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은 차라리 낫다. 시끄럽기만 할 뿐이니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그저 시끄럽게만 구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론 가슴을 후벼 파는 짐승의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2004년 동남아 일대를 덮친 지진 해일(쓰나미)을 두고 김홍도 목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다. 그것도 이슬람 때문에, 불교 때문이란다. 조용기 목사는 일본 지진 해일이 "우상 숭배" 때문이라고 했다. 제 것도 아닌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도 하고, 어떤 시장들은 기독교인만의 거룩한 도시(聖市)가 되어야 한다고 성시화(聖市化)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말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사찰에 들어가 땅 밟기랍시고 갖가지 저주의 말을 쏟아내고, 우상이라며 단군상이나 불상의 목을 쳐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산중 석불에 시뻘건 페인트로 십자가를 덧칠해 놓기도 한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부리는 패악질도 문제지만,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당하는 상처는 훨씬 깊다. 종교 문제에 대한 말다툼 끝에 인간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경우는 너무 흔한 일이다. 아내나 남편이 이단이 되었다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거나 목사들의 '이단 클리닉'에 넘기기도 한다.
맹목적이고 폭력적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다. 최소한의 상식도 외면하는 사람들. 그들은 광신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곳곳에 포진해있다. 마냥 피하기만 할 수도 없다. 일터와 학교에서, 거리 곳곳에서 지금도 그들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 아니다>(최동훈 지음, 삼인 펴냄). ⓒ삼인 |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 아니다>(삼인 펴냄). 도발적인 제목이다. 419쪽이나 되는 두툼한 단행본 한 권이 오로지 이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쓰였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경전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 특히 광신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도발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 아니다>를 쓴 최동훈은 무명인이다. 책날개에 달린 지은이 소개로도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단서는 별로 없었다. 무명인이 받는 푸대접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최동훈의 책은 <강원도민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으니 독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책 속에서 이 책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 아니다>와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무명인의 책이라고 허투루 볼 일은 아니다. 최동훈은 만만치 않은 내공을 바탕으로 성경을 분석했고, 그 결과 근본주의자들의 허구를 단박에 깨버리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기독교 신자들은 구약 뒤에 신약을 합해 놓은 <성경>을 하느님의 책이라 믿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책은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단 하나의 틀림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라고 한다. '디모테오 2서' 3장 16절의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 등의 구절이 그 근거란다. 그래서 성경은 전혀 틀림이 없단다. 바로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 성경무오류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啓示)는 한자어 그대로 열어서(啓) 보여주는(示) 것이다. 베일을 젖혀서(비밀 같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성경에 오류가 없다면, 그건 단지 신을 드러내 보여주는(啓示)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만 오류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역사적·과학적 사실과는 무관한 지어낸 이야기들이 많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다.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곰이었던 사람(熊女)과 결혼해 단군을 낳고, 단군을 조선을 세워 1500년 동안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진흙으로 남자를 만들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 만들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처럼 허황되기 짝이 없다. 단군의 1500년은 아담이 930년을 살고, 아담이 130세에 낳은 아들 셋은 920년을 살았고, 셋이 105세에 낳은 아들 에노스는 905년을 살았다는 '창세기' 6장의 이야기처럼 황당하다.
구약과 삼국유사에는 역사적·과학적 사실과 무관한 허황된 이야기들이 잔뜩 나오지만, 죄다 백해무익하다고 내칠 필요는 없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온 이야기 속에 담긴 오래전 선조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맥락이나 교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면 된다.
그러나 성경을 틀림없는 하느님의 책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경우엔 다르다. 말 뜻 그대로 옛날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한 글자도 빠뜨리지 말고 다 믿어야 한단다. 성경에 대한 약간의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의심하거나 물으면, 곧바로 '불신지옥'이라는 어마어마한 협박을 들이댄다.
구약은 신약과 전혀 다른 맥락의 책이다. 집필 의도도 다르고, 심지어 언급되는 하느님도 서로 다른 존재이다. 최동훈이 지적하듯 "구약이 하나님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호령하는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하나님"(358쪽)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늘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언제나 뒷전에 물러나 있는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요란한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조용한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수다스러운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침묵하는 하나님이다." (359쪽)
기독교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십계명만 해도,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은 각각 다르다. 앞의 것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에 의해 직접 체결된 계약으로 나오지만, 뒤의 것은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하는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다. 내용도 조금씩 달라서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제4계명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 쉰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신명기'에서는 이집트 노예 생활을 회상하며, 해방자인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로 여겨지고 있다. 구약에는 이런 식의 충돌과 오류가 곳곳에 있다. 구약의 권수도 개신교는 66권, 천주교 73권, 동방정교회 76권, 에티오피아 정교회 81권 하는 식으로 제각각이다. 그저 그러려니 할 일이다.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도 구약의 창조 설화는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아담은 진흙으로,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 만들었다는 것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진짜로 남자는 여자보다 갈빗대가 하나 적은 줄 알았다. 하느님이 하얀 수염이 달린 인자한 얼굴의 할아버지인줄 알고 있던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모두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글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도록 돕는 것처럼 어린이들에게 단순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될 건 없다. 그저 알기 쉽게 믿으면 천당, 믿지 않으면 지옥 또는 착하면 천당, 악하면 지옥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럴만하다. 어린이들에게 더 이상 쉽게 이야기할 도리가 없을 정도까지 쉽게 설명하는 건, 어쩌면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배려이며 책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단순화가 주일학교 초등부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기독교 사상은, 사실 사상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도 없지만, 대개 유치부나 초등부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최동훈이 관찰하기에 불교도나 기독교도나 모두 자기 종교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기독교 사상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양 착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 사상은 정통적인 의미에서 단 하나로 귀결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다." (15쪽)
최동훈이 꼽은 기독교 사상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단순화'였다. 기독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여덟 음절로 단순화된다. 단순하게 믿음만을 강조하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는 자연재해도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이웃과 연대하는 사랑의 실천이나 최소한의 도덕보다도 그저 믿음만을 되뇌는데 가장 든든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래서 최동훈은 성경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이 내려 주신 책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래야 도덕보다 믿음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에도 변화가 올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변화가 와야 종교로 인해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깊게 깔린 불신과 반목의 그늘도 조금은 가시리라 보기 때문이다." (66쪽)
지은이의 집필 의도처럼 이 책이 불신과 반복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거두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한 믿음을 넘어선 도덕이 무엇인지는 '마태오서' 25장에 나온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지만, 정작 예수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예수를 믿느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면서도 예수의 육성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된단다.
최동훈은 신학 연구자가 아닌데도 구약에 대해 꼼꼼한 분석을 내놓았다. 가끔 거칠기도 하고 때론 다른 이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그의 논증은 치밀하고 접근은 진지하다. 어떤 신학자의 글보다 쉽게 읽히고, 무엇보다 빨리 읽힌다. 논리는 명쾌하고, 때로 깊숙한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쾌함도 느낄 수 있다.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다만, 서문이 너무 길고 장황해, 자칫하면 책을 그냥 덮어버릴 뻔 했다는 점은 아쉽다. 할 말이 많겠지만, 꼭 해야 할 말들만 절제된 목소리로 들려주었으면 좋았겠다. 책의 뒷부분에 성경 구절 색인을 넣어줬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글은 <공동 번역 성서>를 바탕으로 썼다. 그래서 책 제목에 언급된 '하나님'은 공동 번역에 따라 '하느님'으로 썼고, 인용한 성경 구절도 모두 공동 번역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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