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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주도의 속살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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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주도의 속살을 모른다

[꽃산행 꽃글·82] 제주도 가는 길 ①

개천절 연휴를 이용하여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의 식물을 탐사하는 여정에 올랐다. 생물다양성센터에서 주최하는 3박 4일의 식물 기행이다.

짐을 꾸리면서 핸드폰으로 내일의 날씨를 검색하는데 아주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피토라고 했다. 태풍의 이름이었다. 피토는 제주 먼 바다에서 맹렬히 세를 키우면서 북상 중이었다. 제주를 강타할지 일본으로 빠져갈지 중국으로 갈지 아직은 갈피를 잡을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티토와 나는 제주를 향하여 서로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조건을 따지면 참 말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비행기가 태풍보다 제주도에 먼저 도착했다. 피토는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상륙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제주에는 이틀 전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바람이 세게 불지 모르나 육안으로 보아서는 가늠이 잘되지를 않았다. 공중에 무겁게 걸터앉은 근심덩어리인 먹구름을 모두 제거한 탓인지 제주의 하늘은 후련하게 맑았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제주를 떠나는 일요일까지의 사흘 동안 날씨가 괜찮을까? 그래도 불안의 한 조각이 가슴 한 구석에서 흘러나왔다.

이번 식물 탐사를 지휘하는 교수님이 처음 안내한 곳은 5·16도로의 어느 지점이었다. 안전한 지점에 차를 대고 울창한 숲으로 들어섰다. 비로소 가보고 싶다는 곳에 왔다는 기대감, 그곳이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제주도라는 감회 등에 단체로 몰려 왔다. 또한 뒤이어 오는 훅 끼쳐오는 것이 있었다.

요란한 복장의 발걸음, 비행기 발통, 여행 가방 끄는 소리, 그리고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로 뒤죽박죽인 공항과 시내에서는 맛볼 수 없는 소리들이었다. 그냥 관광객이라면 어서 좋은 풍광과 맛난 음식점을 찾아 이 아스팔트를 그냥 내처 질주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좀 다르다. 멀리 앞을 보기도 하겠지만 가까이 발아래를 자주 보아야 하는 별난 여행이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오랴, 흥건해진 기분으로 내린 뒤 현재 여기 이곳에서 살고 있는 식물들과 한번 눈을 맞춘다는 사실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물론 제주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 것을 포함해서 꼽아보면 여러 차례이다. 지금 수중에 남은 것이라곤 널리 알려진 명소를 방문했다는 기억과 그에 따른 기념사진 몇 장.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잡탕이 된 내 여러 기억의 지층에 매몰되어 제주도다운 흥취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식물의 세계로 입장하고 내가 참으로 가고 싶고 관찰해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가 한라산이었다. 개인적인 몇 가지 추억과 더불어 그곳은 운동화나 구두가 아니라 꼭 등산화를 신고 가보아야 할 곳이 되었다. 대륙에 잇닿은 우리나라 곳곳의 꽃을 찾아 헤맨다 해도 제주라는 섬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꽃 없는 나무"요, "암술, 수술 없는 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내력에 바탕을 둔 기대를 가지고 제주도 3박 4일의 식물 탐험 첫발을 내디디는 기분이 참으로 흔감했다.

사납게 내리닫는 자동차들의 바퀴에 쫓겨난 도로 주위의 숲 사정은 여느 곳과 비슷한 것 같았다. 등수국이 여기저기 기우룩히 총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울긋불긋 다양한 색상의 작은 열매를 야물게 달고 있는 개머루가 진을 치고 있었다. 미역취, 이삭여뀌가 흔했다. 조금 안으로 전진하자 덩치가 아름드리인 구실잣밤나무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있었다. 상록 난대성 다년초인 콩짜개덩굴. 주로 해안가에 많이 사는 것으로 대마도에서도 많이 보았던 식물이다.

