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셋값이 폭등해서 힘들다. 2년마다 전세 계약을 새로 갱신해야 하는데,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경우 전셋값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까지 올라버리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돈이 없다는 것이 요즘처럼 인생을 서럽게 하는 경우가 없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고 그러면서도 자괴감이 든다. 그런데 돈이 모자라 쩔쩔매는 일이 이런 일 하나뿐이랴.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돈(화폐) 가진 사람은 왕 취급받고 돈 없는 사람은 거지 취급받는 게 당연하다. 돈은 자존심과 자긍심의 원천이며 돈이 없으면 자존심도, 인간 존엄성도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돈 없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보려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돈을 없애고 시장을 없애고 자본주의를 없애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고? 글쎄,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따져봐야 안다. 아니, 그렇게 따져보기 전에, 먼저 그것이 어떤 세상일지 상상이라도 해봐야 할 것 아닌가!
▲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애니트라 넬슨·프란스 티머만 엮음, 유나영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
이들 모두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인간과 인간이 조화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세상, 계급이 없고 국가권력도 없으며 또한 돈(화폐)도 자본권력도 없는 유토피아를 꿈꾼 것이다. 지금도 세계에는 반(反)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돈(화폐)와 자본, 국가와 무관한 공동체적 삶, 특히 생태주의 공동체의 삶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읽은 책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 -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 만들기>(애니트라 넬슨·프란스 티머만 엮음, 유나영 옮김, 서해문집 펴냄)는 이렇듯 돈과 시장, 자본주의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상상하고 토론하고 실제로 실천한 이들의 기록이다.
비시장, 비국가 사회주의가 가능할까?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실린 글 11편의 저자들은 모두 자본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기존의 사회주의·공산주의 모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즉 이들 글은 모두 과거 소련식 국가 주도 사회주의 모델에 대해서 비판적인 동시에 시장 원리와 화폐 원리가 부활한 시장 사회주의 모델, 즉 레닌 생존 시(1920년대)의 신경제정책(NEP) 노선, 요즘 카스트로 공산당 쿠바의 시장 개혁 노선, 오늘날 중국 공산당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돈(화폐)과 시장, 자본주의가 '즉각적으로' 폐지된 새로운 경제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저자들의 구상과 논의는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전에 자주 돈(화폐)과 시장, 국가권력을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임무(생산력 발전)와 그 발전가능성이 소진될 때까지는 화폐와 시장, 국가권력은 존속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돈과 시장, 자본주의를 악마로 취급했지만 동시에 돈과 시장, 자본주의가 최대한 발전하는 역사적 경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천국, 즉 공산주의가 출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악마적 똥구덩이 속에서 태동하는 지상천국, 부정성 속에서 발전하는 긍정성의 이러한 역사적·논리적 과정을 마르크스는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폴라니와 크로포트킨, 네그리
그에 반해 돈(화폐)과 시장, 국가와 자본이 즉각적으로 폐지되는 것을 꿈꾸는 저자들의 관점은 성숙한 시절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초기의 마르크스, 즉 <유태인 문제>와 <경제학 철학 초고>를 쓰던 시절의 마르크스로 회귀하자고 호소한다. 서구의 68혁명과 함께 본격화된 신좌파의 마르크스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신좌파 사상의 특징 중 하나가 '역사의 변증법'이 아닌 윤리학으로의 복귀, 도덕적으로 완벽한 유토피아에 대한 공상, 즉 헤겔로부터 칸트로의 회귀, 마르크스로부터 프루동으로의 회귀에 있다.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부른 칼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 역시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론적 비판과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도덕론적 탐구(자본주의 '이전'의 선물경제(gift economy)에 대한 도덕적 찬사에 근거한)에 집중한 바 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선물경제와 교환경제(화폐경제)에 관한 폴라니의 논의를 이어받는다.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Wikimedia Commons |
저자들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폴라니와 크로포트킨, 네그리 등이 하나로 연결되는 사상적 흐름을 형성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진보적 정치 세력 중 좌파의 논의, 특히 녹색사회주의 또는 녹색주의를 내건 이들의 구상과 논의가 바로 이러한 사상적, 세계사적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보편적 복지국가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의 담론과 논의는 자율주의 공동체가 아닌 민족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복지국가를 최대한 발전시키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본권력의 즉각적 폐지를 염원하는 저자들은 1970년대 이래 서구 경제의 특징인 대량실업, 특히 대량의 청년실업과 청년 비정규직의 만연 현상을 '치유가 필요한 질병'이 아닌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현상', 게다가 '노동 없는 유토피아'의 구현을 위한 '좋은 조건'으로 간주하는 앙드레 고르의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요즘에는 제레미 리프킨이 이러한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데, 앙드레 고르와 제레미 리프킨 등의 이러한 시각은 곧바로 기본소득론(basic income)으로 이어진다. 기본소득론의 주장은 아나키즘의 전통을 잇고 있는 서구의 좌파적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의 흐름 속에 있는데, 이것은 국가의 경제개입(state interventionism)을 일체 반대하는 우파적 자유시장주의 즉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알바' 일거리에 의존하는 프레카리아트 청년들 또는 아예 구직을 포기한 청장년 실직자들에게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써 아예 그들로 하여금 '자본권력에 구속된 임금 노예 신세'로 전락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자는 기본소득론의 주장은, '자본권력의 즉각적 폐지'라는 매우 혁명적인(?)인 목표를 그 뒤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장 경제에 대한 깊숙한 '국가 개입'을 통해 완전고용 또는 양질의 일자리(decent job)를 제공하고자 하고, 그런 양질의 일자리 확대를 통해 세금수입(근로소득세 및 4대 보험료 세수)의 확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복지국가론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를 읽는 재미는 이렇듯 돈(화폐)과 시장, 자본, 국가, 그리고 계급이 없어진 유토피아적 세상을 즉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저자들의 관점(그리고 우리나라의 좌파 인사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관점)이, 지난 200년 역사 속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론과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론과 얼마나 다른지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더구나 그러한 논의를 하나의 일관된 사상적, 논리적 흐름 속에서 읽어나갈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저자들의 관점에 찬성하건 아니면 비판적이건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 계획-계산 논쟁과 한국의 박정희 경제체제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일반적인 독자들에게는 난해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원조인 경제학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대한 보다 깊은 비판적 이해가 그것이다.
