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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마르크스'를 호출해 논란을 자초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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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마르크스'를 호출해 논란을 자초했나?

[나는 반론한다]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에 답하다

서동진의 <인지 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서평(☞관련 기사 : 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 그리고 저자 조정환의 반론(☞관련 기사 : 마르크스주의 진화를 가로막는 진짜 '적'은?)을 뒤늦게 관심을 갖고 읽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와 가치론의 관계라는 경제학설사의 고전적이고도 무거운 주제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 그것도 <프레시안>이라는 대중 매체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서동진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가치론을 수정하는 저자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비판한 반면, 조정환은 가치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서동진의 지적은 마르크스주의를 화석화시킬 뿐이라는 반론을 폈다.

여기서 누구의 가치론 해석이 맞는가에 대한 '고루한' 논의를 반복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조정환이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그에 기반을 둔 착취론(잉여가치론)의 폐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다. 조정환은 앞서의 반론에서 서동진의 서평에는 가치법칙 맹신론에 입각한 폐쇄 순환 논리적 비판만 넘쳐날 뿐, 정작 책의 핵심인 인지 노동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전통적 가치론으로 인지 노동 착취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착취론의 재구성에 기반을 둔 인지 자본주의론을 정립한다는 그의 프로젝트의 주춧돌이다. 즉, 책의 전체 논리 전개로 봤을 때 가치법칙의 기각에 이르는 과정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 저자의 인지 자본주의론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조금 더 상술해보자.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착취, 잉여가치추출, 자본축적 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도출하기 위한 전제로서 마르크스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범주에 대한 논의가 책의 초반부, 제4장 "인지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의 문제"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을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즉 자본에 착취되는 노동'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생산적 노동 개념은 마르크스의 착취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할 부분이다. 특히 저자는 마르크스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범주와 물질/비물질 노동 범주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가고 있다. 현 단계의 자본주의 하에서 인지 노동(비물질 노동)이 노동의 주된 형태라는 것이 책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저자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이 비물질 노동도 포함하는지의 여부가 관건인 것은 당연하다.

이 논의를 통해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 개념에서 비물질 노동을 배제했다는 것, 나아가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오직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공장 노동(물질 노동)만을 가치의 원천으로 파악했다는 것, 따라서 그의 생산적 노동 개념과 가치론 그리고 착취론은 현재의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는 설명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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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 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이로부터 저자는 인지 노동 착취 현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가치론을 수정 (결과적으로는 기각)하고 그에 걸맞게 착취론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론들이 도출되는 논증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이 글에서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아래에서 전개될 내용이 누구의 마르크스 해석이 맞느냐 식의 소모적 논쟁으로 비춰지기 쉽고, 오히려 저자의 인지 노동 개념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현재적 이슈들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생산적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저저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주의의 틀 내에서 인지 노동 범주가 어떻게 도출되고 분석되는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르크스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인지 자본주의>의 이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에서도 '비물질 노동'이 핵심 개념인데 이 역시 마르크스의 '노동' 범주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그 밑바탕으로 하고 있고, 훨씬 이전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중원문화사 펴냄)도 결국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전개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당대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생산적'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구분을 자본-노동 관계의 맥락에서 재 정의했다. 그가 특히 비판적으로 경계했던 건 생산물의 물질성 여부를 기준으로 생산적 노동 범주를 규정하는 입장이었다.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정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생산물의 소재적 측면에 주목하여 물질적 형태로 존재하는 제품을 만드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하는 이중적 입장를 보인 아담 스미스가 대표적인 표적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혼란을 지적하면서 생산적 노동 개념은 생산물이 물질이냐 비물질이냐와의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앞서 지적했듯이 그는 생산적 노동을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자본이 아닌, 임금이나 이윤 등의 소득에 의해 사적으로 고용되어 개인적 소비에 사용될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은 그것이 비록 임금노동의 형태를 띤다 하더라고 비생산적 노동에 해당된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생산적 노동에 대한 위의 정의가 등장하는 동일한 텍스트들에 이와 상충하는 견해가 표명된다. 바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에 고용되어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은 주로 물질적 상품 생산에 집중되는 반면 비물질적 제품 생산은 사적으로 고용되는 비생산적 노동이 맡게 된다거나, 혹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비스노동(비물질 노동)이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적 노동 논의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언급들이 그것이다. 생산적 노동 범주에서 비물질 노동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엿보이는 대목인데, 이는 분명 비물질 노동까지 포괄하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정의와 충돌한다.

