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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의 진실, 일본은 '동남아'-베트남은 '동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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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의 진실, 일본은 '동남아'-베트남은 '동북아'

[동아시아를 묻다] 동북아와 동남아

베트남과 일본

박근혜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직접 무대까지 오른 패션 외교가 큰 화제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하노이의 9월은 일본풍이 여실하다. 공항부터 시내까지 일장기가 곳곳이다. 2013년 올해가 '베트남-일본 우호의 해'인 까닭이다. 지난 9월 21일은 (북)베트남과 일본이 수교를 맺은 지 꼬박 4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정부 간 의례적인 행사에 그치지도 않는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양국의 방송국이 합작한 특별 드라마가 방영될 예정이다. 일본에서는 TBS가, 베트남은 VTV가 공동 제작에 참여해 양국의 유명 배우들을 섭외했다. 제목은 <더 파트너 : 사랑스런 100년의 친구에게>이다.

왜 '100년의 친구'일까? 궁금증이 일어 TBS와 VTV 사이트를 찾았다. 이야기는 당대의 베트남과 메이지 일본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모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종합상사 직원이 베트남에 파견되어 베트남 여성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의 뿌리를 더듬어 보는데, 100년 전 요코하마를 찾았던 판 보이 쩌우(藩佩珠)의 행적을 알아가게 되는 내용이다. 제법 흥미로운 짜임새이다.

판 보이 쩌우란 누구인가? 초기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역이다. 호치민 앞에 판이 있었다. 그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계몽 운동인 동유(東遊) 운동의 선구자였다. 일본 유학 운동이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날 길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그를 따라 200여 명의 베트남 신청년들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에게 메이지 '근대'의 경험을 선사한 일본인 친구들이 있었다. 즉 1973년부터 이어진 양국 인민의 우정은 비단 40년에 그치지 않는다. 100년 전 판이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다.

영판 틀린 얘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밟히는 지점도 적지 않다. 판의 동선과 사상적 행로는 일본으로 그치지 않았다. 친일파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에서 추방되고야 말았던 석연찮은 사실은 은근슬쩍 지워진 것인지 본방을 사수해 볼 일이다. 그 후 판은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아니 일본행부터가 중국의 영향이 컸다. 양무파와 변법파의 신학(新學) 서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접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활달하게 교류한 이도 량치차오(梁啓超)였다. 조선에서도 널리 읽힌 <월남망국기>도 량치차오가 권해서 집필한 것이다. 그 책이 조선에서 큰 호응을 얻은 데에는 자자하던 량의 명성이 한 몫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쑨원과도 교류했다. 그래서 신해 혁명 이후에는 판도 터전을 광저우와 항저우로 옮겨 활동한 것이다. 말년(1923년)에 쓴 명문 <하늘이여! 황제여!(Thin Ho! De Ho!)>에는 또 신청년의 기수, 후스(胡適)가 서문을 써주었다. 즉, 판을 베트남-일본만을 잇는 '100년의 친구'로 담기에는 몹시 부족하다. 생활과 사상 교류의 측면에서 도리어 친중파의 혐의마저 둘 수 있다. 그럼에도 양국이 그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호명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다. 부상하는 대국, 중국에 대한 견제 심리가 상통했을 법하다.

학술계도 40주년을 지나칠 리 없다. 지난 20일 하노이 대학에서 학술회의가 열렸다. 중국 견제론은 베트남의 역사 해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노이 대학에서 일본사를 가르치는 호앙 앙 뚜안의 발표가 대표적이다. 그는 17세기 베트남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조했다. 일본과 동남아, 인도와의 교류가 활발했고 이슬람을 거쳐서는 유럽까지, 마닐라를 통해서는 아메리카까지 연계되어 있었단다.

호앙은 이를 가리켜 초기 근대의 '일본 효과'라고 명명했다. 일본에서 유입된 은을 통해서 베트남도 통화와 유통 차원에서 글로벌 네트워크에 긴밀하게 편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견해이다. 다른 발표자를 통해서는 고고학적 증거들도 제시되었다. 베트남 각지에서 발굴된 일본 화폐가 있었고, 나가사키와 오사카 등지에서는 베트남 도자기가 발굴되었다.

전통적 모습이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호이안에는 일본인 마을도 남아있다. 류큐와도 긴밀했던 듯하다. 1509년에 이미 류큐 사절단이 대월(大越)을 방문했단다.

지금껏 강조되었던 중국의 영향력을 상대화하기에 충분한 논의들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배운 것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또 다른 편향과 과장의 혐의도 없지 않다. '일본 효과' 자체를 동아시아적 차원, 나아가 14~18세기의 글로벌 경제의 문맥에서 접근할 필요가 크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베트남 통화라는 '滿元古錢'이 과연 베트남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파된 것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베트남 도자기 또한 일본으로 직수입된 것으로 단정하기 힘들다. 아무래도 광둥, 마카오, 류큐, 마닐라 등 중층적 경로를 밟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호이안이나 다낭에도 일본인 마을만 있던 것이 아니다. 중국인 마을은 더욱 컸고, 인도와 이슬람 상인도 뒤를 이었다. 유럽인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 특히 서일본 출신의 왜구였던 것이다.

