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농사도 들에서 하는 일은 모두 매조지를 했다. 김장용 무도 뽑아내고, 타작을 끝낸 콩대도 모두 밭에 뿌렸다. 요즘은 아침 기온이 영하 5도 안팎이니 갈 데 없는 겨울이다. 하루살이떼 중엔 날개가 새하얀 무리들도 있다. 얼마 전 그 녀석들이 바람에 날릴 때는 눈이 내리는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속았다. 마침내 소설(小雪)을 하루 앞두고, 싸락눈일망정 첫눈이 내렸다. 이른 아침 강둑을 지나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길 위에 하얀 망사가 깔린 듯했다. 굴뚝에서 장작 타는 연기가 나풀나풀 솟는 집만 몇 있을 뿐, 날이 추운 탓인지 마을은 인기척도 없었다. 강변의 전선줄에 앉은 멧비둘기 한 마리만이 미동도 없이 눈이 내린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까, 저 녀석은.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라는 '문패'를 달고 글을 쓴 지도 햇수로는 세 해째, 만으로는 두 해를 꼬박 채웠다. 지나고 보니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이 문패가 달린 집에서 머물렀던가 싶다. 방송사 PD 출신인 나는 본래 글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예전에 썼던 원고들을 다시 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대목이 많았다. 글이 많이 서툴렀다. '십분심사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처럼 문자로 그 뜻을 드러내는데 어려운 주제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문자 자체를 다루는 일에 내 자신이 매우 익숙치 못했던 것 같다. 원고 수정작업을 하면서 도처에서 자책하고 내 자신과 불화(不和)했다.
귀농하기 전, 언젠가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가 쓴 <Writing Down the Bones>라는 책을 만났다. 국내에서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한문화 刊)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말을, 나탈리는 "자기 마음 속의 본질적인 외침을 있는 그대로 적으라"라는 뜻으로 풀어냈다.) 지금은 그 책의 내용이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저자인 나탈리가 미국의 한 명상센터에서 선(禪) 공부를 했었고, 자신의 글쓰기에도 그 선을 접목하려 했던 사실에 당시엔 적잖은 구미가 당겼었다.
특히 나탈리에게 내가 흥미를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스승인 일본인 출신의 다이닌 카타기리(大忍片桐) 선사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다이닌 선사는 다름 아닌 스즈끼 슌류(鈴木俊隆)의 제자였다. 스즈끼 선사는 바로 불후의 선서 가운데 하나인 <선심초심(禪心初心)>(Zen Mind Beginner's Mind)의 저자이기도 하다. 문중의 족보로 치면 나탈리는 스즈끼 선사의 손(孫)상좌뻘인 셈이었다. <선심초심>은 지금도 내가 애독하는 선서이다. 그 책에는 스즈끼 선사의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이 묵조선(黙照禪) 특유의 가풍과 함께 잘 나타나 있다. 서구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긴 하지만, 선리(禪理) 또한 현대적인 언어로 잘 표현해 냈다.
다시 나탈리 골드버그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가 한 말 중에 지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딱 한 문장이다.
"당신의 에고(ego)가 당신의 글에 참견하려 할 때는, 그 에고에게 따로 할 일을 만들어 주라."
사물의 본질을 천착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되, 자신의 내부에서 에고가 그 작업에 간섭하려 했을 때는 그 에고에게 다른 일감을 주라고 그녀는 말했다. 예를 들어, 봉투에 주소를 쓰거나 우표에 침을 묻혀 붙이는 작업 따위와 같이 글쓰기와 무관한 일감을 에고에게 던져주라는 것이다. 에고가 자신의 글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에고를 명백하게 분리시켜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에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그녀의 얘기로부터 많은 시사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내면에서 에고가 설칠 때는 아예 글쓰기를 포기했다.
사실 나탈리의 주장은 일반적인 글쓰기 텍스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이다. 에고(自我)를 자신의 내면의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분리시켜 타자화(他者化)하는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매우 낯이 설고 비일상적인 방식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우선은 내면의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자체도 쉽지가 않다. '근원적인 존재'란 우리 내면에서 어떤 정신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런 특별한 존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근원적인 존재'는 에고가 그 힘을 잃거나, 아주 사라져버렸을 때 문득 그 빈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근원적인 존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Teilhard de Chardin)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케도 한다.
"자아의 상실은 마침내 의식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나 자신보다 더 나에 가까운 위대한 타자(the Other)의 어쩔 수 없는 출현을 불러일으킨다."