바로 이 딜레마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논쟁을 촉발시킨 주요 이슈들 중 하나였다. 이 논쟁에서 논평가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첫째는 마르크스의 일관되지 않은 관점을 비판하면서 생산적 노동 개념과 함께 노동가치론을 기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르크스에 대한 변호론적 접근으로, 여기에 속한 이들은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범주에서 제외하는 마르크스의 언급들이 논의의 전체적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들며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은 크게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논쟁이 깔끔하게 종결됐다고 할 순 없지만 많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두 번째 입장에 서 있다고 판단된다.

마르크스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개념에 대한 논의를 통해 결국 조정환도 이 딜레마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일단, 그는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상품의 물질성 여부와 무관하게 생산적 노동을 정의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개념에서 배제하는 마르크스의 언급은, 비물질 범주에 해당되는 교육, 의료, 법률 서비스 등이 오늘날처럼 자본에 의해 상품으로 생산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비물질 노동 배제는 '원리적 배제'라기 보다는 '경험적, 역사적 배제'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비물질 노동 배제는 단순히 '경험상 그렇다'의 차원을 넘어, 비물질 노동은 본성상 생산노동이 될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근본적 입장을 나타낸다고 추론한다. 결국,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마르크스의 두 가지 명제는, "인지 노동(비물질 노동)이 논리적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난점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조정환은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에 해당하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보자.

"인지 노동이 논리적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되기 어렵다는, 자신의 사유의 괴리를, [마르크스]는, 인지 노동이 중요한 노동형태가 될 때에는 가치법칙 자체가 소멸하리라는, 즉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생산적 노동 개념이 의미를 상실하리라는 (……) 전망 속에서 통일시켰다."

저자의 주장대로, 가치법칙이 소멸하게 되면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는 경계와 함께 논쟁의 딜레마 자체도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렇듯, 전통적 가치법칙을 기각함으로써 논쟁 구도 자체를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딜레마로부터 구하는 것이 조정환의 궁극적인 해법인 셈이다.

자, 이제 이러한 주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조정환은 논쟁의 딜레마를 해결할 만한 설득력 있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해법에 의하면,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마르크스의 두 가지 명제 모두 그 어느 것도 기각되지 않고 나름의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과 착취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철 지난 이론으로 왜소화 되고 결국 철저하게 무력화 되고 있다. 비물질 노동도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생산적 노동이 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은 단순히 추상적 논리의 영역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비물질 노동을 '실제적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주장은, 비물질 노동이 '실제적으로' 자본에 의해 착취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마르크스의 착취론은 더 이상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가치법칙의 폐기가 예의 생산적 노동 논쟁의 딜레마에 대한 궁극적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위 인용문을 통해 본 바와 같다.

정리해보자. 조정환은 인지 노동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그 출발점으로 마르크스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여기서 가장 큰 쟁점은 마르크스가 한편으론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범주에 포함시키는 반면 다른 한편으론 배제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딜레마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인지 노동(비물질 노동)이 논리적으로는 생산적 노동 범주에 포함되지만 실제적으로는 배제된다는 것, 더 나아가 인지 노동이 주된 노동형태가 되는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는 가치법칙이 소멸하면서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경계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그에 입각한 착취론이 인지 노동의 착취를 설명하는데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질문은 과연 조정환이 제시하는 해법은 정당한가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 째, 저자는 마르크스가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 논리적 차원에서만 유효할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주요한 방법론 중 하나를 놓치고 있다. 바로 '형태론'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자본, 이윤, 가치, 가격, 이자, 임금 등의 다양한 경제 범주들을 사회적 관계로 규정했다. 경제적 표면, 즉 시장에서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경제 범주들뿐이지만, 사실 이것들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인간들 간에 맺어지는 생산관계를 표상하는 '형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이윤을 낳는 자본의 속성은 자본으로 기능하는 화폐, 공장, 기계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생산관계의 산물이다. 상품의 가치와 가격 역시 모든 노동 생산물의 당연한 본성이 아니라 시장 경제에서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매개로 형성되는 경제 주체들의 사회적 관계가 경제의 표층으로 현상할 때 취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형태론은 경제 범주들을, 사회관계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물리적, 본질적 속성의 차원으로 파악했던 기존의 정치경제학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된다.

