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初心)이란, 장상(長常) 사무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구메구메 뒤돌아보았을 때, 저 멀리 보이는 곳에 초심은 못내 머물렀다. 회심(回心)을 하려한들 그때의 마음을 되찾는다는 것은 지난하다. 초심이란 늘 그러하니 도리 없이 추억이다.
비망록의 앞부분을 펼쳐보니 첫해 농사를 짓던 시절의 삶들이 빛바랜 채로 기록되어 있었다. 농사와 자연 앞에서 나는 어떤 초심을 가졌던가.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농사에 대한 작은 지혜들을 배워갈 때마다, 섬세하게 반응했던 나의 내면들을 재회해보니, 정말 그렇게 몸을 떨며 살았던가 싶었다.
무엇보다도 새삼 놀라웠던 것은 그 비망록에서 만난 어머니의 삶 때문이었다. 40대 후반까지 농부로 살았던 그녀는, 일흔둘의 연치로 아들이 사는 산골을 찾아와 얼마간 머물렀었다. 바로 그 시절의 그녀의 삶도 비망록 속에 담겨 있었다. 그녀가 내게 베푼 가르침을 그곳에서 낱낱이 다시 만났다. 그녀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을 두고 농부들이 체득한 지혜에 관한 것들이었다. 속담이나 격언 혹은 잠언의 형식으로 된 그 지혜들은 농경사회의 보석 같은 문화유산처럼 보였다. 이 글은 내가 그녀로부터 전문(傳聞)한 그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다.
그해 초여름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6월 초이튿날. 캄캄한 새벽에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났다. 그 무렵 곧잘 두벌잠을 자곤 했던 나는 얼결에 잠이 깼다. 작달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지붕에선 우당탕탕, 하는 굉음들도 들려왔다. 당시는 봄 가뭄이 몹시 심했던 뒤끝이라, 빗소리가 거친 것이 수상쩍긴 했지만 우선은 반가웠다. '약비'이거나 '금비'이려니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사단이 벌어져 있었다. 마당에서 도랑으로 이어진 곳들을 살펴보니 우박이 한 바가지씩 쌓여 있었던 것이다. 밤새 얼마간 녹기도 했을 법한 우박은, 크기가 콩알만 했다. 아니 세월이 어느 때인가. 6월 초순이 아닌가. 밭을 둘러보니 우박을 맞은 콩과 고추의 여린 순들은 태반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올 여름에 콩노굿을 구경하기는 틀렸는가 싶을 정도였다. 고샅에 나가보니 마을도 온통 난리였다. 하늘이 노하신 것 같다며 탄식하던 어머니가 말씀 하셨다.
"누가 하늘을 아느냐, 내가 아느냐, 네가 아느냐."
그날 그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농사란 인간이 홀로 짓는 게 아니라는 걸 마음에 절실히 새겼다. 누가 하늘을 아는가. 내가 아는가, 그대가 아는가. 어머니는 "하늘이 저리 하셨으니, 작물을 다시 키우는 것도 하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어머니는 작물을 보는 눈이 독특했다. 그녀에겐 나름의 궁리를 통해 작물을 이해하고, 작물과 '소통(疏通)'하는 방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작물을 인격화해서 묘사할 때가 많았다. 작물의 본성과 심리도 역시 인격화했다. 그리곤 그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작물에 깊은 관심과 선의(善意)를 보여주었다. 옛 현자들도 말했다. 그대가 어떤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려 하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그 사물 앞에 서서 깊이 집중하고, 선의와 친절한 마음을 내라. 그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녀가 작물을 그렇게 본 것은 또 '의인(擬人)' 소설의 형식처럼도 보였다.
어머니가 작물을 인격적으로 묘사한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그것은 작물도 인간처럼 자기 마음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초보 농사꾼이었던 나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작물에 대한 비밀들을 알게 된 것인 양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시절 어머니가 내게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들을 적는다.
