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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육군도 존경하는 '동방의 武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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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육군도 존경하는 '동방의 武人'

[동아시아를 묻다] 지압 장군을 보내며

붉은 나폴레옹?

10월 4일, '붉은 나폴레옹' 보 응우옌 지압이 세상을 졌다.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온 몸으로 감당했던 군사 영웅이 눈을 감은 것이다. 향년 102세, 오래 사셨다.

이름부터 남다르다. 한자로 풀면 '武元甲', 무의 으뜸이라 하겠다. 프랑스 식민 통치 70년에 종지부를 찍은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부터 떠오른다. <손자병법>, 마오의 유격전과 더불어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도 학습할 만큼 유명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군사적 승리로 식민 모국을 격퇴시킨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도 하겠다.

그에 걸맞게 10월 12일과 13일, 국장이 열렸다. 10월 10일 수도해방일까지 겹쳐서 하노이는 한 주 내내 붉은 깃발로 숙연했다. 덕분에 수많은 인파 속에 두 시간을 기다려 꽃 한 송이 헌정하는 진귀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실상에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다. <타임> 표지에 세 차례나 오를 만큼 서방에서 큰 주목을 끌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지압 장군은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1968년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 또한 그의 반대를 거스르고 단행된 것이었다. 4만 명 이상의 인민군을 희생시킨 참담한 군사적 실패였다.

이듬해(1969년) 호치민이 사망하자 지압의 입김은 더욱 약해졌다. 그래서 베트남 통일의 주역이 되지도 못했다. 사이공(호치민) 함락은 군부 내 경쟁자였던 반티엔둥(文進勇)이 진두지휘했다. 호치민도 다르지 않았다. 체(Che!), 마오(Mao!)와 더불어 호(Ho!)는 68 혁명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이었지만, 그 또한 하노이에서는 2선으로 물러난 처지였다.

1963년 이후 호와 지압을 대신한 것은 레주언과 레득토였다. 즉,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과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캄보디아 점령과 중월 전쟁)의 주체는 명명백백 레주언과 레득토이다. 그들의 시점에서 베트남 전쟁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75 : 동방에서 동구로
▲ 보 응우옌 지압((1911~2013년). ⓒwikipedia.org

레주언은 호치민과 서먹했다. 호칭부터 달랐다. 베트남어의 특징은 상대방을 가족의 일원으로 부르는 것이다. 회사에서 만난 이들도 형과 아우, 누나와 오빠이다. 그럼에도 레주언은 줄곧 호에게 낯을 가렸다. 늘 자신을 '저(Toi)'라고 말했다. '또이'는 낯선 사람이나 격식을 차릴 때 사용하는 1인칭 대명사이다. 베트남의 언어 생활에 비추자면 매우 예외적일 뿐더러 어색하기조차 하다.

일단 호치민과의 경험이 부족했다. 지역적 차이가 두드러진다. 호와 지압은 중국 국경 및 하노이 일대의 홍강 델타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반면 레주언과 레득토는 메콩 델타를 거점으로 남부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광시(廣西)성 근처에서 중국과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다.

또 항불 전쟁을 함께 수행하고 초기 사회주의 건설을 지원했던 중국 고문단과도 소원했다. 남부 '해방'에 대한 집념이 강한 레주언으로서는 중국과의 돈독한 유대를 바탕으로 북베트남을 이끌어 가는 호치민이 못마땅했을 법도 하다. 실제로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남북 분단에도 그는 내심으로 불만이 매우 컸다. 그래서 <남베트남 혁명 노선>이라는 문건을 몸소 작성하기도 했다.

1957년 월북한 레주언이 북베트남의 권력을 탈환한 것은 1963년이었다. 분단 체제의 역동성이 한몫 했다. 그해 일어난 남베트남의 쿠데타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북에서도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어 남부 투쟁 '지원'이 의결되었다. 레주언이 주도한 사실상의 쿠데타였다는 견해도 있다. 남부의 무력 투쟁을 '지휘'하기 위해 당내 온건파들의 제거와 숙청이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1975년 사이공 함락을 '통일'이 아니라 '병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출되고 있다. 또 1978년 프놈펜 점령까지 아울러 북베트남의 확장이라는 연속적 시각에서 파악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사이공 함락을 주도했던 반티엔둥이 프놈펜 점령을 지휘했었다. 주력 부대 및 군사 작전 또한 유사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남진)에 이어 캄보디아(서진)까지 진출한 모양새이다. 한 세기 전, 대남제국의 재림에 방불했던 것이다.