1920년대 유럽에서는 '계획 경제가 이론적-논리적으로 가능한가'를 놓고 치열한 경제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유명한 '사회주의 계획-계산 가능성' 논쟁인데, 이 논쟁에는 계획경제의 기술적 토대인 경제계산 가능성을 부인한 미제스-하이에크와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오스카르 랑게가 대표자로 참여하였다. 이것은 순수한 이론적 논쟁을 넘어, 당시 막 출범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시작된 계획경제, 그리고 192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집권한 사회민주당이 추진한 경제의 사회화와 계획경제의 승패 여부에 대한 논쟁이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계획경제 실험의 실패를 예언했고, 오스카 랑에와 같은 (신고전파 수학 모델에 기초한)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은 계획경제의 성공을 장담했다.
랑에는 미적분과 편미분 방정식, 최적화 모델 등 다양한 수학적-물리적 모델에 기초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랑에의 '신고전파 사회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패러다임 자체(따라서 경제의 수학적 모델화의 유용성)을 부인했다. 지금도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학파는 신고전파 경제학과 이 점에서 차별화된다.
▲ 경제학자 오토 노이라트. ⓒ출처 www.stroom.nl |
더구나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노동 크레디트 시스템 - 그게 작동 가능해?
물론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노이라트라는 인물이 주목받는 이유는 화폐(돈)가 사용되지 않아도 작동할 수 있는 자율주의적 생태 공동체의 경제학적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들은 그러한 경제가 경제학적으로 작동 가능하다는 노이라트의 신념과 함께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 이 책 7장 '비시장 사회주의: 화폐는 사라져야 한다'의 저자 애덤 뷰익은 화폐(교환가치)의 계산이 아니라 현물(사용가치·유용노동과 에너지·엔트로피 등으로 표현된)의 계산을 중시한 노이라트의 경제사상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장과 9장에서는 실제로 화폐를 폐지하고 돈 계산(화폐 계산)이 아닌 현물 계산과 그리고 유용노동의 교환에 기초한 소규모 공동체들(미국의 트윈 오크스 공동체, 스페인의 스쿼터 공동체)의 작동 원리를 소개한다. 이 공동체 생활 묘사가 아주 상세하고 재미있다.
▲ 노동이론가 앙드레 고르. ⓒ출처 www.esprit68.org |
그런데 절친한 친구들,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선물경제'에도 많은 갈등과 '상처받음'이 존재한다. '나는 네게 이만큼 해주었는데, 너는 내게 이것밖에 안해주냐'며 삐치는 경우도 많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서로 취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오해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묘사되는 미국과 스페인의 소규모 협동공동체의 삶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 취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의 규율 하에, 그것도 서로 뭔가를 공유하고 교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즉각적으로 아무런 갈등도 없는 무한애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 공동체적 살림살이가 지속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책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여 하나의 가정을 꾸려서 살아가는 가족·가정이라는 제도가 그런대로 지속 가능한 만큼이나(더구나 복지국가가 가족과 개인을 후원할 경우 그런 가정공동체, 자율 공동체는 더욱 융성할 텐데), 저런 소규모 공동체는 특정 조건 하에서 작동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특정 조건 하에서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자율주의 공동체들은 예외 없이 도시가 아닌 농촌, 즉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식품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촌에 뿌리내리고 있다.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는 생필품의 자급자족이 거의 불가능하고, 돈(화폐)을 주고 시장에서 교환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저자들이 말하는 자율주의적 비화폐, 비시장 공동체가 큰 범위에서 작동 가능한 곳은 아직까지 도시화, 공업화가 덜된 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아닐까? 실제로 저자들은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에서 목격되는 "경제적 미발달과 후진성은 위기가 아니라 호기"라고 말하면서, 경제성장과 공업화,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미혹에 더 이상 빠지지 말고, 수천 년간 유지되어온 전통적 생태농업과 그 농부들의 지혜에 의존하는 비화폐, 비시장 공동체를 넓혀나가자고 말한다. 전근대적 삶과, 더 나아가 원시 공동체의 살림살이가 훨씬 더 생태친화적이라고도 말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리고 생태사회주의를 말하는 우리나라의 진보 좌파에서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다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5000만 국민의 대다수가 이미 도시에 살고 있고 화폐경제,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있다. 이 사람들더러 모두 귀농해서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만들자고 해야 하나? 아주 일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불가능하다.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도시 속에, 화폐 경제와 시장 경제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들에게 '돈 걱정' 없게 살 수 있게 하려면, 게다가 보다 자연 친화적인 살림살이를 만들게 하려면 보편적 복지국가와 대대적인 국가개입이 필요한 게 사실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국가개입 경제를 민주공화국이 수행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민주공화국이 보다 참여민주주의(숙의 민주주의)의 정신에 맞게,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연대의 정신에 맞게 운용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현실에 맞는 길이 아닐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