"저 호박씨가 땅속에 몸을 숨긴 채 싹을 내지 않고 있는 것 좀 봐라. 저 놈도 다 때를 보아가며 자기 살 길을 보고 나온다."
"누가 심지도 않은, 감자밭의 그 '개똥'호박은 또 어떠냐. 자기 터를 잡을 만한 곳을 살펴보고 나와서, 저리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지 않느냐."
농부들은 만상일(晩霜日) 언저리의 늦서리를 걱정한다. 옛날 중부지방에선 그 무렵이 입춘으로부터 88일쯤 되는 날이라 해서, 그 늦서리를 '88야(夜)의 이별서리'라고도 불렀다. 서리에 약한 봄 작물은 늦서리를 맞게 되면 죽는 수가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작물의 종자가 개량종이 아닌 토종 씨앗들이라면, 생존을 위한 기감(氣感) 같은 게 예민할 거라고 하셨다. 충분히 생시(生時)와 사시(死時)를 가려낼 줄 알 거라는 말씀이었다. 씨앗들을 믿어라. 그녀는 나에게 걱정 말고 며칠 전에 심었던 호박씨를 그저 기다려보라 했다. 자기가 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면 밖으로 나올 게고, 그렇지 아니 하면 땅속에 더 머무를 거라는 말씀이었다.
"한번 종노릇하면 종내 종노릇을 해야 한다."
"저것들이 빨리 기어 나와 땅 맛을 알아야 미친 듯이 자랄 터인데, 저렇게 포트 속에만 앉아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모종을 길러 밭에 옮겨 심은 작물들은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례들이 있다. 인간은 그런 작물의 경우 옆에서 시중을 들듯 관수도 해주고 그래야 한다. 어머니는 그런 노릇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 무렵 나는 호박의 일부와 오이, 갓배추, 케일 따위를 모종으로 기르고 있었다. 포트 속의 모종들은 또 그들대로 대지를 그리워하며 답답했을 게 틀림없었다.
"뒷산 둔덕에 심은 호박이 무성한 풀 때문에 넌출을 마음대로 못 뻗더라.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주저주저하더라."
"호박이라는 놈은 말이다. 뱀이 자기 열매에 닿으면 부정 탔다고 그 열매를 썩혀버린다."
"거름만 많이 주어 봐라. 박 넌출은 '네 땅이 얼마나 넓은가 보자'며 사방으로 뻗어 간다."
"박이란 놈은 입맛이 까다롭다. 호박이 옆에 있으면, 호박잎이 까끌까끌해 싫다며 박을 달지 않는다."
"넌출이 뻗어갈 때는 그 놈이 갈 길을 바로 잡아주어라."
"가물다고 작물에 물을 주어 버릇하지 마라. 그러면 그 놈이 게을러져서 힘을 안 쓴다."
"풀도 무섭다. 감자밭에 난 풀 좀 보아라. 뿌리가 얼마나 사납더냐. 비가 안 오니, 물을 빨아 먹으려고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렸더냐. 살아보겠다고 하는 짓이 사람과 다를 것도 없다."
"들깨 저것이 날이 가물다고 앙당하니 자라지도 않고 버티는 것 좀 봐라. 거름발이 좋은 땅이건만 물이 먹고 싶다고 저러한다."
"콩밭 맬 때가 됐다. 콩이란 놈은 사람한테 그런다. 네 자식 먹여 살리고 싶거들랑 내 몸이 두 대 나왔을 때 매주라."
'내 몸이 두 대 나왔을 때'란, 본잎이 나온 마디가 두 개가 됐을 때라는 뜻이다. 콩은 가뭄을 잘 타고, 풀에도 잘 치인다. 콩이 원할 때 초벌 김매기를 해주어야 잘 자란다. 어머니가 들깨 이야기를 하실 때는 그 들깨를 보며 눈을 흘기시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에 가보면 그 들깨들이 티가 날 만큼 제법 자라 있었다. 들깨들이 어머니의 눈치를 본 것일까.
