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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비' 내리는 디스토피아, 인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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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비' 내리는 디스토피아, 인간은 없다!

[프레시안 books] 우석영의 <낱말의 우주>

도(道)는 '길', '진리', '방법' 등의 의미를 지닌 한자다. 애초 의미는 '길'이었고, 여기에서 '진리', '방법'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저 유명한 노자의 <도덕경>은 '덕(德)'과 함께 이 '도'라는 한 글자의 풀이로 수렴된다. 한자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진부한 상식이다.

그런데 한자는 상형문자다. 즉, 한자의 출발은 그림이며, 지금도 거기에는 그림의 요소가 담겨 있다. 다만 태곳적 그 그림은 수 천 년을 지나며 지극히 추상화되었기에 그 본래 자취를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중국인들 자신이 <설문해자> 같은 방대한 그림 풀이를 필요로 했고, 지금도 학자들은 갑골문에서 현존 한자의 뿌리 그림을 찾으려 한다.

'도'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길'이라는 의미와 연관된 어떤 그림을 담고 있다. 일반적이고 단순한 풀이는 이 글자가 '머리 수(首)' 자를 포함하는 것에 착안해 사람이 특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저명한 갑골문 학자 시라카와 시즈카는 사뭇 충격적인 이견을 내놓았다. 단순히 길을 가는 사람을 형상화한 게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들고 가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길을 나서는데 왜 남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가? 옛 사람이 미지의 길에 나서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액막이로 적의 수급을 들고 가는 것이라는 게 시라카와의 설명이다.

이 설명을 과연 정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여기에서 논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도'라는 한자에서 시라카와가 읽어낸 그림이 우리를 수많은 연상과 상상의 연쇄, 이야기의 바다 속에 빠뜨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디로 이어질지, 누구와 마주칠지,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오직 누군가의 잘린 목에 의지하며 발걸음을 떼어야만 한 옛 사람의 마음. 혹은 그런 사람과 마주친 그 길 위의 또 다른 옛 사람의 마음. 이것은 그야말로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펴냄)의 한 장면으로 어울릴법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의 나래를 더 펼쳐본다면, '도'에 담긴 이 뜻밖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연상들을 한자 문화권에서 전개된 '도'의 사유들과 만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도덕경>을 비롯해 유불선 삼교에서 저마다 풍부하게 전개되었던 '도'의 철학들을 이제까지의 상투적인 해석들과는 달리 새롭게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자란 이런 물건이다. 그 한 글자 한 글자에는 그림이 숨어 있고, 그 그림은 저마다 이야기보따리 한 꾸러미씩이다. 그것도 수천 년의 이야기, 동아시아에 살았던 수많은 선인(先人)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앞길에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다. 더 이상 미지의 조우를 두려워해 남의 머리를 들고 갈 필요 없이, 우리가 이 외로운 길 위에서 마음에 새기며 늘 벗할 수 있을 그런 이야기다.

사실은 한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단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옛 사람들의 지혜와 맞부딪히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주요한 한 경로가 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이 길을 따라가며 사색했고, 우리의 경우에는 다석 류영모가 그 길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류영모의 넋에 감화된 한 저자가 또한 이 길에 나섰다. 그리고 그 산책의 경험담을 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일기로 적어 우리에게 선보였다. 우석영의 <낱말의 우주>(궁리 펴냄)는 그런 책이다.

시대의 절박함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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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낱말의 우주>(우석영 지음, 궁리 펴냄). ⓒ궁리
우석영은 세상의 흔한 분류법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이력의 소유자다. "연구보다는 시서화 창작을 (즉 놀이를) 더 좋아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자이자 문필가"라는 책날개의 자기소개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회학, 문학, 철학을 두루 공부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박학 풍은 <낱말의 우주> 안에도 선명히 드러난다. 책을 쭉 훑고 난 뒤에 내가 느낀 바로는 함석헌이 말한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제일 어울릴 법하다.

그렇다. 우석영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 결실을 토해내느라 수백 쪽의 지면이 필요했을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생각이 미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때로는 조선말 실학자들의 유서(類書)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결코 요령부득은 아니다. 110여 개에 이르는 각 단상은 특정한 한자 한 글자에서 그림을 찾아내고 그것을 풀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이 글자 풀이가 종횡으로 확장되며 미처 예상치 못한 철학적 사색으로, 사회 비판으로 이어진다. <낱말의 우주>라는 제목처럼 단 한 글자의 한자로부터 다채로운 이야기의 실타래를 뽑아낸다. 단상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어느새 이러한 사유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것이 마치 음악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음악이 귀에 익다 보면 자연스레 이것이 단순한 소곡들의 무질서한 모음이 아니라 거대한 교향악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이 책의 단편들은 서로 모여 9개의 장을 이루고 있는데, 우주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되는 제1장 '우주의 지붕, 만물의 그림'부터 이 책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인 '어린이 되기'를 역설한 제9장 '어린이 됨의 존재론'까지 전체를 일관하는 생각의 커다란 흐름이 존재한다.

