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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 학살한 이스라엘 '전쟁 영웅' 샤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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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 학살한 이스라엘 '전쟁 영웅' 샤론 사망

'지속 가능한 이스라엘' 목표로 강압 정책, 말년에 '실용 노선'으로 선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지도자로 꼽히는 아리엘 샤론이 85세를 일기로 11일(현지 시각) 사망했다. 샤론은 8년 전인 2006년 1월 총리로 재직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연명 치료를 받아왔다.

샤론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데 일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샤론의 사망 소식에 대해 서방권에서는 대체적으로 "뛰어난 지도자가 죽었다"는 애도를 보인 반면, 팔레스타인 반응이 차가운 이유도 샤론의 이런 과거사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샤론 전 총리는 아라파트 암살에 책임이 있는 범죄자"라면서 "우리는 그가 전범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서는 모습을 보길 바랐다"고 밝혔다. 또한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샤론의 사망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의 피를 손에 묻힌 범죄자가 사라졌다"고 환영했다.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주민들이 11일(현지 시각)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사진을 짓밟으며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정착촌 기획자가 말년에 철수 정책 실시

그러나 샤론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말년에 들어 '실용주의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2005년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철수하는 정책을 실시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당시 이 조치는 "닉슨의 중공 방문"에 비유될 정도였다. 리쿠드당 내의 반발이 거세자 그는 '카디마'라는 중도 우파 정당을 창당했다가, 이듬해 3월 총선을 앞두고 쓰러졌다.

샤론의 측근 라난 기신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샤론이 정착촌 건설을 주도하다가 철수로 전환한 주된 이유는 팔레스타인 독립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기신은 "샤론은 이념보다는 실용주의적 정치인"이라면서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자기에게 권력이 있는 동안 평화로 가는 과정을 보길 원했다"고 덧붙였다.

팔레스타인에 강압 정치를 펴면서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기획했던 샤론은 지난 2001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는 불가피하다"고 언급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샤론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된 반면, 정착촌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보호자로 여겼던 샤론이 2003년 재선에 성공한 이후 그를 '적'으로 간주했다.

샤론은 가자 지구 전면 철수, 서안 지구 일부 철수 등의 조치를 했을 뿐 아니라, 서안 지구를 거의 대부분 둘러싸는 450마일의 장벽을 완성했다. 자기가 반대해온 장벽 건설을 스스로 완성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강경책의 상징적 인물

샤론이 말년에 정계에 복귀한 이후 펼친 정책은 그를 총리에 복귀시킨 지지 세력의 기대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01년 샤론이 총리로 복귀한 배경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무력 투쟁이 위협적으로 전개되면서 1970년대 가자 지구에서 보여준 샤론의 활약을 기대했던 측면이 있다. 당시 샤론은 군 사령관으로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을 거의 궤멸 상태로 몰아붙이는 전과를 올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군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치를 떨 정도로 악명이 높다.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53년 특수부대 '유닛 101' 사령관으로 벌인 활동이다. 그해 이스라엘의 한 가정에서 어머니와 두 아이가 살해된 사건의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 거점으로 알려진 요르단의 키비아 마을을 습격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샤론이 이끄는 '유닛 101'의 작전으로 민간인 69명이 살해됐다. 절반 이상이 여자와 어린이였다. 이 사건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규탄 성명을 채택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이 수십 년 동안 규탄 시위를 벌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당시 조사도 하지 않고 "이스라엘군과 관계없는 사건"이라고 덮어버렸다. 키비아 사건의 영향은 컸다. '유닛 101'은 초법적이며 어떤 악조건에서도 작전을 할 수 있는 특수부대로 떠올랐고, 이스라엘 정예부대 전반에 걸쳐 비슷한 의식이 스며들게 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로 구성된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영토를 세 배나 늘린 전쟁에서 샤론은 사령관으로 큰 활약을 했다. 특히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습격으로 이스라엘의 패전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던 전쟁에서 샤론은 부대를 이끌고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군 배후를 공격하는 과감한 작전을 벌여 전세를 뒤집었다. 이 작전은 상식적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지만, 샤론이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이유가 됐다.

이후 샤론은 정계에 투신해 자유당과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극우 정당 헤루트의 정치연합인 리쿠드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77년 베긴이 이끄는 리쿠드당은 이스라엘 선거 사상 처음으로 노동당을 꺾었다.

이후 리쿠드당에서 입지를 다져온 샤론이 추구한 필생의 목표는 '지속 가능한 이스라엘 국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팔레스타인에 무자비한 강압 정책을 폈다.

1982년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1983년 국방 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보수 우파 리쿠드당을 이끄는 유력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99년 리쿠드당이 노동당에 참패하면서 그의 정치생명도 끝난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1년 이스라엘 총선 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며 총리로 화려한 복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정착촌 철수와 점령지 철군을 확대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샤론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협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의지나 힘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샤론은 일방적인 철수와 장벽 건설을 통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샤론의 반대파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책임질 힘을 실어주지 않은 채 추진된 샤론의 정책으로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 하마스의 힘만 키워준 결과를 낳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샤론의 공과에 대해 이스라엘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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