"밭둑에 콩이라도 심자. 그래야 그곳에 난 풀이 힘을 못 쓴다."
"참깨를 벨 때는 가슴에 안아주듯 베라. 들깨를 벨 때는 살살 달래가면서 베라."
"텃밭의 상추를 보니, 강아지새끼처럼 거멍거멍 기어가게 생겼더라."
"산콩은 본처이고, 팥은 첩이다. 팥이 첩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긴 해도 그까짓 것 없어도 산다. 그러나 산콩은 메주를 쑤어야 하니 본마누라처럼 꼭 챙겨야 한다."
어머니가 '달구개비'라 불렀던, '닭의장풀'에 대한 소화(笑話)도 흥미 있었다. 인간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만난 닭의장풀에게 너, 잘 만났다며, 어떻게 죽여줄까, 하고 농을 거는 풍경이다. 닭의장풀도 쉽사리 굴복하지 않은 채 말대꾸를 한다.
"울타리에나 걸쳐 줄까나."
"호습고 좋지."
"그러면 토막토막 잘라버린다."
"친구 많고 좋지."
"에이, 이 녀석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려야겠다."
"아이고, 할 수 없이 죽겠구나."
'호습다'라는 말은 남도지방에서 자주 쓰는 사투리다. 어떤 '사투리 사전'은, '무엇을 타거나 할 때 즐겁고 짜릿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닭의장풀이 '호습다'고 한 까닭은 자기 몸이 울타리에 걸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릴 터인데, 마치 그네를 탄 듯한 기분이 아니겠느냐는 뜻이었다. 이 풀은 또 토막을 내더라도, 토막 난 각 마디마다 새 뿌리가 나와 여러 개체로 각각 생존할 수도 있다. 그래서 토막을 낸다는 말에 '친구가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응수한다. 닭의장풀에 시달림을 받아온 농부와 그 풀이 나눈 대화를 통해 한 들풀의 본성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소는 더운 여름날에도 이런 콩깍지를 보고 일한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소한테도 사람이 먹는 오곡산채를 그대로 한 상 차려주었다."
"밖에 내보낸 연장도 정월 보름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우는 법이다."
예전의 농경사회에선 농사를 도왔던 소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가졌었다. 소뿐만 아니라 농기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생콩이나 탈곡 뒤에 나오는 콩깍지는 소가 가장 좋아하는 풀이었다. 그러하니 늙은 소도 콩밭 앞에서는 잰걸음을 한다는 말도 생겼다. 소와 농기구를 농사공동체의 소중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농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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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션> 산(山)처럼 서 있는 여인이 어머니이다. 중학생인 필자, 두 동생들과 함께 했다. 당신의 부친은 왜'부재'중인가, 라고 묻는 것은 실례이다. 이 사진의 작가가 부친이다. 사물은 때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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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야간산행을 무수히 했던 산꾼이 있었다. 별명이'지리산 털보'였다. 그는 그 어두운 밤에 산행을 하면서도 등산로를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산을 타는 길은 '길 없는 길'이었다. 그가 했던 말이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았다.
"산행은'호흡'으로 하는 것이지,'발'로 하는 게 아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일을 하시던 모습을 회상해 보면, 그 산꾼의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노동은 단순히 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한테도 산꾼의 그'호흡' 같은 게 있고, 그걸 통해 노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호흡'은 몸의 한 표현이라기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추상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내심, 성실성 그리고 어느 산 밑이나 들녘에서 그 순간 노동을 통해 스스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 그런 존재방식 자체가 '호흡'인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노동현장에서 한 눈을 파는 법이 없으셨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메지가 날 때까지 묵묵히 일에만 헌신하셨다. 그녀는 "아무리 더러운 물도 강물을 따라 석 자만 내려가면 먹는다"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은 물의 자기정화 능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다시 말한다.
"먹을 때는 앞만 보고 먹어라. 뒤나 좌우를 살피면서 뭐 더러운 게 있나 두리번거리지 마라."