수행되는 노동과 그 생산물의 소재적 내용, 물질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 정의된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은 바로 이러한 형태론을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논리와 실제의 이분법에 기댄 조정환의 해법에는 이러한 형태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사유가 '실제'와 단절된 '논리'의 영역으로 제한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논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실제'를 그 근본적 뿌리에서부터 설명해 내는 것 (마르크스는 이를 '진보적(radical)'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론이 갖는 의미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둘째, 비물질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기는 하나 자본에 고용되어 수행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논의에서 제외시킨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를 마르크스가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범주에서 배제했다는 확정적 주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러한 언급이 등장하는 <잉여가치 학설사>에서 마르크스는 배우와 선생의 예를 들며 이들이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사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만 수적으로 미미하기 때문에 논의에서 제외시킨다고 할 뿐이다.

이러한 '제외'는 단지 논의의 편의를 위함이지, 비물질 노동의 생산적 노동 범주로부터의 배제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론을 전개하는 부분에서 논의의 편의를 위해 '복잡 노동의 단순 노동으로의 환원'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 제시를 차후로 미루는 것을 문제 삼으며, 그가 이 문제를 포기한 것이고 따라서 노동가치론은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셋째, 인지 노동(비물질 노동)이 주된 노동 형태가 되면 가치법칙이 소멸되고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도 의미를 상실한다는 조정환의 주장이 담긴 위의 인용문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적 근거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고정 자본과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 (이하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절이다. 이 텍스트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물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조건을 마련하게 된다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내적 모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노동이 가치와 부의 생산원천이고 노동시간의 길이가 가치량의 결정 기준이 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론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발전하게 되면서 점점 인간노동은 그 필요량이 최소한으로 줄어듦과 동시에 생산과정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그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추동하는데, 바로 노동이 생산과정에서 점차 해방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시간들이 다방면으로의 인간능력 향상, 자아실현에 쓰이게 되는 조건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 사회의 부는 더 이상 필요노동 이상으로 지출되는 잉여노동의 착취가 아닌,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의 무한한 발전, 사회적 지성의 축적에 기초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본에 고용된 (소외) 노동의 지출에 의해 사회적 부가 창출되고 그에 따라 그 크기도 결정되는 메커니즘, 즉 가치법칙은 자연히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근거로 조정환은 인지 노동이 주된 노동 형태인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 기존의 가치법칙은 사라진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생산력 비판"의 논지 중 저자가 놓친 중요한 부분이 있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은 기술과 생산력 발전에 의해 생긴 여분의 시간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평히 누리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소유관계의 철폐를 의미한다. 자본-노동의 관계 아래서는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그 사회에 주어진 여분의 시간들을 소수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의 형태로 독점하게 되고, 자연히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에서는 조정환이 오해하듯이 산업 자본주의에서 인지 자본주의로의 변화–혹은 산업 노동(물질 노동)에서 인지 노동(비물질 노동)으로의 노동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망이 표명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강조하건대, 자본주의의 주요 경향인 생산력 발전이 그 토대인 가치법칙을 무력화시키면서 추동하는 '이행'은, 생산력 발전으로 주어진 여분의 시간들을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게 되는 조건의 창출, 즉 자본-임노동 관계의 철폐와 병행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물질 노동/비물질 노동은 전혀 부차적인 문제다. 저자는 물질 노동(공장 노동)에서 비물질 노동(인지 노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엉뚱한 설정에 집착함으로써 이 텍스트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더 엄중한 사태-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임금 노동자에서 생산과 분배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로의 전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봤을 때,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자신의 토대인 가치법칙을 허문다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고도의 발전단계에 진입한 현재의 자본주의(인지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법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보다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점차 가치법칙을 무력화하고 이것이 다시 자본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자본주의와 가치법칙의 상호변증법적 붕괴과정을 자본주의 동학의 객관적 경향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굳이 논리적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가치법칙의 완전한 소멸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소멸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이다.