의식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출현한 그 '위대한 타자'가 바로 '근원적인 존재'이다. 나탈리가 글쓰기의 방법론으로 그녀만의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선과 명상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법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대체로 에고가 일상의 삶을 주재하는 주체이다. 그 에고가 모든 상황과 사물을 해석하고 판단하며, 마침내 결론을 내리고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선이나 명상적 삶에서는 이 에고는 초월해야 될 대상이다. 나탈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고란, 세상은 영구불변하며,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논리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그 같은 사유의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어떤 주체"이다. 그러나 세상은 쉼 없이 변화하며,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까닭으로 에고에 얽매인 글쓰기는 사물의 본질과 진실을 왜곡할 뿐이라고 나탈리는 되풀이해서 말한다.
내 자신은 나탈리의 글쓰기 방법론에 깊이 공감했지만, 실제로 내 글이 그 같은 방법론에 어느 정도 충실했는지는 스스로도 의문이다. 사실 에고에 대한 나탈리의 지적은 굳이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얘기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구현될 필요가 있는, 진리의 한 측면처럼도 보인다.
귀농하기 전까지 내가 해왔던 공부들은 대부분 사회과학 분야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글을 썼다면 농업부문의 여러 주제들을 대상으로 시론(時論) 성격의 글을 썼겠으나, 농사를 지으면서 내 자신의 삶도 적지 아니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런 변화는 글의 주제와 소재를 스스로 제한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농부라는 신분의 필자로서 응당 참여하고 자신의 논지를 드러내야 마땅한, 여러 사회적인 의제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았다. 글을 그렇게 써 왔던 만큼 최근 쌀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현실을 보노라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비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참으로 쓸쓸한 세상이다.
우리의 삶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곤궁하고 핍진한 것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농부로 살아온 내 삶도 그러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존재했을 때, 내 얼굴에 드리워졌던,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그 그늘은 온전히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비망록의 일부를 옮김으로써 이 무렵의 소회를 대신한다.
"얼마 전 입동(立冬)을 코앞에 두고 산콩을 털었다. 파란 멍석 위에 샛노란 햇콩이 쏟아졌다. 검불과 분말 더미를 이룬 티와 쭉정이들 틈새에 콩들은 박혀 있었는데, 만추의 잔광(殘光) 속에서 나는 그것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햇콩의 낱알들은 방울방울 눈물방울처럼도 보였다.
어느 곡물의 알갱이에서 눈물방울을 보다니 아무래도 이즈음 내 마음속의 정조(情調)는 퍽이나 예사롭지만은 않은 듯도 하다. 그 낱알들에서 내 삶의 굽이굽이를 보았던 것일까. 그 정조는 딱히 쓸쓸함이나 자기연민 따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사무침' 같은 것은 담고 있는 것도 같다. '왜 사무친다는 것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몹시 불편하다. 본디 '왜(why)'라는 형식의 질문은 많은 경우 사물의 속내평을 드러내는 데 적절한 도구 노릇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라는 질문과 함께 사물을 분석하고 가치판단을 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물이 지닌 본래의 참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다. 그래, 묻지 마시라. 해는 서산에 지고, 이 남루한 농부는 '다만' 사무친다.
산과 강과 달과 별, 들녘, 바람부리 혹은 하늘바라기, 호랑지빠귀와 소쩍새, 소스라치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만나던 수많은 풀들과 꽃들, 하늘하늘 풀잠자리와 텃새들, 폭설 위에 발자국을 찍던 고라니, 너구리 등 야생의 동물 친구들, 노을과 어둠, 여명, 안개, 강둑과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산길에 깊이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 자연의 친구들을 마음을 다해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 이 원고를 끝으로 <농막에 불을 켜고>의 연재를 마칩니다.'소설의 시점(視点)과 명상의 원리'라는 주제의 원고는 약속과 달리 완성하지 못하고 연재를 마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초고를 정리해 보니 A4 용지 50매 분량이었는데, 분량도 그러하려니와 제가 더 사색해야 할 부분도 있고 해서 훗날로 미뤘습니다. 후에 혹 노동선(勞動禪)과 노동현장에서 이루어진 선문답(禪問答)을 주제로 글을 쓸 기회가 있게 되면, 그 때 다시 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저의 부족한 글에 따뜻한 마음과 격려를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님들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글 쓰는 일의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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