증언은 여럿이다. 세 사람만 주목한다. 먼저 1973년 파리 협상을 회고한 헨리 키신저이다. 제3세계 민족 해방을 상징하던 신화와는 달리 북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레득토는 '우리는 동남아의 프로이센이다. 인도차이나 뿐 아니라 동남아를 지배하는 것이 베트남의 사명'이라고 했단다. 과장과 왜곡의 혐의가 없지 않다. 그러나 전혀 근거가 없는 날조 또한 아닐 것이다.

폴 포트 또한 비슷한 인상을 공유했다. 그는 프놈펜 '해방'을 두고 반티엔둥과 피 마르는 속도 경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북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에 도착하기 이전에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해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해방'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불신은 1965년 레주안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싹텄다. 레주언은 '남베트남의 해방을 이루고 나면,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해방을 인도차이나 혁명의 차원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단다. '킬링필드'의 비극을 초래한 역사적 맥락이기도 하다.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 주요 도시에는 베트남에서 훈련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친베트남적 성향이 농후한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도시 소거마저 단행한 것이다. 그만큼 폴 포트는 베트남에 대한 신경증이 극심했다.

내부 고발자도 있다. 타인 틴(Thanh Thin)은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의 발기인으로, 임시 혁명 정부의 법무장관까지 역임한 고위 인사였다. 그랬던 그가 '통일' 이후에 프랑스에 망명하여 베트남공산당의 내부 사정을 폭로한 것이다. 그가 피력한 견해 또한 키신저나 폴 포트와 유사하다. 베트남 통일은 사실상의 '병합'이었다는 것이다. 해방민족전선이 남베트남 정권에 저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꼭 북베트남식 사회주의를 도모했던 것은 아니다. 즉 남쪽의 혁명 정부와 북쪽 정부의 점진적인 통합을 원했지, 북에 의한 남의 일방적 흡수를 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민족전선의 일부는 해외 망명을 선택하거나 북베트남의 통일 기구인 베트남조국전선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병합'은 지나친 명명이다. 무력을 통한 '흡수 통일'이 적절해 보인다. 흡수 통일 끝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명했고, 베트남노동당 또한 베트남공산당으로 거듭났다. 사이공이 호치민으로 바뀌기도 했다. 파장은 서쪽에도 미쳤다. 라오스에도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베트남과 우호 협력 조약을 맺고, 베트남군이 주둔했다. 캄보디아에도 동일한 협정을 요구했으나 폴 포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베트남의 직접 점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친베트남파가 장악한 위성 국가가 섰다. 1980년대, '붉은 대남제국'이 완수된 것이다.

'붉은 인도차이나'의 막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베트남은 1977년 소련이 주도한 동유럽 경제기구인 코메콘에 가입하고, 1978년에 정식 회원이 된다. 1979년에는 소련 함대와 잠수함까지 베트남에 진주했다. 깜라인(Cam Ranh) 만은 소련의 최대 해군 기지가 되었다. 레주언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체코 점령과 '제한 주권'을 옹호했던 바 있다.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과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또한 동시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다. 급속하게 인도차이나의 '동구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신냉전을 야기하는 자충수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에 일본과 아세안이 합류하는 동아시아의 탈냉전에 역류하는 패착이었다. 베트남은 통일 달성과 무섭게 동남아의 외톨이로 전락하여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했다.

혹 호와 지압이 권력을 유지했다면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퍽이나 달라졌을지 모른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한 필연만은 아니었을 법하다. 워싱턴 못지않게 하노이 또한 무거운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하노이의 주연은 단연 레주언이었다. 그는 북의 온건파와 남의 독자파를 소거해 가면서 통일 베트남을 건설했다.