그녀는 언젠가 밭머리에 서서, "놉을 쓸 때는 밭머리부터 휘어잡고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 뜻은 품꾼들은 밭머리를 보고 밭주인을 일차적으로 판단한다는 거였다. 미리 김을 매 밭머리를 깨끗하게 해두면, 품꾼들이 밭주인의 성품을 알고 긴장하며, 또 심복한다는 것이었다. 깨끗한 밭머리는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산다'는, 밭주인의 자기표현이었다. '놉을 휘어잡고 들어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어머니의 태도는, 그녀 자신의 성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처럼 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호흡'에서 강한 힘과 그 힘의 유장한 흐름을 느꼈다. 내가 해질 무렵 밭둑 어디쯤엔가 서서, 그녀의 그 노동을 오랫동안 신비스럽게 바라보곤 했던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실까.
어머니는 인문적 소양도 풍부하셨다. 나는 그녀의 말을 통해 우리의 토속적인 언어와 농사속담도 시나브로 만났다.
만도리. '논의 마지막 김매기'를 뜻한다. "밭에 난 풀도 '만도리'를 할 때는, 호미질을 할 것도 없다. 그냥 슬렁슬렁 뜯어주기만 해라."
망고. '마지막 판에 이름'을 뜻한다. 고추 끝물을 딸 때, 어머니는 "'망고'에 따는 것이 생각보다 숱하다"고 말씀하셨다.
잡을손. '일을 다잡아 하는 솜씨'를 뜻한다. 내가 게으름을 피울 땐, "무슨 '잡을손'이 그 모양이냐"고 책망하셨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엔 "올챙이 토란나물 먹듯 일을 잘한다"고 추켜세우셨다.
'가을'이 계절만을 뜻하는 줄 알았더니, '추수'라는 뜻도 있었던가. "저 '종구라기'는 언제 '가을'할래?" 라고 묻기도 하셨다. '종구라기'는 조롱박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모국어'라기보다 모두가 어머니의 언어인 '모어(母語)'처럼 들렸다.
천기(天氣)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깊은 이해를 보여주셨다. 산 위로 떠서 산 너머로 지는 해와 하루하루를 같이 살고, 천기에 의지해 농사를 짓고 살아 오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름철엔 남풍인 마파람은 비를 부르고, 서풍인 하늬바람은 비를 쫒는다. 바람이 마파람에서 하늬바람으로 풍향이 바뀔 땐, 그 낌새를 채고 "아나, 비를 늦추는구나!"라고 하셨다. 간밤의 달무리와 별빛도 기억해 두셨다. 달과 별을 보고서도 그 눈 밝은 농부는 또 천기를 읽어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에는 들고양이가 드문드문 출입을 했었다. 어머니는 그 녀석이 새끼를 몇 마리를 달고 다니는지도 유심히 살폈다. 새끼가 두 마리이면 큰물이 두 번 지고, 새끼가 세 마리이면 큰물이 세 번 진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농사속담이나 격언들도 숱하게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는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그런 것들은 늘 지혜 자체였다. 연로하셨으니 기억력이 현저하게 감퇴하셨으련만, 그런 격언들을 적절한 상황에서 되살려 인용하셨다.
"어떤 밭의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알고 싶거들랑, 초봄에 풀 올라오는 것을 봐라. 땅이 박하면 풀색도 연하고, 초세도 약하다."
"익힐 호박은 초물을 따지 마라. 초물을 따먹고 나면 나중에 열린 것들은 늙은 호박으로 따먹기 힘들다. 서리 내릴 때까지 푸르댕댕한 채 달려 있는 호박은 아무짝에도 쓸 모 없다."
"토란은 도리깨질 소리를 듣고서야 나온다."
"콩은 아침 이슬점에 베어야 안 쏟아진다."
"참깨는 맨 아래 꼬투리가 벌어질 때 베어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고추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럴 땐 웃거름도 주지 마라."
"가물 때 김 한번 매주는 것은 거름 한 번 주는 것과 같다."
