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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만 '해골', 왜 죽지 못하고 떠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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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만 '해골', 왜 죽지 못하고 떠도나

[프레시안 books] 위화의 <제7일>

차(差)는 흥미롭게도 양(羊)과 곡척(曲尺)이 결합한 회의자이다. 무리 짓는 것이 특징인 양과 곡척에서 인신된 공장(工匠), 노동(노동자)이 어울려 일을 분담한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후 어긋남, 다름, 뒤떨어짐, 틀림의 뜻이 파생되었다.

사람을 포함하여 세상만물은 각기 나름의 본색을 지닌다. 실질과 명목이 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강목(綱目)이나 과속(科屬)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동일한 특징을 지녔다는 종(種)도 각기 다르다. 이렇듯 다름은 자연계의 속성일 뿐 계급의 차이나 가치판단의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아마도 부계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들은 낮과 밤처럼 남녀를 구분하고, 씨족과 부족끼리 서로 다투고 합쳤으며, 계급으로 차등을 두고, 존비로 위아래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구분하고 연합하며, 분해하고 확립함으로써 자연계에서 가장 열세였던 인간은 자연계의 총아의 자리를 꿰찼지만, 가장 저열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접어들었고, 모든 차이는 곧 가치판단의 척도가 되고, 우량과 저열의 기준이 되어 피아간의 투쟁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 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약간의 교정과 부정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예를 들어 공자는 인(仁)을 통해 엄격한 계급사회를 사람과 사람의 온화한 관계로 만들려고 애썼으며, 노자나 장자는 아예 기존 체계와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도'를 통한 제물(齊物: 물여일체物如一切)과 무위(無爲), 심지어 무아(無我)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적지 않은 이들이 다름으로 인한 차별과 격차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애썼다. <예기> '예운(禮運)'에 나오는 '대동세계(大同世界)'는 바로 그런 소망의 정점에 있다.

▲ <제7일>(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하지만 인간은 그 이전의 소강(小康)사회조차 제대로 만들어낸 적이 없다. 꿈은 있는데,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기에 마치 무지개처럼 달려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결국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별유동천(別有洞天)! 또 다른 세상.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했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피안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2005년 <형제>(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를 발표한 후 7년 만에 새롭게 발표한 위화(余華)의 소설 <제7일(第七天)>(문현선 옮김, 푸른숲 펴냄)을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은 '차이(差異)'였다.

우선 그의 소설 내용이 이전과 많이 달랐다. <인생(活着)>(백원담 옮김, 푸른숲 펴냄)이나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최용만 옮김, 푸른숲 펴냄), <가랑비 속의 외침(在細雨中呼喊)>(최용만 옮김, 푸른숲 펴냄) 등에서 볼 수 있다시피 그의 이전 장편 소설은 주로 자신의 과거사에서 소재를 삼거나 1958년 중공중앙에서 제기한 삼면홍기(三面紅旗: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일어난 문화대혁명 시기에 머물렀던 것에 반해 이번 소설 <제7일>은 시기적으로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를 담고 있으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목도한 것을 중요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 자신이 겪은 것과 목격한 것은 내용은 물론이고 서술 방식이나 시각 또한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의 차이 역시 작가의 의식이나 서술태도의 차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 또는 시각 변화는 이미 <형제>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형제>의 상편은 시기적으로 문화대혁명까지 형제의 성장기를 담고 있으며, 하편은 이후 개혁개방을 통해 사회에 편입된 형제의 차이와 변화를 담고 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작가는 현실과 맞부딪치겠다는 의식을 번뜩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첨예화된 의식은 2010년에 발표한 산문집 <10개 단어 속의 중국(十個詞彙裏的中國)>(<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펴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일종의 자전적 산문집이자 지금의 중국사회에 대한 르포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일부 내용에서 <제7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제 7일>은 세 가지의 간선(幹線)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화자인 나(양페이楊飛)의 성장사이고, 다른 하나는 음계(陰界), 그것도 시신을 누울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화자가 듣고 본 내용이며, 마지막 하나는 양계(陽界), 즉 지금의 중국에서 직접 목격한 일들이다.

양페이의 성장사는 그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결코 순조롭지 못하다. 모친이 열차 변소에서 용변을 보다가 돌연 세상에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하고, 함께 살았던 아내가 남의 여자가 된 후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도 그러하며, 뜬금없이 밥을 먹던 식당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는 것도 그러하다.

