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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체험, 그 급작스럽고 눈부신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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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체험, 그 급작스럽고 눈부신 무지개

[프레시안 books]<문학의 행위><베케트에 대하여><소진된 인간>

안녕하십니까?의 대답은 네 안녕하세요가 적당하다. 헤어질 때 인사는,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대접을 받았으면, 감사합니다가 맞다. 풍속의 건물을 이루는 레고 조각들처럼, 말들은 다 짝이 있다.

수업 시간엔 허튼 소리를 하면 안 된다. 미친 소리를 해서도 안 된다. 침묵으로 10분, 20분 보낼 수도 없다. 택시를 탄 것처럼 정해진 시간 동안 미터기가 올라가니까, 봉급으로 가격이 매겨진 만큼 열심히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은 경제적으로 측정된다.

회사에서 놀고 있는 노동력을 보았는가? 노동력은 생산에서 소진된 뒤에도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노동력이 자기 자신과 온전히 직면하는 사태, 즉 쓸데없이 밤거리를 배회하다 과음을 하고, 허튼 연애를 하고 등등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말도 그렇다. 말은 정해진 코드에 맞게 등가물을 만나 서로 호응하고, 분명하고 신속하게 (즉 경제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나서 소멸해야지 할 일 없이 서성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말은, 뭔가 계산이 맞지 않다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찝찝한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잉여의 말이 남아 어떤 의미 전달의 기능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스스로와 대면하는 일, 즉 말 자체가 전달될 의미나 사용될 쓰임과 독립한, 하나의 독자적인 사물, 바로 시(詩)가 되는 일은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문명의 가르침이다.(아, 물론 문화의 머리 꼭대기를 장식하는 일종의 권위로서의 시나 문화의 중간을 두텁게 채우는 장식물로서의 시나 문화의 아랫바닥에 퍼져 있는 여흥으로서의 시는 늘 있어왔지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문학은 아닌 듯 하다.)

▲ <문학의 행위>(자크 데리다 지음, 데릭 애트리지 엮음,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그런데 바로 이런 도태된 언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언어가 어디선가 비집고 나온다. 문화는 완벽하지 않으며, 언어는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때 뭔가 부족하게 그 일을 해버리고 만다. 대화는 공허하고 그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관계는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이렇게 문화 안에 나 있는 균열, 상처 자국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언어, 문학의 언어가 있다.

이런 문학의 언어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사뮈엘 베케트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살펴보는 세 철학자의 세 권의 문학론은 모두 베케트와 연관성을 가진다. 알랭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서용순·임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는 베케트의 텍스트를 징검다리 삼아 바디우가 자기 사상의 주요 주제를 전개하고 있는 책이며, 질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이정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베케트가 말년에 쓴 텔레비전 단막극에서 사유의 불씨를 이어받아 불을 지핀, '소진됨'에 대한 성찰이다.

자크 데리다의 <문학의 행위>(데릭 애트리지 엮음,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이 책에도 베케트 론이 있는가? 데리다의 책에는 베케트 론이 실려 있지 않은데, 바로 그 자격으로서 그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베케트 론이 된다. 데리다는 <문학의 행위>에서 자신이 베케트 론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불어에 제가 보기엔 너무나 정도가 센,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수술을 행하고 또 이 표현들이 관용구가 되도록 만드는 이런 사람[베케트] 이후에, 또 이 사람과 '더불어,' 무슨 수로 제가 같은 언어로 글을 쓸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가 학생들과 같이 베케트의 텍스트들을 읽을 때면 저는 세 줄에 두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 포기해버리곤 합니다. 베케트의 텍스트들로부터 몇 줄의 '의미심장한' 대목들을 건져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솔직하지도 않고 심지어 별로 흥미로운 일도 아니거든요."


▲ <소진된 인간>(질 들뢰즈 지음, 이정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베케트는 프랑스어에 수술을 해서 구멍을 낸 작가, 말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말 자체를 소진시킨 작가이다. 그런데 거기서 뭔가 (철학적, 윤리적, 상투적 등등)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베케트가 힘들게 와해시킨 기존의 언어를 가장 못나게 복원시키는 것이다.

들뢰즈와 바디우 역시 베케트 문학의 특성인 저 말의 와해에 관심을 쏟고 있다.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소진'을 화두 삼아 베케트에 접근한다. 소진된다는 것은 베케트 작품에서 사물의 소모, 목소리의 고갈, 공간의 쇠진, 이미지의 소멸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나타나는데, 이 모든 소진은 결국 언어의 소진이다. 책의 말미에서 들뢰즈는 "말들의 표면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간단한 분절어들"이 이 되어 버린 베케트의 시 한구절을 읽고 있다.

이……로 보건대 광기―
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것―
바로 이것―
여기 이것―
바로 여기 이 모든 것―
이 모든……것으로 주어진 광기—
……로 보건대―
(하략)


이 시구는 말을 추구하기 보다는 말로 들어서기 전의 재료, 그리고 리듬과 질서로 이루어진 말보다는 침묵을 향해 기울고 있는 말에 관심을 가지는 베케트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케트는 처음부터 말의 조직에 구멍을 냄과 동시에 조직을 증식시키며 나아가는 어떤 문체를 찾았다."