이와 관련, 조정환이 서동진의 서평에 대한 반론에서 드러내고 있는 가치론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노동가치론을 수용하는 것이 마치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자본주의 자체를 옹호하는 것으로, 따라서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영속을 지지하는 논리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력의 발전'을 위에서 제시한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조정환의 가치론 이해가 갖는 문제점이 분명해진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 의해 가치법칙이 교란을 겪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품화가 전면적으로 진전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구조적 실재로 작동하게 되는 가치법칙은 오직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된 상황에서만 폐지된다는 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따라서 가치론의 수용 여부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당위에 대해 말하자면, 좌파의 입장에서 폐지되어야 할 것은 가치법칙 자체가 아니라 가치법칙을 작동하게 하는 물적 토대, 즉 상품 생산의 전면화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다. 결국, <자본론>의 핵심은 저자의 주장대로 가치론의 위기와 폐지의 필연성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위기와 폐지의 필연성을 가치론으로 해명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상품화는 필연적인 게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예컨대 그는 정리해고와 실업자 확대를 노동의 상품적 성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의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들이 노동의 상품화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반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곡하게 증명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자본은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는 반면, 가진 것이라곤 일 할 몸뚱이 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살아갈 유일한 방도는 그 몸뚱이를 고용주에게 판매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 하에선, 노동력의 상품적 성격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걸 뜻한다.

조정환이 인지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리해고자, 실업자 등 정상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데 실패한 이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데, 이런 비극적 상황은 결국 노동력은 상품이라는 냉정한 자본주의 현실을 아프게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아니라면, 애초에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판매에 실패했다고 해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일은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생산적 노동개념과 전통적 가치론의 폐기로 귀결되는 저자의 해법은, 마르크스 이론 체계의 핵심요소 중 하나인 '형태론'을 외면하고 "생산력의 발전"의 요지를 곡해함으로써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법을 전제로 한 조정환의 기획–인지 노동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자체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위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노정시키면서까지 비물질 노동을 생산적 노동 범주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마르크스의 착취론을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공장 노동 분석에만 유효하는 것으로 한정 지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 '물질적/비물질적' 범주와 무관하게 정의되는 것이라면 물질 노동이 주가 되는 산업 자본주의에서든 비물질 노동이 주가 되는 인지 자본주의에서든 마르크스의 착취론은 유효한 것이 된다. 즉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물질 노동의 착취와 비물질 노동의 착취 모두 마르크스의 착취론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되고, 따라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만 유효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폐기하고 착취론은 인지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도록 '재구성'한다는 그의 인지 자본주의론 프로젝트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올드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발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경제의 실상에 맞춰 이론의 확장을 도모하지 못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화석화시켰다는 조정환의 지적은 어느 정도 사실인 측면이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생산 영역에 있다는 테제에 안주한 나머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금융 영역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류 경제학이나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에 대응할 만한 체계적이고 정교한 '마르크스주의' 금융 이론을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보화'로 통칭되는 일련의 '새로운' 현상들에 주목하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확장을 꾀하는 조정환의 기획 자체는 분명 평가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무리하게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과 가치론을 폐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래서 필자는 저자가 차라리 인지 자본주의론을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한 반 자본주의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책의 다른 주요 논점들을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저자가 아무리 산업 자본주의 시대와 '인지 자본주의' 시대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무게를 둔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보편성과 그 현상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식의 비판–서동진이 앞서 제기한–에 직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동진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보편성이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의 보편성인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위에서 제기한, 조정환의 해법이 갖는 문제점들을 고려한다면, 저자의 근본 의도인 "인지화하는 노동 공동체의 공통된 활동 성과(부)를 시스템적으로 수탈하는" 과정의 전모에 대한 분석을 위해 굳이 '마르크스'를 호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실 저자가 (잉여)가치론을 수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인지 노동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흐려졌고, 그 결과 가치 척도로서의 노동 시간 측정이 이론과 실제 양 층위 모두에서 어려워졌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차라리 마르크스적 언어인 (잉여)가치론 자체를 버리고 다른 언어로 인지 자본주의를 묘사한다면 그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리하게 수정을 해서라도 마르크스주의라는 기표를 놓지 않으려는 건 오히려 '마르크시즘'을 반 자본주의 운동의 유일한 권위로 절대화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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