그렇게 바닷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글로벌 바닷길의 최종적 허브가 광둥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의 영향력과 '일본 효과'가 꼭 배치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지점은 그럼에도 당시의 물류망은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s, 자전거의 축(허브)과 바퀴살(스포크))' 구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일 중심에 다양한 주변이 종속되는 수직적 세계 체제와는 달랐다. 중국과 아시아가 주도하던 17세기 세계 체제는 다중심과 다주변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네트워크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 지구적 교역망의 구축에도 정치적 종속화, 경제적 식민화, 문화적 획일화는 드물었다.

작금의 변화는 그런 초기 근대의 모습이 새 천년의 도래와 함께 재등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과 인도와 이슬람의 집합적 부상과 더불어서 말이다. 이슬람이 유럽을, 인도가 아프리카를, 중국이 아메리카를 식민화할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왕년의 지구적 지역화, 혹은 지역적 지구화가 한층 업그레이드(renewal)되고 갱신(更新)된 형태에 가까울 법하다.

▲ 일본-베트남 우정의 해 공식 로고. ⓒ이병한

지정학, 지경학, 지문학

가장 흥미로운 발표는 오사카 대학의 모모키 시로(桃木至朗)였다. 사적인 연이 있다. 나는 그의 책과 논문을 무척 인상적으로 읽었고, 그의 블로그까지 자주 들락거린다. 하노이에 오면서 챙겨온 베트남과 동남아 연구서 가운데 그의 책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이토록 우연찮게 만나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모모키는 일본-베트남 관계와 비교의 지평을 동아시아 및 지구적 수준으로 활짝 틔웠다. 1000년 전 확립된 중화 모델의 확산과 수용의 관점에서 일본과 베트남, 고려/조선과 류큐 등을 함께 견주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 및 사회 형태는 '동남아 국가형'이었다는 매우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거론한 예는 무척 풍성했지만 학술적 경향이 물씬하니 일부만 풀어둔다. 애초 고대 일본은 쌍계제 사회로 천황의 부계 세습이 없었다. 여성 천황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쌍계제 사회는 동남아시아에 더욱 근접하다. 헤이안 시대의 통치 방식 또한 인격적이고 주종적 관계를 면치 못해 '동북아 국가형'의 관료제 국가와는 달랐다. 오히려 오늘의 태국(타이)에 자리했던 수코타이 왕국과 흡사했단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북아 국가형'의 성격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베트남이야말로 중국형 국가 모델을 일찍이 수용한 '동북아형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제를 통한 조숙한 지식 관료 체제를 운영했던 것이다. 즉 정치부터 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조의 다양한 측면에서 일본이 동남아이고, 베트남이 동북아라는 발상과 관점의 일대 전환이다.

곰곰 따져 보면 매우 설득력 있는 독법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불교 국가'에 가까웠다. 즉, 1000년 전 중국에서 확립되어 주변으로 확산된 '유교 국가'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류큐가 더 '유교 국가'에 근접했다. 그 차이의 핵심이란 보편적 이념을 내세우는 '인문 국가'였는가 하는 점이다. 즉, 근대 국가 이전 대부분의 정치 공동체는 '종교 국가'였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 종교가 권위의 궁극적 원천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였다.

이것이 처음으로 인문 국가로 전환된 것이 송대라 하겠다. 송이 최초의 근대 국가라는 점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성(聖)과 속(俗)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사회학에서 근대의 핵심 성격이라 말하는 '세속화', 혹은 '탈주술화'가 그것이다. 그래서 유교 국가 모델을 따른 조선 또한 경국대전이라는 헌법에 기초한 인문 국가였다.

그리고 그 보편적 이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한성(漢城)을 조성했다. 즉 한성은 전형적인 '인문 도시'이자 '계획 도시'였다. 그래서 사찰이나 교회, 모스크의 종교 권력이 아니라 학문의 전당, 성균관이 국가의 중추 노릇을 했다. 이곳 하노이에도 1000년 전에 세워진 '문묘'(文廟)가 구시가 복판에 자리한다. 최초의 대학(大學)이 들어섰던 오래된 터전이다.

결국 한·중·일이라는 상투적 어법은 20세기형 지정학의 산물이었다고 하겠다. 청일 전쟁 이래 지역 질서의 구조적 변동이 한·중·일 중심의 사고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1000년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연 일본은 늘 조금 멀찍하고 어긋났다. 일본보다 월남과 류큐가 더 유사하고 근접했던 것이다.

지정학과 지경학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지문학(地文學)', 즉 지리-문명과 지리-문화의 소산이다. 영영 지정학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릇 안보와 안위의 확보는 국가 경영의 제1철칙이다. 그러나 지방과 민간이 주도하는 지경학적 접근으로 지정학의 돌출을 상쇄하고 억제하는 집합적 지성과 지혜의 발현 또한 소중하다.

나아가 그 물적 기반을 토대로 지문학을 꽃피우는 인문 국가의 이상은 여전히 깊고도 드높다고 하겠다. 100년의 지정학만큼이나 500년의 지경학과 1000년의 지문학을 함께 아우르는 사유의 훈련이 긴요하다. 하노이에 머무는 1년 동안 차근차근 연마해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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