"김 맬 때는 풀이 안 난 곳도 호미도 긁어 주어라. 그래야 풀도 쉬 안 나고 작물에도 좋다."
토란이 도리깨질 소리를 듣고 나온다는 것은 보리타작할 무렵쯤 돼야 그 싹이 돋아난다는 뜻이었다. 특히 김매기에 관해 하셨던 말씀은 몇 해가 지난 후에야 이해를 했다. 가물 때는 김을 매주는 게 좋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물지 않더라도 김을 매주면 물론 작물에 좋다. 그런데 가물 때 특히 좋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호미로 작물이 자라는 지표면을 긁어주면 오히려 수분의 증발량이 늘어나 땅이 더욱 건조해지지 않을까.
나는 우연한 기회에 밥솥에서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 밥솥의 밥은 다 되고 나면 반드시 주걱으로 밥을 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진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찰지다. 저어주지 아니 하면 밥은 얼마 가지 않아 푸슬푸슬해지고 만다. 진기도 없다. 밥에 뜸이 드는 과정을 보라. 밥 속에는 수증기가 위로 빠져나오는 '통기로(通氣路)' 같은 게 무수하게 형성된다. 밥을 저어 섞어주면 그 '통기로'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밥 속의 수증기나 진기 같은 게 밥 속에 그대로 남는다. 따라서 밥은 푸슬푸슬해지지 않는다.
땅도 마찬가지였다. 땅속 수분이 수증기 형태로 지표면으로 분출하다보면 통기로가 형성된다. 김을 맬 때 호미로 긁어주면 그 통기로를 막게 된다. 지표면의 겉흙에서는 수분의 증발량이 오히려 늘지만, 한편 그 아래편 지하의 수분은 보존되는 것이다. 식물의 뿌리는 배일성(排日性)이니 지하 깊은 곳에서 그 수분을 만나게 된다.
'풀이 안 난 곳도 호미도 긁어 주어라'는 것도 일리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을 한 농사격언을 만나 사색을 해보고서야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됐다.
"소농(小農)은 풀을 보고도 안 매고, 중농(中農)은 풀을 보아야 매며, 대농(大農)은 풀이 나기도 전에 맨다."
대농은 풀이 나기도 전에 맨다니 무슨 뜻일까. '대농'이란 큰 농사꾼을 이르는 말이다. 그 뜻은 크게 두 가지였다. 풀씨의 싹이 아직 지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지표면 바로 밑에는 실제로 발아가 진행 중인 풀씨들이 많다. 지표면에 가까운 겉흙을 호미로 긁어주면 발아 중인 풀씨들은 대부분 노출되면서 말라죽고 만다. 그게 첫 번째 뜻이었다. 두 번째는 호미로 흙을 긁어줌으로써, 풀씨들이 들어있는 겉흙을 건조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풀씨는 토양 속에 일정 수준의 수분이 없으면 발아가 되지 않는다. '대농은 풀이 나기도 전에 맨다'는 말은 풀들의 그런 생태적 환경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 자기 논밭을 둘러보러 나간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그 사람은 농부가 아니다, 라고 하셨다. 논밭에는 무엇인가 반드시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사려 깊지 못한 농부는 그걸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참으로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은 분이다. 어느 곳에 가면 돼지감자 군락이 있는지, 야생의 부추와 돌나물, 참취, 원추리, '개똥'호박 따위는 또 어느 곳에서 자라고 있는지 놓치지 않고 관찰하셨다. 손이 가야할 듯싶으면 그 야채들의 조력자를 자처하셨다. 김도 매주고 거름도 주셨다. 그녀는 논밭이든 산이나 들이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항상 깊은 관심과 이해를 보여주었다.
인간이 어느 한 영역에서 무한히 깊어지면, 그의 인생도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 영역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임과 동시에 모태인 자연과 농사라면, 사색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어머니가 농사를 통해 많은 존재들과 소통했던 그 언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옛 비망록을 들여다보다가 문득'수심(愁心)' 하나를 얻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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