그러면서 그는 말의 와해라는 소진으로부터 "말들의 어떤 구원"을 희구한다. 그것은 기존의 문화와 그 문화를 보호하는 언어에 생긴 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일 것이다.

들뢰즈가 언어의 와해를 '소진'이라는 이름 아래서 사유하고 있다면, 바디우는 그것을 '소음'이라는 형태 속에서 숙고한다. 때로 바디우는 이 '소음'을, 흥미롭게도 들뢰즈의 '소진'을 떠올리는 베케트의 표현인 "쇠약한 쓰러짐"으로 부르기도 한다. 베케트의 구절을 먼저 읽어 보자.

"조사하는 동안 갑자기 들리는 소음.……쇠약한 이례성으로 약화되지 않으면 잠시 후 강화되는 쇠약한 쓰러짐. 둘. 언제나 그의 고문에서 모든 것인 눈에서 멀리 희망의 미광이. 이 겸허한 시작의 은총을 통해."

당신은 이 글에 인용되고 있는 베케트의 구절을 어떻게 접하고 있는가? 이 구절과 더불어 어떤 이에겐 당혹감 또 어떤 이에겐 만족감이 찾아들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누구든 간에 어떤 서사에 대한 기대도, 명확한 묘사도, 완결된 문장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게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바디우의 베케트론은 저렇게 깨진 화분에서 나온 흙과 뿌리 같은 언어의 부스러기들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심스레 옮기듯이 사유를 진행해 나가고 있다.

다시 문맥으로 돌아와, 베케트의 저 구절에 대해 바디우가 사유하고 있는 바를 읽어보자.


"더더욱 중요한 것은 '쇠약한 쓰러짐'이 소음의 갑작스러움의 이름으로, 잘못 보이는 것에 대한 시적 도박으로 일단 진술되고 나면, 그때, 바로 그때 비로소 '희망의 미광'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언어의 소진에서 "말들의 어떤 구원"을 바라보는 것처럼 바디우 역시 언어의 "쇠약한 쓰러짐"에서 "희망의 미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는 구체적으로 이 희망을 "진리에 대한 희망"이라고 명시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어떤 희망인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희망이다. 회색 암흑의 삽입 속에서 다가올 진리, 곧 스스로 사라질 사건을 명명하는 것에 달려 있는 진리 말이다."

바디우의 사상의 핵심을 요약하면, 기존의 질서와의 단절이 바로 그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사건 속에서 비로소 진리들이 개시된다. 바디우는 바로 이런 사상을 베케트에게 투영시키고 있는 중이다. "소음-사건의 이름이 시적 창안이라는 것", 그리하여 소음 사건을 일으킨 베케트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건너다볼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진리들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케트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베케트에 대하여>(바디우), <소진된 인간>((들뢰즈), <문학의 행위>(데리다)는, 말의 와해를 통해 찾아오는 핵반응처럼 눈부신 앞날의 구원과 진리의 가능성을 공통적으로 사유해보고 있는 작품들이다.


▲ <베케트에 대하여>(알랭 바디우 지음, 서용순·임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물론 우리가 짧게 살펴본 것 외에도 이 책들에 대한 수많은 풍성한 독법이 남아 있다. 들뢰즈와 바디우의 떠들썩한 논쟁적 관계를 투영시켜서 두 저자의 베케트 론에서 대척지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재미있게도 들뢰즈는 베케트에게서 스피노자를 읽어내며, 바디우는 데카르트와 후설의 그림자를 읽어낸다. 그렇게 두 개의 상이한 철학사의 강줄기가 베케트의 대지로 흘러들어간다. 또 반대로, 양자의 서로 다른 관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 모두 공통적으로 베케트를 통해 타자 이론을 구성하려고 한다는 점 역시 두 책을 비교하는 독법이 놓칠 수 없는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이다.

베케트 론을 결여하는 방식으로 가장 베케트를 잘 구현한 데리다의 <문학의 행위>는 베케트 이외의 수많은 눈부신 문학적 성과를 주목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붙든다. 카프카, 조이스, 말라르메, 첼란 등에 관한 데리다의 주요 에세이를 편집해서 싣고 있는데, 문학에 헌정한 데리다의 글쓰기 전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 철학자의 세 권의 문학론은 현재 우리 문학계가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지 못한 지점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왜 철학자들은 문학을 원하는가? 이 철학자들의 문학론은 우리 식의 현장 비평도 아니며, 우리 식의 학술지에 실리는 문학연구물도 아니다. 신간에 대한 리뷰성 비평은 더더욱 아니다. 아울러 다양한 작품 분석에 사용될 수 있는 일반 이론 역시 아니다.(차라리 일회적인 문학적 체험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라 해야 옳으리라.)

그것은 명제나 추론을 넘어서는 언어적 체험 속에서 수행해 보는 진정한 사유의 실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통념은 물론이고, 심지어 명제를 통해 표명되는 진리도 넘어선 영역에 사유가 가닿고자 한다면, 그 사유가 필요로 하는 경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클리셰로 가득 찬 통상적 경험? 제한된 변수들 안에서 조직된 통계? 앙케트 식의 맥 빠진 인터뷰와 좌담? 그 어느 것도 아니며, 문학적 체험만이 바로 저 사유가 필요로 하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가 얻는 이 경험은 또 하나의 창조, 빗방울이 하늘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광선과 부딪쳐 깜짝 놀라며 무지개를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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