북에서는 호치민의 동방파를 누르고, 남에서는 해방민족전선의 자주성을 억압하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캄보디아 점령은 '인도차이나 소비에트연방' 건설이라는 식민지기 '신청년 좌파'들의 염원을 때늦게 실현하는 측면마저 있었다. 과연 그는 1907년생, 호치민과는 스무 살 남짓한 차이가 났다. 프랑스의 신교육을 받고 소련의 신지식을 섭취한 '20세기 소년'이었다.

도이모이 : 다시, 동방으로

레주언이 사망한 것은 1986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도이모이가 선포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청년의 종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붉은 대남제국'도 해산 수순을 밟았다.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것은 1989년이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바로 그 해이다. 동구의 몰락과 캄보디아 철군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도 '인도차이나 연방'의 와해와 직결되었다. 캄보디아를 주권 국가로 승인한 파리 협정이 1991년 체결되었다. 그해 말 중국과 베트남도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공동 성명 가운데 다음 항목이 눈에 띈다.

"양측은 어떤 형태로든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들에게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 또는 발전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중국보다는 베트남에 뼈아픈 내용이다. 그 후 북부 경계를 접한 윈난(雲南)성과 광시성에서 국경 무역이 재개되었다. 1994년에는 아세안에도 가입하여 남쪽으로도 활로가 열렸다. 베이징에 망명 중이던 노로돔 시하누크가 고국에 돌아간 것은 1993년이다. 캄보디아는 사회주의를 지우고 입헌군주제를 복구시켰다. 국가의 형태도, 이념과 체제도 다르지만 상호 교류하고 협력하는 새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도이모이를 흔히 '쇄신'이라고 번역한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모방한 것이라는 오해가 적지 않다. 실상은 '동구화'의 이탈을 수정해서 동방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그래서 갱신(Renewal)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하다.

실로 도이모이 이래 베트남은 중국 모델을 학습하고 변용하면서 독자성을 유지했던 1000년의 유산과 흡사해지고 있다. '탈중국을 위한 중국화'의 동학이 재차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탈중국을 위한 서구화', '탈중국를 위한 동구화'의 100년의 역사가 청산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1945년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적 궤적 또한 '냉전'이라는 용어만으로는 좀체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동구와 서구, 동방의 길항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적합할 것이다. 즉 '중화 세계의 근대화'라는 장기적 구조 변동의 관점에서 20세기를 접근할 필요가 크다. 그 단기적 국면의 요인으로 동서 냉전이 자리했던 것이다.

그래야 탈냉전의 여로도 해명이 가능하다. 동구의 몰락은 서구로의 흡수로 이어졌다. 소련을 대신하여 유럽연합(EU)이 출범했다. 가히 '역사의 종언'에 부합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판이하다. 여전히 중국과 베트남과 북조선, 라오스가 건재하다. 한쪽 체제의 일방적 와해와 흡수가 아니다. 도리어 중국의 부상이 돌출한다.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여전하면서도 지역적 협력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북방과 중원, 남방이 서로 다르면서도 어울렸던 오래된 유산의 복원이다. 그렇다면 동구와 서구가 강요하는 '가치 동맹'을 거스르며 1954년에 제기되었던 '평화 공존 5원칙' 또한 '근대화된 중화 질서'라고 접수함직하다. 유럽과는 전혀 상이한 동방형 탈냉전의 단초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의 탈냉전은 역사의 종언은커녕 역사의 재출발, 역사의 반전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반전하는 역사를 '재중화'로 파악한다. 탈중화(de-orient)와 재중화(re-orient)의 길항이야말로 동아시아 '냉전'의 요체였다. 다만 '재중화'가 중국 중심적 질서의 회귀라는 뜻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다양한 정치체가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복합계적 질서의 발현이라고 하고 싶다. 그 편이 서구에 맞서면서도 동구에도 기울지 않았던, 그래서 '인도차이나'의 미망을 품지도 않았던 지압 장군의 저항 정신과도 상통하지 않을까.

즉, 동/서구의 전사가 아니라 '동방의 무인'으로서 그의 삶과 죽음을 담백하게 기리고 추모하고 싶다. 그렇다면 동/서구를 조합한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어설픈 수사 또한 이제는 거두는 편이 낫겠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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