잎이 삼지창처럼 갈라지는 황칠나무, 나무가 아니라 무슨 물고기 이름 같은 새덕이, 잎의 양면에 융단같이 부드러운 털이 빽빽한 새비나무, 줄기에 올록볼록 곰보같은 돌기가 돌출한 후박나무 그리고 거지덩굴, 돌외, 산호수 등을 관찰했다.

▲ 황칠나무. ⓒ이굴기

숲과 바다. 시시각각 유리창마다 이국적인 풍경을 갈아 끼우다가 차가 도착한 곳은 어느 식당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위치를 확인해 보니 법호촌. 돈내코유원지가 여기서 가깝다고 했다. 이번 여행을 인솔하는 교수님은 제주토박이인 분이다. 이곳의 속살을 제대로 아는 터이니 숨어있는 맛집을 훤히 꿰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식탁에 오르는 반찬의 대부분이 다 식물이니 식물 전문가의 눈을 피해 접시에 숨는다고 어디까지 갈 수 있으랴.

돈내코장원식당. 허름한 밥집이었지만 맛은 허름하지가 않았다. 맛에 자신이 있는 터라 하루치의 양을 준비해 놓고 재료가 떨어지면 그것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다. 주위에 무슨 공사장이 있는 듯 고된 작업장에서 막 달려와 허기를 채우는 분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짓수가 많았지만 생선구이와 자리돔 젓갈, 따끈한 시래기국과 고슬고슬한 공기밥. 이만으로도 나의 혀는 충분히 흥분했다.

그릇을 싹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옆에는 조그만 정자가 있고 작은 화단도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 풍경에 딱 어울리게 우람한 녹나무가 서 있었다. 덩치가 아주 큰 나무였다. 수령이 오래된 듯 껍질은 우둘투둘 갈라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녹나무는 세력이 제법 컸다. 작은 정자를 거느릴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자잘한 식물들을 키우고 있었다. 절에 가면 흔한 꽃무릇이 구근을 드러낸 채 몇 뿌리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여우구슬이었다. 남부 지방의 해안가와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1년초. 작은 야생화 앞에서 엎드리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니 정자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여우구슬이라고 이름을 말해주었더니 이곳에서는 "닥(아래아)쿨"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 여우구슬. ⓒ이굴기

돈내코라는 지명, 자리돔 젓갈의 반찬, 손바닥만한 키에 땀방울 같은 열매를 기특하게 달고 있는 여우구슬 아니 닥쿨. 그들을 보자니 이 허름한 식당 앞에서 제주도에 왔다는 실감이 더욱 진하게 들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녹나무는 하늘로 가까이 진출한 잎 말고도 줄기 아랫부분이 육덕지어 있었다. 흘러넘친 근육이 거무튀튀하게 발달하여 양분이 아주 많은 흙과 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늙을 대로 늙어버린 나무는 뿌리와 가장 가까이에 새순을 내놓아 기르고 있었다. 혹 지상부에서 큰일이 벌어져도 새롭게 돋아나는 이 여린 가지들이 녹나무의 이력과 전설을 잘 이어갈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떠나려는데 녹나무 바로 앞에 붉은 꽃잎을 단 야생화가 보초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이름은 일일초가 아닌가. 늙은 녹나무는 일신우일신하는 기분으로 이 일일초를 여린 자손들 앞에 세워둔 것은 아니었을까. 일일초(日日草)는 빈카(vinka)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매다, 연결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녹나무와 일일초를 연결하는 상상력이 전혀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일일초. ⓒ이굴기

▲ 녹나무. ⓒ이굴기

제주에 도착한 지 벌써 한 나절. 한 끼도 먹었다. 이동했다고 하지만 섬 안에서 그냥 뱅뱅 돈 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에도 피토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피토는 어디까지 왔을까. 푸르른 하늘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 한라산 중턱의 더 깊은 속으로, 제주의 오후 속으로 힘차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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