그가 빈의관(殯儀館: 화장터)에서 만난 이들, 죽어서도 쉴 곳(묘지)이 없는 이들의 삶도 구차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짝퉁 아이폰 4S를 생일선물로 받고는 극도로 상심한 나머지 투신자살한 류메이,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관을 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아야만 했던 우차오, 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며칠 전 과속으로 달려오는 BMW에 치여 도로에 떨어졌다가 이어서 달려오던 트럭과 미니밴에 납작하게 깔려 죽은 리웨전 아줌마, 의료 쓰레기로 버려진 스물일곱 구의 영아 시체들, 강제 철거로 인해 살던 집에서 압사하고 만 정샤오민의 부모, 정신병이 든 아내를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총살형을 당한 사내, 그리고 주인공인 화자를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병이 들어 생을 마감한 양부 양진뱌오와 화자의 아내 리칭 역시 구겨지고 버려져 아무런 희망조차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들이지만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시신이 쉴 곳조차 찾지 못해 음계를 떠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세상에 우리를 위해 상장(喪章)을 달아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를 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록 썩거나 훼손되어 거의 해골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더 이상 슬픔이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모두 죽어 평등한 곳에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평등한 땅에서 그들은 매장조차 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원망이나 비난도 하지 않으며, 그저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뿐인데도 여전히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뿐이다. 해골로.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도대체 어떤 지독한 차별이, 무슨 엄청난 까닭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중국은 유럽이 16세기 이후 근 5백여 년 동안 서서히 변화시켜왔던 사회체제를 겨우 40여 년 만에 급속도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출하는 사회 문제와 모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를 거대한 격차로 벌려 놓았다. 더군다나 건국 후 추진했던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과 지금의 중국식 사회주의 모습은 '전도(顚倒)'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때 중국 공산당의 주력이었던 노농병(勞農兵: 노동자, 농민, 병사), 특히 노동자와 농민은 가난과 빈곤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장을 찬 이들은 여전히 호위호식하며 죽어서도 VIP 대접을 받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은 격차가 몹시 심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한쪽은 휘황찬란하고 평탄한 길이며, 다른 한쪽은 각박하고 가파른 절벽 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이상한 극장에 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곳은 같은 무대에서 절반은 희극을 공연하고 절반은 비극을 공연하는 극장이다."

"빈곤과 기아 역시 중국 도처에 만연하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귓가에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 앞에서, 아니 어쩔 수 없다고 허망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앞에서, 위화는 피폐해지고 공허해졌다. <제7일>에서 "아줌마와 스물일곱 구의 영아 시신이 불가사의하게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도시에 퍼졌을 때" 작가는 화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첩첩이 이어진 푸른 숲에서 걸어 나오듯 점차 복잡해지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피폐해진 생각은 누워 쉬도록 하고, 몸만 앞으로 나아갔다. 한도 끝도 없는 혼돈과 소리도 숨결도 없는 공허함 속을 걸었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가 없고, 물속에는 헤엄치는 물고기가 없으며, 대지에는 생장하는 만물이 없었다."

단순한 분노와 초조감은 이미 벗어난 지 오랜 듯한 느낌이다. 제7일은 하느님께서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기 때문에 손을 떼고 쉬시는 날이다. 그날 소설 속 화자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나고, 슈메이를 안식의 땅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미 안식의 땅으로 떠난 그녀를 찾아온 우차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말했다.


차이의 이(異)자는 벽사(辟邪) 가면을 쓴 무당이 춤을 추는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자이다. 다름의 정점은 어디인가? 삶과 죽음 아니겠는가? 그것이 '차이'의 종점이다. <제7일>은 그 종점이자 정점의 군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차별받고, 내세에서조차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오히려 평등한 곳이고, 자유로운 곳이며, 무엇보다 차별이 없는 곳이다. 현실에 대한 지독한 환멸이나 막다른 곳에 이른 이의 환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누군가는 위화의 최신 소설 <제7일>이 흥밋거리 기사를 뒤섞어 만든 잡동사니와 같다거나 왕년의 그답지 않게 인물형상이 밋밋하고 문학성이 뒤떨어진다고 혹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한 말, "처음에는 세속을 위해 썼지만 나중에는 미학을 위해 썼고, 지금은 오웰이 말한 것처럼 정치를 위해 쓴다"는 말을 믿는다. "정치를 위해 쓴다(爲政治寫作)"는 말은 "정치를 위해 복무한다(爲政治服務)"와 정반대의 뜻이다.

▲ <형제>(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2012년은 마오쩌둥의 <연안 문예좌담회 연설(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연안문예강화) 발표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바로 그 해에 발표된 <제7일>은 정치를 찬양하라는 연안문예강화의 뜻과 정반대로 정치를 고발, 비판하고 있다. 물론 정치를 위해 쓴다고 해서 문학성이나 예술성이 배제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정치를 위해 쓰려면 어느 정도 노골적인 것을 면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처음 위화의 작품을 접한 것은 1999년이다. 당시 나는 <제주작가>에 실릴 위화의 단편 '1986년'을 번역하고 있었다. 광기와 죽음, 그리고 망각에 대한 단상이었으나 작품의 짓누르는 무게가 상당했던 기억이 난다.

근 20여 년간 아무데도 억매이지 않은 자유 작가였던 위화는 2005년 항저우 시 문련(文聯)에 가입하여 일정한 급료를 받는 전업작가가 되었고, 2007년 항저우 사범대학에 설립된 '위화 연구 센터'에서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은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저명 작가가 되었다. 중국의 변화는 곧 그 개인의 변화와 직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설의 사회적 가치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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