간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의 농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저명한 중국의 이른바 '삼농(농민, 농촌, 농업)' 문제 전문가이자 "농민의 대변인"으로 불리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연구실에서 앉아서 이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실천을 통해 "발로 학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학자다.
그간 그의 글은 <녹색평론>이나 <역사비평> 등의 잡지를 통해 이미 우리 지성계에 간헐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었고, 또 최근에 출판된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대담집 <중국을 인터뷰하다>(이창휘·박민희 엮음, 창비 펴냄)라는 책에도 그와의 대화가 실렸는데, 이번에는 비로소 그의 문집이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중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에서 벗어나 한층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쑨거(孫歌)의 지적처럼,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에 은폐되고 오도되어 줄곧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기에" 한국과 같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 <백년의 급진>(원톄쥔 지음, 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하지만 개혁 개방 이후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 성장과 효율 우선의 서양화(西洋化)의 '4종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 세계화라는 정책 기조 속에서, 삼농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견해는 한동안 비주류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삼농 문제: 세기말의 반성'이라는 글(이 책 2부 마지막 글)이 <독서> 1999년 12월호의 첫머리에 실린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사상 문화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서>는 중국 지식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던 "책을 중심으로 한 사상문화 잡지"로 당시 왕후이(汪暉)가 주편을 맡고 있었다. 삼농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1990년대부터 사용한 용어로, 그는 이 용어의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농촌 경제의 쇠락 현상은 자본이 수익을 내는 쪽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적 조건 하에서 생산력의 3요소(토지, 노동력, 자본)가 농촌에서 도시로 유출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다. 다만 중국은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전통적 모순과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의 모순이라는 양대 모순의 제약 때문에 단순히 농업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농민, 농촌 그리고 농업을 포괄하는 삼농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삼농 문제의 원인이 있다.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란 중국의 사회주의 초기에 고용창출 능력이 극히 제한적인 중공업 위주의 발전 노선을 취하면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농촌과 도시의 서로 다른 호적과 자원 배치 제도를 말한다. 농민공이라는 중국 특유의 개념도 이런 제도적 배경에서 탄생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구는 팽창하고 자원이 부족한 농민국가가 공업화를 추구하는 발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중국의 환경 하에서 최대 문제는 삼농 문제이고, 이를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중국의 발전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농민혁명을 거쳐 탄생한 신중국이었지만 자립하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달성해야 했고, 공업화를 위해서는 자본의 원시축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소농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조건하에서는 이를 완수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중앙정부가 추구한 공업화는 결국 '자기착취'에 의해 원시적 축적을 달성한 과정인 셈이었다. 서구는 자국을 넘어 제국주의적 식민지 약탈을 통해 원시적 축적을 진행한데 반해, 중국은 내부적 '자기착취'를 통해 이를 달성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농민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불문가지다. 사회주의나 전민소유제라는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질적 내용은 급진적 공업화를 통한 자본의 원시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의 정책은 친농민이나 친노동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친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백년간의 급진"도 국내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그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금기를 건드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988년에 처음 사회주의 경제에도 위기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제기했을 때에도 그는 이런 식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경제적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계획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무슨 위기가 발생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비용전가론(成本轉嫁論)"이라는 분석틀로 네 차례의 외자 도입이 여덟 차례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면서 신중국 이후 60년간의 중국의 경험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그동안 중국에서 발생했던 많은 사건이나 정책들을 이데올로기적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농 문제의 역사적 연원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지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위기를 농촌으로 전가하면서 극복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원시적 축적에 따른 가혹한 박탈의 과정을 겪고 여러 차례를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중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방대한 버팀목인 소자산계급 농민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우리는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오바마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는 과도한 버블에 불과한 미국의 금융 자본 경제를 제조업 경제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데 있으며, 북한 경제가 어려움에 봉착한 원인도 농업의 현대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오바마-김정일 딜레마"이다. 따라서 현대화란 미명 하에 농촌을 급격히 도시화한다든지 농민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면서 토지를 사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결연히 반대한다.
2002년부터 중국 정부의 정책이 친자본주의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건설이나 과학적 발전관, 그리고 조화 사회 건설로 변화했으며 시진핑 정부도 삼농 정책을 농업정책의 중점 중의 중점으로 위치지운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일정한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 저자 원톄쥔. ⓒ출처 : news.xinhuanet.com/fortune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