그 생각의 흐름을 몇 개의 명제들로 압축하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다. '만남', '세계의 선물됨', '나 없음', '간이(簡易)한 삶', '어린이(얼인 이) 됨' 등의 중요한 푯말들은 독자 자신이 이 책에서 직접 반가이 해후해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낱말의 우주> 전체를 꿰뚫는 어떤 절박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절박함은 저자의 시대 인식에서 비롯된다. 우석영은 "우리의 삶의 세계가 '위독하다'고 주장"한다(37쪽). 진부한 사회과학 용어를 동원해 규정한다면, 이 병증은 곧 모든 인간을 생산-충족-폐기의 회로 안에 가두는 자본주의 소비 문명이고, 그것의 최신판인 신자유주의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전제(專制)에 맞설 무기가 되지 못하는 껍데기 민주주의다.

우석영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 파괴적 문명이 인간의 생존을 포함해 뭇 생명을 위협하는 지구 생태계 파괴로까지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그 현실을 낳은 어떤 삶의 태도 그 자체의 극복에 바탕을 둬야만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비판은 더욱 깊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다소 길지만, 이런 생각이 뚜렷이 드러내는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글자 幽(그윽할 유)에 대한 부분이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열쇠가 되리라는, 널리 퍼져 있는 막연한 믿음의 맹목성을 오늘날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지구 기후 변화 대처법으로 제시된 '플랜 B'라는 지구-엔지니어링이다. 플랜 B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의 가두리에서 혹은 심층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는, 어떤 식으로든·언제든 과학 천재-테크니션이 나타나 (환경) 위기에 처한 인류를 일시에 구원해줄 것이라는 유아적 믿음이다.

(…) 기후 변화에 대한 근본 대처법으로 요청되고 있는 '삶의 양식 전환 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비단 지금껏 실컷 누려왔던 바를 계속 실컷 누리고 싶다는 노골적 소비 욕망뿐만이 아니며 이 우스꽝스럽고 유아적인 그러나 강력한 신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유아적 신화를 가치 있는 것으로서 만들어주는 밑돌-아이디어는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의 이름은 바로, 과학을 신격화하는 과학주의다." (122쪽)


과학주의의 유토피아는 더 이상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생산-충족-폐기의 회로를 강화해주거나 기껏해야 그 알리바이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우석영에게는 한자에 담긴 수십, 수백 세대의 역사로부터 길어낸 지혜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같은 이념 체계는 일종의 상투어가 되어버리고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조차 그들을 내세운 조직 체계에 의해 참된 권위를 잃어가는 시대에 저자가 찾아낸 비판의 무기고가 곧 수천 년 역사와 우리의 일상어가 서로 만나는 그곳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묻다

위에 잠깐 언급한 이 책의 중요한 푯말들을 아우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인 것 같다. 우주란 무엇이냐고 묻는 첫째 단락에서부터 우석영의 관심은 기실 우주에 있지 않고 그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사람이라는 것", "사색하는 인간", "창조하는 인간", "짐생에서 살옴으로 : 사람의 문명살이", "사람은 언제 고매해지는가" 같은 각 장의 제목도 이런 심증을 굳혀준다. 한 대목에서 저자는 "인간은 '문제' 또는 '과제'"(621쪽)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지구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에 대해 묻는다? 이것은 그 시대 인식의 절박함에 비하면 너무 느긋한 대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대응의 훌륭한 전례가 이미 있다. 그것은 최인훈의 소설 <화두>다.

소설이라기보다는 긴 에세이에 가까운 이 책에서 최인훈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한반도 분단의 지속에 대한 물음을 다름 아닌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시켜 그 답을 구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내놓은 사색은 이제껏 그 어떤 사회과학자가 내놓은 것보다 훨씬 깊이 있고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낱말의 우주>는 장년이 되기 전에 민주화의 세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신자유주의의 모순 폭발을 모두 경험한 한 세대가, 류영모, 함석헌의 가르침과 현대 철학, 좌파 사회과학의 지적 영향을 서로 만나게 할 줄 알게 된 한 세대가 최인훈의 그 작업을 이어받아 수행한 한 결과물이다. 저자가 제시한 답안이 얼마나 참고가 될지는 각자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누구든 <낱말의 우주>에서, 우리 세대에도 작업은 분명히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묻고, 비판하며, 상상하기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 중의 누군가는 이미 시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낱말의 우주>는 '우리'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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